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 대한 니체의 모순적 입장과 제시된 해결책들: 카우프만, 하이데거, 단토, 해체론자

  1. 진리에 대한 문제

니체는 모든 진리는 환영이라는 식으로 말하며, 진리의 존재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많은 이론가는 니체가 ‘사실이나 진리는 없고 오직 해석만이 혹은 다른 관점만이 존재한다’라고 믿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어떤 것에 대해 정확한 해석을 제시하려는 시도는 명백히 실수이다.

이러한 해석이 옳다면 니체 자신의 철학도 정확한 해석이 아니게 되어, 니체는 자기 모순적이라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진리에 대한 니체 언명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궁극적인 중요성이 그가 가치에 대해 말한바, 특히 받아들여진 가치에 대해 그가 제공하는 도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니체가 분명히 ‘도덕은 오류에 기초한다’라거나 ‘도덕적 판단은 환영을 포함한다’라고 말했는데, 동시에 진리가 환영이라면 도덕적 판단에 포함된 환영은 받아들여진 도덕에 대한 니체 자신의 도전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즉, 니체의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불일치가 존재한다.
니체의 이론과 실천 사이의 불일치는 그의 형이상학 비판의 지위 또한 위태롭게 만든다. 그는 형이상학의 극복에 대해 강조했다. 그런데 그 자신의 ‘영원회귀’ 혹은 ‘힘에의 의지’ 독트린은 분명 형이상학적이기에, 그의 성숙기 철학은 형이상학을 비판하며 형이상학을 만들어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지금까지 논의에서 도출되는 것은 니체 철학 사이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견해’와 ‘그가 공격하고자 했던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견해’ 중 하나를 거부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니체가 진리와 가치 모두에 대한 유의미한 가르침을 줬다고 주장하려는 해석가는 반드시 그것이 어떻게 분명해 보이는 니체의 자기 모순적 입장과 양립 가능한지 설명해야만 한다.
두 가지 전략이 가능해 보인다. 첫째, 니체의 모순적인 면모는 외견상 그러한 것임을 보인다. 둘째, 니체의 모순을 인정하면서도 그 모순이 진리에 관한 어떤 가르침을 준다고 보인다. 두 전략 모두 니체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더해, 우리는 니체에게 앞선 둘과 상이한 입장을 귀속시키는 두 전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니체의 자기 모순적 입장을 다루는 총 네 가지 전략을 니체 연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전통적 해석: 카우프만과 하이데거
    전통적으로 귀속된 진리에 대한 니체의 입장은 대응론이다. 카우프만과 하이데거가 이러한 해석 방식을 제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 카우프만
카우프만은 진리에 대한 니체의 입장이 단지 외견상으로 모순적이라는 전략을 취해 니체의 입장을 방어한다. 그에 따르면 니체는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또 형이상학적 이론을 내세우지 않았다. 카우프만의 전략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그에 따르면, 니체는 단지 형이상학적/초월적 진리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했을 뿐이지 경험적 차원에서의 진리 존재는 긍정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니체의 이론과 실천 사이의 불일치를 거부하고, ‘영원회귀’나 ‘힘에의 의지’ 독트린을 경험적 진리로 간주함으로써 제기된 문제를 비판한다. 또한 그는 니체가 진리에 대한 ‘금욕적 이상’과 ‘믿음’ 모두 긍정했다며, 진리에 대한 믿음에 관한 니체의 분석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제기된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카우프만의 해석을 수용하기엔 많은 문제가 있다. 첫째, ‘영원회귀’나 ‘힘에의 의지’를 해석할 때, 그것들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둘째, 많은 구절을 통해 니체는 분명히 형이상학적 진리 비판 이상의 것, 즉 형이상학을 행한다. 예컨대 그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는 듯해 보이기에, 카우프만의 해석은 텍스트와 일관적이지 못하다. 셋째, 니체는 일관되게 진리에 대한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어서, 니체가 진리에 대한 ‘금욕적 이상’과 ‘믿음’ 모두 긍정했다는 카우프만의 해석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윌콕스는 카우프만과 유사하면서도 변형된 형태의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니체가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는 듯한 많은 구절 모두를 설명할 수 없다면서도, 니체가 모든 진리의 존재를 거부하지는 않고 경험적 진리의 존재를 수용했음을 보여주는 많은 구절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념은 항상 실재를 왜곡한다는 니체의 견해를 통해서도 니체가 형이상학적 진리를 거부했다는 카우프만에게 동조한다.
하지만 윌콕스가 제시한 근거가 그 자신의 해석을 거부할 근거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항상 개념을 통해 경험적 진리를 습득할 수 있는데 개념이 항상 실재를 왜곡한다면, 카우프만에 동조한 윌콕스의 해석인 ‘니체는 경험적 진리의 습득 가능성을 인정했다’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동시에 만일 니체가 개념은 항상 실재를 왜곡한다고 믿었다면, 니체의 진리 부인을 우리가 설명할 방법 또한 없어진다.

