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주의와 가능세계론

필연, 우연, 가능 같은 양상 개념이 형이상학에서 꼭 필요하지만 경험주의 캠프에서 거부했고, 형이상학이 더이상 학문으로서 기능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던 때가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상 논리학과 가능세계 의미론을 통해 그러한 한계를 돌파했던 것인데, 제 질문은 가능세계 의미론이 어떻게 경험주의에서 받아들일 만한 이론이 되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가능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경험적 대상은 아니니까요.

양상논리학이라는 분야의 발전을 통해 양상 개념을 논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경험주의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러니까, 양상논리라는 형식적 틀을 통해 가능세계 의미론을 정식화할 수 있게 되었고, 가능세계 의미론을 통해 양상 개념을 정식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해하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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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용어를 조금 명확히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말하신 "경험주의 캠프"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시는진 모르겠으나, 내용상 논리실증주의자들을 말하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논리실증주의가 (여러 결이 있으나) 대체로 경험을 넘어선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부정한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필연, 우연, 가능과 같은 양상 개념들은, 사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물론 그때 철학계에서는 사실상 별 논의가 되지 않았던 개념들입니다. (그러니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양상 개념에 대해 어찌 여겼을지는 남아있는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추측을 해봐야 알 수 있을겁니다.)

양상 개념이 다시 철학계로 돌아온 건 40년대가 넘어서고 양상논리가 확립되면서 일 것이고, 60년대 부근 크립키-루이스 논의를 통해서 영미권 철학계 전반에 퍼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2)

양상 개념은 사실 형이상학적 이론을 수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수용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에서 이미 양상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와 같은 단어들이 이를 드러내죠.

다만 이 "양상 개념" = 양상 표현의 의미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보증이 되는지" 아니면 그냥 인간의 개념이라는 심리적/언어철학적 차원에서 머무르는지, 그에 따라 의견이 갈라지겠죠.
(사실 가능세계를 도입해도, 가능세계를 일종의 허구 fiction이라고 보는 입장이라면 경험론자도 딱히 부정할 건 같지 않아 보이긴합니다. 경험론자라도 셜록 홈즈라는 개념이 없다고 주장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제가 볼 때 양상 개념을 부정하는 것 자체는 경험론이든 어느 포지션이든 굉장히 큰 입증 책임을 가진 입장으로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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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이야기를 남겨보려 했는데,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하기가 쉽지 않네요.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포인트들만 짧게 남기고 갑니다.

  • 콰인의 양상성 비판은 분석성 비판의 측면과 ‘대물적 양화’ 비판의 측면에서 각각 이해될 수 있습니다.
  • 양상 언어의 표준적 모형인 크립키 모형은 그 자체로는 형이상학적 함축을 갖지 않습니다.
  • 가능세계 의미론은 양상 논리를 위해 필요한 종류의 이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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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1) 그런가요? 형이상학에서 양상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20세기 초반에, 대표적으로 콰인이 반대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Two dogmas of empiricism'), 그렇다면 양상 개념이 별 논의가 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회의론이 강력한 추세였다고 말하는 게 더 맞는 것이 아닌지 궁금해지네요! (원전을 읽었다기보다는 수업에서 듣거나 교재에서 읽은 거라서...)

(2) 기본적으로 양상 개념은 (존재론적으로) 경험론이 거부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경험주의적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 개념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질문은, 가능세계 의미론과 양상 논리학의 뒷받침을 받는 양상 개념은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었습니다. 가능세계 의미론과 양상 논리학이 양상 개념을 거부하려는 철학계의 추세를 돌파한 획기적 시도라고 배웠는데, 이것들이 왜 돌파구가 된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양상 개념을 '형식화'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인가요?

(1)

1번 질문은 패스하겠습니다. 철학사에 대한 평가이니만큼 제대로 논의하려면 자료를 뒤지고 평가의 대상과 내용을 합의해야하는데 그럴 체력이 제가 없네요.

