육체적 고통을 공감할 수가 있을까요?

처음에는 저도 그러려니하면서 넘어갔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은 질부터가 다르니까,,,,

공감은 정신의 작용이고, 그러니 정신적 고통일 수 밖에 없는 것같아요....

잘 생각해보면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으로 공감한다는게 참 아이러니한 것같아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질'이 다르다는 말이 잘 이해가지 않네요.

질문에 대답을 해드리자면, 육체적 고통은 공감 가능합니다. 공감을 무엇으로 정의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으나, 상대방의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 타인을 이해하려는 행위를 공감이라고 한다면 상대방이 겪은 육체적 고통에 본인을 대입해 느끼는 것을 공감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꽤나 많은 인간은 상대방이 겪은 신체적 고통을 관측하면 같은 부위에 통증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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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공감이 아니라는거죠

그나마 현실적으로 육체적 고통을 공감해내는 방법은 똑같은 육체적 고통을 느끼는 순간에 "상대방도 이런 고통을 느끼고있겠구나"라고 대입해보는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소 투박한 형태로 제시된 질문이지만, '감각질(qualia)'에 대한 논의로 바꾸면 어느 정도 정돈된 논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가령, 내가 바늘에 찔렸을 때 느끼는 '아픔'이라는 고유한 감각질을 다른 사람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혹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아픔'이라는 고유한 감각질을 내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으로 말이에요.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1) 프랭크 잭슨(F. Jackson)이나 토마스 네이글(T. Nagel) 같은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고 각 개인만이 고유하게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각질이 우리 내면에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잭슨의 '메리의 방' 사고 실험이나 네이글의 '박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같은 논증들이 이런 맥락에서 제시됩니다. 이 철학자들은 (글쓴이님이 주장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내면 세계를 진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2) 다니엘 데넷(D. Dennett)처럼 감각질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자도 존재합니다. 이런 철학자들은 감각질을 옹호하는 이론들이 '마음' 혹은 '의식'에 대한 잘못된 전제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비판하죠. 소위 '데카르트의 극장'이라고 하는 것이 그 전제들을 집약하는 메타포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 두뇌로 물리적인 자료가 들어오면 그 자료들을 비물리적인 '마음'이나 '의식'이 관람을 하고서 종합한다는 잘못된 이미지를 상정하게 될 때 감각질과 같은 허구적인 대상에 대한 논의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 데넷의 주장입니다. 물리적 자료/비물리적 주체를 상정하지 않고서 마음을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 데넷의 강조점이라고 할 수 있죠.

위키피디아의 '감각질' 항목에 이 논의들이 전반적으로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감각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다만, 이 논의를 위해 굳이 글쓴이님과 같이 '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을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애초에 "고통스럽다"나 "아프다" 같은 진술들은 우리 의식 상태의 표현이니, (글쓴이님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모두 '정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철학적 쟁점은 (a) 그 '정신적' 상태를 타인이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b) 가능하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라고 할 수 있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나누는 것은 이 쟁점에서 불필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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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정신적 고통을 공감하는 것(누군가의 정신적 고통-나의 정신적 고통)보다 신체적 고통을 공감하는 것(누군가의 신체적 고통-나의 정신적고통)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수용 방식은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었는데... 잘 전달이 되었는지요....

sep에 보면 c-fiber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whynot님의 질문의도는 육체적, 다른말로는 물리적인 고통을 진정 제대로 공감한다는 것이 가능하냐? 라는 것 같습니다.
저의 의견은 가능하다 입니다.

1.얼마나 제대로 공감하냐는 그 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타인이 당사자의 육체적 고통을 덜 공감할 수도 있고 더 공감할 수도 있지만
공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된 공감이 가능하냐?" 라는 질문이 "공감이 불가능하다"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2.또한 정신적 공감의 경우도 공감의 깊이는 상황마다 사람마다 다르기에 위에서 말씀드린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3.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질이 다르다는 주장은 너무 적은 예시만을 가지고 판단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좋은 고찰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고통'에 진정으로 제대로 공감할 수 있느냐?

타인이 고통스럽다고 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경험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거기에 정말로 공감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자신을 그 상황에 대입하며, 표면적으로는 같은 '아픔'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자기관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멋대로 타인의 아픔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관점에서 타인을 평하는 ‘오만’ 이 아닌가?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논의에 따르면 사실 그 내실은 텅 비어있을지도 모릅니다(§293).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다루어지는 사적 언어 논변(§243–314)과 특히 '상자 속의 딱정벌레' 비유(§293)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다룰 때는 제 생각에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논의들을 참고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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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내가 스스로에 대해서, “아픔”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아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의 경우를 통해서라고 말한다면 —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대체 어떻게 하나의 경우를 그토록 무책임한 방식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가?
자, 모든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가 아픔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그 자신의 경우를 통해서라고 한다. — 모든 사람이 저마다 상자를 가지고 있는데, 그 안에는 우리가 "딱정벌레”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들어 있다고 가정해보라.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자를 들여 다 볼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딱정벌레를 보아야만 딱정벌레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상자 안에 서로 다른 사물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그런 사물이 계속 변화한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 하지만 그래도 "딱정벌레”라는 낱말이 하나의 쓰임을 지닌다면? — 그렇다면 그것은 한 사물의 이름으로서의 쓰임은 아닐 것이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그 언어게임에 전혀 속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것으로서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 상자는 비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아니, 상자는 그 안에 있는 딱정벌레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 그러면 상자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지워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감각을 표현하는 문법을 '대상과 이름'이라는 모형에 따라 구성한다면, 대상은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우리의 고찰에서 제외된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293

해당 구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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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속 딱정벌레'를 비롯한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이 이후에 심리철학에서 제거주의나 기능주의에 많은 영향을 줍니다. '의식' 혹은 '마음'을 독자적인 존재물로 보기를 거부하고서, 입력에서 출력으로 나아가는 일종의 성향을 통해 설명하려 하는 입장이죠. 라일과 셀라스가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을 이어받았고, 특별히 셀라스 우파 진영에서 처칠랜드나 데넷 같은 인물들이 나왔으니까요. (다만,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이러한 식의 제거주의나 기능주의를 옹호할지에 대해서는 약간 논란이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감각이 '어떤 것(something)'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nothing)'도 아닌 것은 또 아니라고 주장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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