(2) 하이데거
하이데거도 니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제공했다. 그에 따르면 ①니체의 진리에 대한 주장은 진리 대응론을 전제하고 있고, ②니체가 주장한 ‘영원회귀’나 ‘힘에의 의지’ 독트린은 진리 대응론에 입각한 진리라는 점에서 전통 형이상학에 머물러있다.
하이데거의 이 주장은 카우프만에게 제기됐던 비판에 취약하지 않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하이데거는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가 경험적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존 형이상학 전통에 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 진리의 죽음을 논한 니체의 주장을 해명하기보다, 하이데거는 니체가 말하는 진리의 죽음이 실재에 대한 대응이라는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적 진리 개념을 수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이데거는 니체를 경험론자로 해석하는 데서 비롯하는 어려움을 피하지만, 진리와 형이상학에 관한 니체의 모순적인 입장을 해명하는데 힘을 들이지는 않는다. 그는 니체의 입장이 내적으로 일관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해 보이는 그 모순을 이해하는데 있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우리는 존재에 대한 어떤 논변을 제공하기보다 계속 존재 자체에 관한 질문을 품어야 한다. 하지만 니체는 존재를 ‘공허한 허상’이라고 말하며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를 말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이는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답을 제공한 것이므로 여전히 전통 철학에 머물러있다. 단지 니체는 존재를 가치의 문제로 바꿨을 뿐이고, 데카르트의 주체성의 형이상학의 연장이다. 데카르트와 니체의 차이는 단지 정신적인 자아를 신체 혹은 힘에의 의지로 바꿨을 뿐이다.

  1. 비전통적 해석: ‘새로운 니체’
    비전통적 해석은 ‘진리는 환영이다’라는 니체의 진술을 진리에 대한 그의 궁극적인 입장으로 여기거나 니체가 진리 대응론을 받아들였음을 부인하고, 또 그의 독트린들을 대응론의 측면에서 참이라고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이러한 비전통적 해석은 단토 등의 분석적 접근법과 데리다를 위시한 해체주의적 접근법으로 나눠진다.

(1) 분석적 접근법
단토는 니체가 진리 대응론이 아닌 프래그머티즘적 진리 이론 혹은 진리 정합론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해석할 때 니체의 진리에 대한 모순적 입장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환영이다’라고 니체가 말할 때, 니체는 단지 실재에 대응하는 진리를 부인했을 뿐 삶을 유용하게 만드는 일련의 이론과 믿음의 참됨은 긍정했다. (즉, 니체의 입장은 실재에 대응한다는 의미에서 진리는 아니지만, 실용적이라는 의미에서 소문자 진리이다)
이렇게 니체를 경험적 진리를 말한 자로 해석하면서도, 단토는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 독트린은 실재에 대한 대응을 전제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임을 인정한다. 단토는 이 문제가 니체의 형이상학 비판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매그누스는 분석적 전략을 통해 니체를 형이상학자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영원회귀’를 명령과 신화로, ‘힘에의 의지’를 철학과 이론에 대한 본성에 관한 메타-철학적 독트린으로 해석한다. 이를 통해 매그누스는 둘을 형이상학적 독트린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는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실제로 진리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논변을 통해서도 니체 철학에서 드러나는 모든 모순적 모습을 제거할 수는 없다고 인정한다.

