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해석학 입문』에서 서술된 가다머-데리다 논쟁의 의문점. (+ '형이상학'이란?)

0. 책을 완독하고나서

해석학 개론서인 『철학적 해석학 입문』을 다 읽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 장 그롱댕(Jean Grondin)님은 캐나다의 유명한 해석학 전공자로 알고 있고, 그분의 입문서를 지금은 명예교수로 계신 중앙대 최성환 교수님이 번역하신 책입니다. (이런 식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저는 학계의 동향이나 최신 정보같은 것에 완전히 무지한 한 명의 독학러이기 때문입니다.)

제 철학적인 관심사가 해석학과 현상학, 생 철학 쪽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 쪽 분야에 관한 책을 마음 먹고 집중해서 완독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물론 책 제목에서도 나와있듯이 이제야 발을 뗀 격입니다. 다만 입문서치고는 제 딴에는 버거웠지만 그래도 그랬던 만큼 완독한 뒤에 얻어가는 것이 상당히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완독하고 나서 데리다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의문이 생겨서 간단히 질문드립니다. 일단 여전히 저는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과 구조주의적인 기호학적 지식에 대해서라든지,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라든지, 가다머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와 같은 것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런 뜻이구나'정도까지만 이해하고 있는 상태에서(즉 심도있는 이해가 없는 상태로) 이 책을 읽었고, 다 읽고 난 지금도 그러합니다. 앞으로 가장 먼저 하이데거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제가 하는 질문에 철학적 오류가 많을 수 있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책의 내용을 왜곡해서 서술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미리 유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단순히 책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과 제가 직접 글로 표현하는 것은 (제가 책의 내용을 더럽힌다고 생각될 정도로) 정말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이번에도 느끼네요.

1. 책의 전반적인 내용

이 책에서는,

① 상대주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해석학이 자기 자신을 해명하며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② 해석학의 주요 개념인 '모든 것이 역사적인 제약을 받는다'라는 역사주의의 논제가 타당하다면, 모든 것은 그 논제 또한 역사적인 제약을 받기 때문에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 아닌가?

라는 2가지의 큰 문제의식을 서론에서 밝히고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 해석학을 발전시킨 다양한 철학자들{출발자로서 성서 해석학자들인 필로,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멜랑히톤, 플라시우스, 단하우어, 클라데니우스, 마이어, 람바흐, 아스트, 슐레겔, 슐라이어마허같은 낭만주의 해석학자들, 뵈크, 드로이젠, 딜타이, 하이데거, 가다머, 베티, 하버마스, 데리다 등등...}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해석학자들에도 불구하고 책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저자는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을 중심으로 줄기를 잡으며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을 그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견으로는 너무 가다머의 해석학을 옹호하는 쪽으로 책이 쓰여졌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이 책은 어쨌거나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입문' 역할을 하며, 가다머가 해석학에 기여한 바가 클 뿐만 아니라 철학적 해석학에게 제기되는 문제들을 상당 부분 해결해주었다는 것에는 저도 동의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하며 시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며, 텍스트는 단지 글자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저자가 담고자 하는 의도(영혼)와 독자의 선입견과의 만남, 또는 대화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는 절대 완결되지 않으며 해석학적 순환을 이룹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이해와 해석은 언어 안에서 이루어지며 언어의 의미를 추형성해나가는 과정이 어떤 신비주의적인 언어 너머의 무언가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지 글자의 의미(Bedeutung)를 알아내는 것을 넘어서 화용론적으로 그 텍스트에 저자가 담고자 했던 유의미(Bedeutsamkeit)를 추실행적으로 추적해나가는 의미행위(actus exercitus)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논외로 의미와 유의미라는 개념 설정은 가다머에게 대항해 객관적인 정신과학적 해석의 보증성을 확보하려 했었던 베티(E. Betti)의 업적입니다만 텍스트의 근원적 의미가 확정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앉고 있기 때문에 가다머의 해석학을 설명하고자 할 때 적합한 단어는 아닙니다만, 제 표현의 한계로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다머(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표현된 텍스트는 인간이 '표현하고자 했던 바 - 가다머가 말했던 내적 언어(verbum interius)'를 어느 정도는 나타내줄 수는 있지만, 마치 단서들을 조금씩 드러내는 것처럼(?) 슐라이어마허나 슐레겔의 낭만주의 해석학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는 듯이 완벽하게 성취해내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2.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에 대해 : 데리다의 두 가지 비판