(2)

두번째 질문은....사실 어디서부터 답해야할지 굉장히 막막합니다.

몇번을 쓰고 지웠는데....사용하신 개념어가 맞긴한데 "부분적으로만" 맞아요. 그래서 주장들이 어느순간 비약에 비약을 거듭해서 이상하게 뒤틀린 결론으로 도달하는데....이걸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감이 안 잡히네요.
(게다가 제가 양상논리나 이쪽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미묘한 차이를 무시해서 질문자님에게 잘못된 이해를 줄 수도 있고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 우선 대상(object)와 개념(concept)를 구분해야합니다. 통상 대상이라 하면 마음 독립적으로 외부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리적 대상부터 시작해서 수나 명제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까지 말입니다. 이러한 대상이 "정말로 있는지"는 각자가 가진 철학적 입장에 따라서 의견이 갈라지겠지만요.)

반면 개념은 일단은 마음 속에 있어서, 인간이 어떠한 인지적 활동을 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리 두루뭉술한건 개념조차 정확히 무엇인지 어마어마한 논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니콘을 예로 들어보죠. 뿔 달린 말. 뭐 소설이나 그림에서 유니콘을 보면 유니콘이다 아니다 구분이 가능하죠. 그렇다는 점에서 유니콘이라는 개념이 있어 보이네요.
하지만 유니콘이라는 대상이 정말 존재하나요? 우선 물리적 대상으로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진 않아 보입니다. 픽션적 대상으로는 존재할 수 있지만, 형이상학적 영역을 최소화한다면 이조차 정말로 존재하는 건 아니라 볼 수 있겠죠.

말하신 "양상"도 이와 같습니다. 양상적 개념은 그냥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반드시 있는 것"이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알고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양상적 대상이 정말로 있는가? 이건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죠.

그러니 이 주장을 오해의 여지가 없이 쓸려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양상적 대상이 마음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입장"은 [감각 지각의 대상만 존재한다는] "경험주의적 입장"이 거부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경험주의의 입장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 입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러면 이제 퍼즐이 풀립니다.

말 그대로 크립키 모형은 "양상적 개념"이 서로 어떠한 관련을 맺는지에 대한 이론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양상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이론이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 존재론적 이론이 덧붙여질 수 있겠죠.)

따라서 양상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입장과 양상적 개념에 대한 어떠한 의미론적/논리학적 입장은 구분이 가능한 겁니다.
경험주의에 입각해 양상적 대상에 대한 형이상학을 거부하더라도, 이게 곧 바로 양상적 개념에 대한 이론에 대한 거부를 함축하진 않습니다.

(3)

그래서 이 질문이 굉장히 답하기 모호한겁니다.

양상 논리학은 자연언어에 있는 양상 표현(반드시, 그러나)을 기호화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형식화한 논리 체계입니다.
(즉 양상적 개념에 대한 이론이죠.)

가능 세계 의미론은 이 "양상 논리를 응용해서"
자연 언어 전체의 의미를 해명하려는 "언어철학 이론"입니다. 둘은 같은 선상에 있다 보기 어렵습니다.
(양상적 개념을 활용한 언어철학/의미론에 대한 이론이죠.)

이 두 입장은 양상적 대상에 대한 어떠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함축하진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자연 언어의 양상 개념은 양상 논리나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보다 범위가 넓습니다.
왜냐면 통상 의무 논리에서 다루는 ought to 같은 것도 자연 언어의 양상 개념의 일부니깐요.]

(4)

이를 명확히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양상적 개념을 형이상학에 응용하려는 시도"가 정확할듯합니다. 그리고 당시 철학계가 거부하려던 것은 양상 개념/양상적 대상이 아니라, 이 모두를 포괄하는 "형이상학 그 자체"일 겁니다.