(2) 해체주의적 접근법
해체주의적 접근법은 진리에 관한 니체의 모순적 면모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모순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접근법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데리다가 있다. 데리다가 보기에 형이상학적 가정들은 이미 우리의 문법과 어휘에 녹아들어 있어서 우리는 그것들을 가정하지 않고 무엇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니체도 형이상학 없이 형이상학을 비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니체의 형이상학 비판은 어쩔 수 없이 자기-모순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순이 니체의 형이상학 비판이 실패했음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니체의 글쓰기는 이 모순을 행함으로써 형이상학을 내부에서 비판한다는 것이 데리다 주장의 핵심이다.

폴드만은 데리다의 영향을 받아 니체가 어떻게 일관적으로 형이상학 내부에서 그것을 전복시켰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의 접근법은 문자 그대로의 니체의 진술과 실제로 그것이 행하는바 사이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분명 니체의 진술은 형이상학적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자로 보일 수 있고 또 그렇기에 그의 형이상학 비판과 불일치한다. 하지만 폴드만은 그 형이상학적 진술들이 그들 자신의 부적절함과 권위를 약화시킴에 주목하며, 형이상학적 진술이 자기 모순 없이 무언가를 진술할 수 없음을 보이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폴드만은 이렇게 형이상학에 관한 니체의 이론과 실천 사이의 명백한 모순이 그의 철학의 부적절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의 환영적 성격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사라 코프만 또한 데리다의 영향을 받아 니체의 형이상학 비판이 그의 실천과 어떻게 일관적인지 설명한다. 그녀는 분명히 형이상학적인 독트린이 진리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며, 니체가 오류에 빠져 있다는 비판에서 그를 구해낸다. 그녀는 ‘힘에의 의지’ 독트린이 우리에게 존재의 진리를 제공하기 위해 고안된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단지 해석을 다루는 은유적 표현(metaphorical expression)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힘에의 의지’ 독트린은 해석에 대한 가설이고, 따라서 그것은 진리에 대한 한 주장이 아니라 그 자체도 하나의 해석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다고 ‘힘에의 의지’ 독트린이 단순히 한낱 해석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니체는 그것을 다른 해석 혹은 가설보다 뛰어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코프만은 이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하는데, 그녀에 따르면 니체가 ‘힘에의 의지’ 독트린을 뛰어난 가설으로 여긴 이유는 그것이 진리를 드러내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풍요(enrichment and embellishment of life)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리에 찬동하면서 해당 독트린을 선호한게 아니다. 그렇다면 코프만 해석의 핵심은 ‘힘에의 의지’ 독트린을 사용한 니체의 실천적인 측면이 ‘진리란 없고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는 그의 이론과 일관적이라는 데 있다. 하지만 코프만 해석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코프만의 해석을 따라가면 ‘힘에의 의지’ 해석은 1차 해석들(first-order interpretations)의 증식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2차 해석(second-order interpretation)이다. 이 경우, 1차 해석들 사이의 좋고 나쁨을 구별할 방도를 없애게 된다. 코프만에 따르면 니체는 ‘힘에의 의지’가 다른 해석들을 배제하여 삶을 가난하게 만드는 해석들과 달리 모든 해석들의 증식과 수용을 요청하고 또 그럼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해석이기에 선호한다. 그런데 만일 니체의 삶 긍정이 모든 1차 해석들의 수용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이는 그가 한 1차 해석이 아닌 다른 1차 해석을 선호했다는 텍스트적 사실과 불일치한다. 예컨대, 그는 한 현상에 대한 종교적 해석보다 니힐리즘을 통한 해석을 선호한다.
이에 대해 코프만은 어떤 1차 해석이 진리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삶-긍정적 & 건강의 측면에서 낫다면 니체가 그것을 선호할 것이라며 불일치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 해석이 더 삶-긍정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것이 삶-긍정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삶-긍정적임을 정당화(증명)해야 하는 듯이 보인다. 결과적으로, 코프만의 니체 해석은 니체가 참이라고 여긴 것을 그저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 해석은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다른 해석보다 삶 긍정적이라고 여겼으며 진리로 여긴 것이 아니냐는 명백해 보이는 니체 해석을 부정할 좋은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이에 더해, 코프만은 니체 철학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참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니체 철학에 대한 참된 해석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면, 왜 존재나 삶에 대한 올바른 논의를 우리는 가질 수 없는가? 만일, 니체 철학에 대한 한 진리가 있다면, 왜 세계 다른 것에 대한 진리를 우리는 갖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런 점에서 코프만의 해석은 자신 입장도 당연히 오류 중 하나라고 말한 폴드만의 것보다 못하다.