마지막 장인 7장에서 1981년 4월 파리의 독일 문화원이 주선한 모임에서의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을 다루고 있는데, (정연재님의 「대화와 해체 - 그 간극을 넘어서 」라는 논문에서 다뤄졌던 그 내용말입니다.) 데리다는 세 가지 질문을 들어 가다머의 해석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근데 책에서는 두 가지밖에 안 나왔네요. 제가 3번째를 놓친 건지 아니면 두 가지 속에 포함되어 있는건지는 모르겠습니다.)

2-1. 첫번째 비판

  • 데리다의 비판

첫째는 너무나도 근본적이어서 허탈하기까지도 한 질문인데, 어째서 이해하려고 하는가? 지금까지의 해석학(Hermeneutics)은 텍스트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저자와 타자에 대해서 잘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왜 그러는 것일까? 왜 타자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일까? 타자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그 행위 뒤에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배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 가다머(저자)의 반박

첫번째 비판에 대해 저자는 가다머가 이미 『진리와 방법』에서 데리다가 의심할 법한 오해들을 다 생각해놓았다고 말합니다. 해석학은 텍스트(타자)를 파악하고 휘어잡으려는 의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고 참여하려는 의지로부터 온다는 것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예전에 보았던 가다머-데리다 논쟁에 대한 텍스트들은 데리다가 가다머의 해석학이 칸트적인 선의지를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가다머는 그것이 아니라 플라톤적인 대화모델의 양상을 띠는 것이다라는 비판과 반박이 이어졌던 것 같은데, 이 책에서 플라톤의 대화모델에 대한 짤막한 언급은 있지만 더욱 디테일한 내용까지는 없었습니다.)

가다머는 이미 『진리와 방법』에서 데리다의 불신과 같은 당연한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자기 전유의 위험이 특히 커 보이는 적용(appli-catio)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는 해석학을 '제왕학(Herrschaftswissen)'과는 분명히 구별한다. 명백히 형이상학적이고 특히 헤겔적인 파악의지(Wille zum Begreifen)에 반대하여 그는 플라톤적인 대화 모델에 의지한다. 이것도 쉽게 오해될 수 있다. 플라톤은 일반적으로 (하이데거와 니체를 통해서 처음으로 정확하게) 형이상학의 아버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대화 속에서 경험하고 얻을 수 있는 진리는 점유 획득(Besitzergreifung)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참여의 진리(Teilhabewahrheit)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당해 보인다. 우리는 사유하는 한 서로 간에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대화에서 진리에 도달하는데, 이 진리는, 그에 대한 앎도 없이, 우리에게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진리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가 우리를 점유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해하는 자는 그에게 의미, 명증성, 방향 설정이 주어질 때 철저한 고난을 경험한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이해의 진리는 남김 없고 최종적인 자기 전유라기보다는 참여의 의미를 더 가진다. (287-288p)

2-2. 두번째 비판

  • 데리다의 비판

둘째는 텍스트에 담겨있는 진리의 이해를 말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에 대한 질문으로 비판합니다. 기존의 서양 철학에서 기호란 그것에 담겨 있는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것이었지만, 데리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확고하게 고정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두번째 비판은 데리다의 차연 개념에 대한 이해가 얕은 나머지 오류를 저지를까봐 텍스트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광범위한 물음은 도대체 '진리'의 이해를 말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해란, 구체적인 현존과 같은 것일 수 있는 어떤 의미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기호에서 기호로 떠다니는 것은 아닐까? 초기 데리다는 특히 후설에 대한 연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vouloir dire) 혹은 마음먹다(Meinen)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통적 개념에서 기호는 어떤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wollen)' 것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확고하게 고정될 수 없다. 요구되는 의미의 현존은 그렇게 지속적으로 '차이를 낳게(유예되게/달라지게, differiert)' 되고, 그래서 데리다에게 모든 기호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차연(différance)에 의해 고무된다. 형이상학의 모든 환상(하이데거 역시 존재의 의미와 같은 어떤 것을 찾았다는 점에서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은 이 점에서, 즉 의미를 탐구하고 이해를 추구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른다. 해석학에 대한 해체주의의 공격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에 대한 지속적인 의심이 있다. (288-289p)

