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번 질문은 패스하겠습니다. 철학사에 대한 평가이니만큼 제대로 논의하려면 자료를 뒤지고 평가의 대상과 내용을 합의해야하는데 그럴 체력이 제가 없네요.
(2)
두번째 질문은....사실 어디서부터 답해야할지 굉장히 막막합니다.
몇번을 쓰고 지웠는데....사용하신 개념어가 맞긴한데 "부분적으로만" 맞아요. 그래서 주장들이 어느순간 비약에 비약을 거듭해서 이상하게 뒤틀린 결론으로 도달하는데....이걸 어디서부터 손대야할지 감이 안 잡히네요.
(게다가 제가 양상논리나 이쪽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미묘한 차이를 무시해서 질문자님에게 잘못된 이해를 줄 수도 있고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 우선 대상(object)와 개념(concept)를 구분해야합니다. 통상 대상이라 하면 마음 독립적으로 외부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물리적 대상부터 시작해서 수나 명제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까지 말입니다. 이러한 대상이 "정말로 있는지"는 각자가 가진 철학적 입장에 따라서 의견이 갈라지겠지만요.)
반면 개념은 일단은 마음 속에 있어서, 인간이 어떠한 인지적 활동을 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리 두루뭉술한건 개념조차 정확히 무엇인지 어마어마한 논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니콘을 예로 들어보죠. 뿔 달린 말. 뭐 소설이나 그림에서 유니콘을 보면 유니콘이다 아니다 구분이 가능하죠. 그렇다는 점에서 유니콘이라는 개념이 있어 보이네요.
하지만 유니콘이라는 대상이 정말 존재하나요? 우선 물리적 대상으로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진 않아 보입니다. 픽션적 대상으로는 존재할 수 있지만, 형이상학적 영역을 최소화한다면 이조차 정말로 존재하는 건 아니라 볼 수 있겠죠.
말하신 "양상"도 이와 같습니다. 양상적 개념은 그냥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반드시 있는 것"이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알고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하지만 양상적 대상이 정말로 있는가? 이건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죠.
그러니 이 주장을 오해의 여지가 없이 쓸려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양상적 대상이 마음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입장"은 [감각 지각의 대상만 존재한다는] "경험주의적 입장"이 거부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최소한 경험주의의 입장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 입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러면 이제 퍼즐이 풀립니다.
말 그대로 크립키 모형은 "양상적 개념"이 서로 어떠한 관련을 맺는지에 대한 이론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양상적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이론이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 존재론적 이론이 덧붙여질 수 있겠죠.)
따라서 양상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입장과 양상적 개념에 대한 어떠한 의미론적/논리학적 입장은 구분이 가능한 겁니다.
경험주의에 입각해 양상적 대상에 대한 형이상학을 거부하더라도, 이게 곧 바로 양상적 개념에 대한 이론에 대한 거부를 함축하진 않습니다.
(3)
그래서 이 질문이 굉장히 답하기 모호한겁니다.
양상 논리학은 자연언어에 있는 양상 표현(반드시, 그러나)을 기호화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형식화한 논리 체계입니다.
(즉 양상적 개념에 대한 이론이죠.)
가능 세계 의미론은 이 "양상 논리를 응용해서"
자연 언어 전체의 의미를 해명하려는 "언어철학 이론"입니다. 둘은 같은 선상에 있다 보기 어렵습니다.
(양상적 개념을 활용한 언어철학/의미론에 대한 이론이죠.)
이 두 입장은 양상적 대상에 대한 어떠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함축하진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자연 언어의 양상 개념은 양상 논리나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보다 범위가 넓습니다.
왜냐면 통상 의무 논리에서 다루는 ought to 같은 것도 자연 언어의 양상 개념의 일부니깐요.]
(4)
이를 명확히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양상적 개념을 형이상학에 응용하려는 시도"가 정확할듯합니다. 그리고 당시 철학계가 거부하려던 것은 양상 개념/양상적 대상이 아니라, 이 모두를 포괄하는 "형이상학 그 자체"일 겁니다.
명확히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대 철학계는 형이상학을 거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양상 논리를 통해 체계화된 양상 개념은, 가능 세계 의미론을 통해서 그 응용 가능성을 인정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학자들은 생각하게 된거죠. "이게 양상 논리를 형이상학에 적용해보면 꽤 괜찮은 이론이 나오겠는데?"
그러고 양상 논리를 적용한 현대 분석 형이상학이 출현한겁니다.
이들은 경험됨 같은 경험주의적 테제보다는 이론의 설명력과 우아함 등을 자신의 이론의 지지 근거로 가져옵니다. (그리고 사실 과학의 몇몇 분야는 이렇게 자신들의 이론을 옹호하곤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