명확히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대 철학계는 형이상학을 거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양상 논리를 통해 체계화된 양상 개념은, 가능 세계 의미론을 통해서 그 응용 가능성을 인정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학자들은 생각하게 된거죠. "이게 양상 논리를 형이상학에 적용해보면 꽤 괜찮은 이론이 나오겠는데?"

그러고 양상 논리를 적용한 현대 분석 형이상학이 출현한겁니다.
이들은 경험됨 같은 경험주의적 테제보다는 이론의 설명력과 우아함 등을 자신의 이론의 지지 근거로 가져옵니다. (그리고 사실 과학의 몇몇 분야는 이렇게 자신들의 이론을 옹호하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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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해가 되었습니다. 성심껏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에서 다른 분들이 잘 설명해 주셨지만, 몇 가지 보충 설명을 드립니다. 다음은 크립키의 『이름과 필연』 서문에 있는 내용입니다.

만일 많은 철학자들이 '가능세계'라는 단어와 관련된 세계불안Weltangst이나 철학적 혼란을 피하고자 한다면, 나는 '세계의 가능사태' (또는 역사)라는 단어를 추천하고자 한다. 아니면 '반사실적 상황'이라는 단어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가능세계'라는 단어는 '…이 가능하다'라는 양상 어휘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학창 시절에 배운 것을 하나의 예—실제로 이것은 단순한 예가 아니다—나의 관점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두 개의 주사위(하나를 A라고 하고 다른 하나를 B라고 하자)를 던지면 윗면에 두 개의 수가 나타날 것이다. 각 주사위에서 여섯 개의 가능한 수가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두 개의 주사위에서 윗면에 보여질 수 있는 수들은 36가지 사태가 가능하다.

[…] 우리가 학창 시절에 확률 계산을 연습하면서, 실은 벌써 그때 (작은 규모의) '가능세계'의 집합을 접했던 것이다. 주사위 둘이 만들어내는 36개의 가능한 사태는 말 그대로 '가능세계'이다. 이를 위한 단서 조건은 우리는 여기에서 주사위 두 개와 이들이 보여주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을 무시하는(두 개의 주사위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것이다. 이러한 소규모 세계들 중에서 오직 하나만이—두 주사위가 실제로 나타내 보이는 수에 대응하는 것만이—'현실세계'이다.

[…] 현실적인 것 하나를 포함한 36개의 가능성들이란 주사위의 (추상적) 사태이지 복합적인 물리적 실체는 아니다. 또한 어떤 학생이 "A가 6이고 B가 5인 하나의 사태에서, 6인 주사위가 A인지 B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5가 나온 주사위가 아니라 6이 나온 주사위를 A로 판별하기 위해서는 '통사태적 동일성 표준'criterion of transstate identity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라고 질문한다고 해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솔 크립키, 『이름과 필연』, 정대현·김영주 옮김, 필로소픽, 2014, 29-32 passim.)

크립키의 주사위 예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가능세계'라는 개념 자체가 반드시 형이상학적 실재를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습니다. "가능세계가 존재한다"는 말은 우리가 고등학교 '확률과 통계' 시간에 배웠듯이 "가능한 사태가 존재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물며, '필연'이나 '가능'이라는 양상 개념 자체가 반경험주의적인 형이상학을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필요도 없고요.

경험주의와 상충하는 것은, 소위 '참된 양상 실재론'이라고 일컬어지는 데이비드 루이스의 입장일 뿐입니다. 이 입장은 '가능세계'라는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제시된 것인데, 가능세계가 현실세계와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지닌다고 주장하죠. 가능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에는 시/공간적이고 인과적인 단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세계에 양상적 사유로만 접근 가능하다고 주장하고요.

그러나 '필연'이나 '가능' 같은 양상 개념을 사용했다거나, '가능세계'에 대한 논의에 개입했다고 해서, 반드시 이런 참된 양상 실재론에까지 개입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참된 양상 실재론이 가능세계 개념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형이상학적 입장인 것도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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