  • 가다머(저자)의 반박

저자는 가다머의 해석학을 직접적으로 빌려서 반박하는 것인지, 아니면 가다머의 해석학에 영향을 받은 자신의 생각으로서 반박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호가 일차적 진술의미 외에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다는 이러한 데리다의 비판은 절대적인 현전성의 형이상학을 지속하는 것이며, 명제 논리로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합니다. 또한 언어가 글자적인 의미만을 남겨두게 된다면 언어가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실증주의적인 것밖에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 그러한 요구가 존재하지 않고 추체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은 채, 데리다처럼 기호가 어떤 것을 의미하거나 말하고자 하는 바(vouloir dire)도 없이 서로를 아무런 지향점 없이 가리킬 뿐이라는 관념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불행일 것이다. 일종의 기호학적 실증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언어가 음미하고 증거하는 내적 언어와 내적 대화를 다시금 부정하는 격이 된다. 기호를 다른 어떤 것, 즉 도달될 수 없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 것으로 경화(硬化)시키는 것은 가장 순진한 실증주의이며, 여전히 나쁜 형이상학이라는 고발이 유효하다. 기호를 자신 이외의 어떤 것도 진술하지 않는 순수한 소리로서 취하는 것은 절대적인 현전성의 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chlechthinnigen)을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호학적 실증주의와 유사한 기호의 물리주의는, 철학이 문장들과만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리오타르가 제시하는 외견상의 명증성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는 문장이 언제 어디서나 전제되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문장이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문장들은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들은 보다 앞서 이루어진 대화가 이루어낸 성과이며 최상의 경우에는 증거이고, 이 증거는 이해적인 추실행(Nachvollzug)에 종속되어 있다. 음성이나 문장을 최후의 소여로서 그것의 순수한 현전성 안에서 취한다는 것은 내적 로고스(λόγος εσωτερικά : 구글 번역에 넣었는데 본문의 글자와 다르게 나오네요.)라는 스토아 학설을 제외하면 서양 사상사 전반을 지배했던 형이상학적 명제 논리로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다.
(중략) 언어가 "정신의 바빌론 유수 상태(babylonische Gefangenschaft des Geistes)"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대화라는 사실을 오인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것처럼 언어는 상호침투적이다. 언어는 자신의 진술능력이 충족되지 못한 모든 곳에서 어느 정도까지 (사고가 가능한 한) 자신의 고유한 한계를 반성하고 물러설 수 있다. 언어를 한번 생겨나고, 그 배후에 아무것도 없는 글자적인 것(écriture)에만 속박하는 것은, 가다머가 데리다를 반박하듯, "모든 말이 판단 명제 안에 있다는 듯이" 언어(Logos)의 도달 범위를 실증주의적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로고스는, 데리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원칙적으로 모든 타자를 배제하는 의지의 형이상학(Willensmetaphysik)으로 환원될 수 없다. 만약 로고스를 서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상호 간에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성중심주의(Logozentrismus)는 자신의 고유한 장소를 대화 안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사고를 그렇게 칭하고자 했던 것처럼, 영혼의 자기 자신과의 대화 안에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대화에는 탈형이상학적 관점으로부터 나오는 어떠한 근본적이고 확정적인 울타리(clôture)도 없기 때문에 여기에 해석학의 보편성이 기반을 두게 된다. (289-292p)

3. 의문점 1 : '형이상학'에 대한 정의의 혼선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 파트에서, 저는 저자가 데리다에 대해 '절대적인 현전성의 형이상학'을 지속할 뿐이라고 반박한다는 글을 보았을 때 갸우뚱했습니다. 데리다야말로 대표적인 서양 철학의 로고스 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 자아중심주의적인 형이상학의 파괴자 아닌가? 이런 혼란에 빠져 텍스트를 여러번 다시 읽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이 파트에서는 '형이상학적'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두 가지로 나뉘어서 사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정확히 어떤 뜻으로 쓰이고 있는지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특히 (2)번의 뜻이 그렇습니다.). 제 생각에 첫째는 하이데거가 니체를 서양 철학의 마지막 '형이상학'의 완성자라고 칭했을 때의 그 형이상학이며, 둘째는 텍스트와 언어 '바깥에 있는 그 무언가'에 단어의 의미가 자리잡고 있다는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 다소 오해될 수 있는 워딩으로서의 형이상학같습니다. 애당초 형이상학이라는 단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것 또한 저도 알고 있는데, 제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으며 구분하고 있는지,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마 제가 조금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이 책에서 쓰이고 있는 '형이상학'에 대한 그 두 가지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모든 텍스트들로부터 앞서 텍스트를 정의하고 결론내리려는 자의적인 태도.