데리다는 니체 철학의 모순에 대한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는 유고에 있는 “나는 내 우산을 잃어버렸다”라는 구절을 자신 주장의 핵심 근거로 든다. 그에 따르면 이 문장의 의미는 결정 불가능하고, 그것이 의미를 가지는지 아닌지도 결정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 불가능성을 지니는 문장이 니체 글쓰기 전체의 모형이다. 즉, 니체 글쓰기 전체가 결정 불가능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입장이다. 따라서, 니체 철학에 대한 참을 결정할 방법도 없고 그것에 참이 있는지 여부 또한 결정할 방법이 없기에, 니체 철학은 진리를 부정한 그의 이론과 일관적이다.
하지만 데리다가 제시한 문장은 니체의 저작물을 해석하는 나쁜 모형이다. 앞뒤 다 잘려나간 해당 문장과 달리, 출간된 니체 저작의 문장들은 다른 구절들과의 풍부한 문맥 속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나는 내 우산을 잃어버렸다’라는 구절이 니체 철학을 잘 설명하는 모형이라는 데리다의 주장과 그로부터 귀결되는 결론도 틀렸다. 그리고 확실성의 부인으로부터(니체가 확실성을 부인했다는 사실로부터) 진리의 가능성이 부정되지도 않고 그것을 누가 발견했다는 주장의 정당성이 부인되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이렇게 데리다의 결정 불가능성 테제의 참됨을 걱정하는 것은 요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고, 적절한 질문은 결정 불가능성 테제의 참됨이 아니라 가치에 관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데리다는 코프만처럼 ‘힘에의 의지’에 근거해서 결정 불가능성 테제의 가치를 설명할 것이다. 즉, 해당 테제는 우리가 텍스트와 함께 더 자유로이 놀이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해당 설명은 심각한 두 문제를 갖고 있다. 첫째, 결정 불가능성 테제가 그 반대의 것인(결정 가능성을 인정하는 테제) 보다 해석의 게임에 더 큰 기여를 하는지 불분명하다. 둘째, 결정 불가능성 테제가 자유로운 해석 놀이의 확산을 고취한다고 해도, 우리는 텍스트와 놀이하는 것이 왜 텍스트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려는 시도보다 더 가치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전자가 후자보다 더 가치 있다고 믿는 자들은 후자가 ‘진리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니체가 비판한 금욕적 이상에 빠진 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전자를 믿는 데리다 같은 자들은 비-금욕적인, 따라서 에로틱한 표현을 통해 니체를 해석하려 한다.
해체주의자들의 독법이 전자에 속하는데, 이들은 하이데거를 후자에 속하는 자로 해석하고 비판한다. 즉, 하이데거의 니체 독법은 금욕적이고, 니체 속에 담긴 놀이적 요소와 금욕적 이상 비판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 해체주의적 독법의 기저에 깔려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이데거의 해석이 아닌 자신의 해석이 더 니체답게 비-금욕적이고 놀이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니체의 금욕적 이상에 대한 주장을 정확히 해석했다고 믿고 있다. 둘째, 그들은 이미 금욕적 이상에 대한 니체의 주장을 참이라고 믿고 있다. 이 두 사실은 자신의 대주장(결정 불가능성)을 자기공박한다. 폴드만과 코프만 모두 이 덫에 걸려 있다. 이런 점에서 해체주의자들이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의 좋은 대안을 제공했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물론 하이데거가 금욕적 이상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잘 설명하지 않았고, 그가 니체를 너무 금욕적으로 그렸다는 해체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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