예를 들면, 니체를 '힘에의 의지'로서 서양 철학의 마지막 형이상학자로서 파악한다면, 그는 모든 텍스트가 저자의 힘에의 의지를 증진시키려고 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고 텍스트에 앞서 파악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가다머도 텍스트에 앞서서 이미 텍스트(타자)를 잘 이해하려고 하는 어떤 형이상학적 배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2) 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근거지으려고 하는 것.

대책없이 본문의 내용을 쭉 열거하는 것이 독후감에 느낀 점 없이 줄거리만 장황하게 써대는 것 만큼 의미없다고 생각하지만, 질문의 특성을 감안해서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에 대한 전체 파트를 아래에 적어놓겠습니다. (본문 285-292p)

제 생각에 (1)의 정의에 따르는 문장들은 볼드체로, (2)의 정의에 따르는 문장들은 볼드체 + 기울임체로 표시했습니다.

<포스트모던의 해체주의>
대화적인 소통이라는 면에서 가다머와 하버마스 사이의 깊은 연대는(비록 가다머는 우리가 참여하는 플라톤적인 대화의 모델을 그리고 하버마스는 학문적으로 논쟁하는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해나가고 있을지라도) 해체주의와 신역사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직면하여 형성된 공통의 전선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드러낸다. 해체주의는, 소통의 해석학적 이념이 모두에게 자신의 (여기서는 대화적인) 합리성의 모델을 강요하며 이런 방식으로 형이상학적인 권력에의 의지 - 이것은 그로부터 벗어나는 개별성, 차이 그리고 불일치를 전체적으로 억압한다 - 를 지속시킨다는 사실을 간파해낸다. 하버마스는 데리다 자신이 소통과 이해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자기모순을 범하지 않으면서 의사소통적 이성에 대한 저항을 고집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게다가 이성은, 개별성을 획일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개별성에게 자기를 자유로이 전개하고 정당한 타당성에 대한 요구를 표현하는 소통적 가능성을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 대화를 증진하는 공동체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해체주의가 선호하는 다원주의와 삶의 양식들의 차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다머와 데리다의 만남은 1981년 4월 파리의 독일 문화원이 주선한 모임에서 이뤄졌다. 그 모임의 취지는 대륙철학을 규정하는 두 흐름, 즉 프랑스의 해체주의와 독일의 해석학 사이의 대화를 모색하는 것이었다[그 자체가 사실상 해석학적 발의(Initiative)였다]. 그러나 이 대화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고 하며, 이것은 관련 언어로 발간된 자료가 입증하고 있다. 가다머는 "텍스트와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데리다의 텍스트 해체주의를 지목하면서 이 모임의 첫 강연을 했으며, 데리다는 다음날 세 가지 질문을 통해 이에 답했다. 그 다음 데리다는 가다머나 해석학을 직접 논하지 않으면서 하이데거와 니체에 대한 강연을 했다. 그 후 몇 년간 가다머는 해체주의의 도전에 대해 중요한 글들을 썼고 그 글들에서 자신의 해석학의 이론적 단초를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도전을 이해하기 위해, 여기서 우리는 두 사람의 만남 이후 지금껏 어떤 텍스트에서도 제공하지 않은 데리다의 세 가지 질문만을 논의하고자 한다. 그 질문들은 모두 해석학이 전제하고 있는 이해를 위한 (선한) 의지의 지위를 중심적인 논점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어떤 형이상학적 전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부연하자면 이 물음은 여기서 새로운 배후세계를 요청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해에 대한 의지가 존재자의 지배에 대한 총체적 추구를 지속시킨다는 하이데거가 키워온 형이상학적 회의(懷疑)의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가다머가 요구하는 그 의지는 궁극적으로 그를 형이상학적 의지의 마지막 계승자로서 드러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데리다의 불신은 이해에서 어떻게든 타자의 전유가 중요하고, 이것을 타자성의 전적인 동화(Assimilation)로 간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거된 혹은 당연한 것이다.
가다머는 이미 『진리와 방법』에서 데리다의 불신과 같은 당연한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자기 전유의 위험이 특히 커 보이는 적용(appli-catio)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는 해석학을 '제왕학(Herrschaftswissen)'과는 분명히 구별한다. 명백히 형이상학적이고 특히 헤겔적인 파악의지(Wille zum Begreifen)에 반대하여 그는 플라톤적인 대화 모델에 의지한다. 이것도 쉽게 오해될 수 있다. 플라톤은 일반적으로 (하이데거와 니체를 통해서 처음으로 정확하게) 형이상학의 아버지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대화 속에서 경험하고 얻을 수 있는 진리는 점유 획득(Besitzergreifung)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참여의 진리(Teilhabewahrheit)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당해 보인다. 우리는 사유하는 한 서로 간에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대화에서 진리에 도달하는데, 이 진리는, 그에 대한 앎도 없이, 우리에게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진리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가 우리를 점유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해하는 자는 그에게 의미, 명증성, 방향 설정이 주어질 때 철저한 고난을 경험한다. 이와 관련하여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오두막 문 위에 새겨져 있던 "번개가 모든 것을 인도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잠언을 회상한다. 번개는 여기서 "한 번의 충격으로 모든 것을 보이게 만들고, 즉시 어둠 속으로 다시 삼켜지는 번개 같은 깨달음의 갑작스러움"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의 진리는 남김 없고 최종적인 자기 전유라기보다는 참여의 의미를 더 가진다.
가다머와 데리다의 논쟁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광범위한 물음은 도대체 '진리'의 이해를 말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해란, 구체적인 현존과 같은 것일 수 있는 어떤 의미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기호에서 기호로 떠다니는 것은 아닐까? 초기 데리다는 특히 후설에 대한 연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vouloir dire) 혹은 마음먹다(Meinen)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통적 개념에서 기호는 어떤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wollen)' 것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확고하게 고정될 수 없다. 요구되는 의미의 현존은 그렇게 지속적으로 '차이를 낳게(유예되게/달라지게, differiert)' 되고, 그래서 데리다에게 모든 기호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차연(différance)에 의해 고무된다. 형이상학의 모든 환상(하이데거 역시 존재의 의미와 같은 어떤 것을 찾았다는 점에서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은 이 점에서, 즉 의미를 탐구하고 이해를 추구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른다. 해석학에 대한 해체주의의 공격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에 대한 지속적인 의심이 있다.
우리는 해체주의의 이러한 도전을 부정하고 데리다조차도 대화에 참여하고 있을 때 이해하길 원하고 이해되길 바란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해의 능력이 기본적으로 해로운 것이 아니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확언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하버마스가 통렬하게 비판하며 주목할 것을 요청한 데리다의 자기모순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해석학은 데리다의 입장에 동정적이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참여적 진리와 대화에 대한 지속적 의존에 관한 해석학의 인식이, 현전(現前)의 형이상학과 고전적인 언어철학에 의해 암시될 수도 있는 구체적인 의미가 이행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내적 언어에 대한 통찰을 적극적으로 끌어올 수 있다. 어떠한 단어도 영혼의 이러한 내적 노력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해석학적 철학의 확신이다. 단어나 기호는 결코 의미의 궁극적인 현존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암시나 차연 혹은 함께 표현될 수 있는 다른 것과의 차별화를 가리킬 뿐이다. 언어는 이러한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에 의해서, 즉 단어와 의미된 것 사이에 존재하는 차연의 유지에 의해 그 생명력을 발휘한다.
그러한 요구가 존재하지 않고 추체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은 채, 데리다처럼 기호가 어떤 것을 의미하거나 말하고자 하는 바(vouloir dire)도 없이 서로를 아무런 지향점 없이 가리킬 뿐이라는 관념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불행일 것이다. 일종의 기호학적 실증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언어가 음미하고 증거하는 내적 언어와 내적 대화를 다시금 부정하는 격이 된다. 기호를 다른 어떤 것, 즉 도달될 수 없는 것을 지시하지 않는 것으로 경화(硬化)시키는 것은 가장 순진한 실증주의이며, 여전히 나쁜 형이상학이라는 고발이 유효하다. 기호를 자신 이외의 어떤 것도 진술하지 않는 순수한 소리로서 취하는 것은 절대적인 현전성의 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chlechthinnigen)을 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호학적 실증주의와 유사한 기호의 물리주의는, 철학이 문장들과만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리오타르가 제시하는 외견상의 명증성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는 문장이 언제 어디서나 전제되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문장이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문장들은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들은 보다 앞서 이루어진 대화가 이루어낸 성과이며 최상의 경우에는 증거이고, 이 증거는 이해적인 추실행(Nachvollzug)에 종속되어 있다. 음성이나 문장을 최후의 소여로서 그것의 순수한 현전성 안에서 취한다는 것은 내적 로고스(λόγος εσωτερικά : 구글 번역에 넣었는데 본문의 글자와 다르게 나오네요.)라는 스토아 학설을 제외하면 서양 사상사 전반을 지배했던 형이상학적 명제 논리로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다. 명제 논리에서 진술(내용)은 마치 하나의 단어에 하나의 표상이 상응하는 것처럼 내용을 도구주의적으로 재현한다. 내적 언어(verbum interius)에 대한 기억만이 언어의 생동성과 온전함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기호에서 명료해질 수 없는 의미를 진술하기 위한 우리의 말하기가 주어진 단어에 종속되어 있다는 경험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사고가 형이상학의 언어에 남김없이 붙들려 있는 것처럼 언어의 속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언어가 "정신의 바빌론 유수 상태(babylonische Gefangenschaft des Geistes)"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대화라는 사실을 오인하고 있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것처럼 언어는 상호침투적이다. 언어는 자신의 진술능력이 충족되지 못한 모든 곳에서 어느 정도까지 (사고가 가능한 한) 자신의 고유한 한계를 반성하고 물러설 수 있다. 언어를 한번 생겨나고, 그 배후에 아무것도 없는 글자적인 것(écriture)에만 속박하는 것은, 가다머가 데리다를 반박하듯, "모든 말이 판단 명제 안에 있다는 듯이" 언어(Logos)의 도달 범위를 실증주의적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로고스는, 데리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원칙적으로 모든 타자를 배제하는 의지의 형이상학(Willensmetaphysik)으로 환원될 수 없다. 만약 로고스를 서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상호 간에 의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성중심주의(Logozentrismus)는 자신의 고유한 장소를 대화 안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사고를 그렇게 칭하고자 했던 것처럼, 영혼의 자기 자신과의 대화 안에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대화에는 탈형이상학적 관점으로부터 나오는 어떠한 근본적이고 확정적인 울타리(clôture)도 없기 때문에 여기에 해석학의 보편성이 기반을 두게 된다.

추가로 여기서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위 본문의 '형이상학적 명제 논리로의 후퇴'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형이상학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1)의 정의와 (2)의 정의 두 가지에 모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가장 배척했던 것이 형이상학 아니었던가요?

4. 의문점 2 : 가다머(저자)가 데리다의 비판을 올바르게 반박한 것인가?

이 책에서 데리다가 가다머에게 가한 두 가지의 비판을 저는 가다머(혹은 저자)가 충분치 않게 해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비판(2-1). 타자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그 행위 뒤에는 어떤 형이상학적인 배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데리다의 의심에 대해서, 가다머(저자)는 해석학은 텍스트(타자)를 파악하고 휘어잡으려는 의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고 참여하려는 의지로부터 온다고 말하는 것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만(또한 칸트적인 선의지와도 다르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상당히 엉뚱한 반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 자체의 오류는 없으며 가다머의 해석학 자체를 잘 설명해주기는 합니다만, 설령 가다머의 해석학이 헤겔적인 파악의지가 아니며 참여하려는 의지로부터 온다고 하더라도(또한 칸트적인 선의지와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텍스트(타자)를 이해하려고자 하는 (선한) 의지, 즉 그의 해석학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형이상학적 배후에 대해서 해명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형이상학적인 배후가 존재한다고 인정해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두번째 비판(2-2). 데리다의 차연 개념에 대해서, 텍스트에 담겨있는 진리의 이해를 말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에 대해, 가다머는 데리다 말대로라면 텍스트는 다시 기호학적 실증주의를 따름으로서 글자적인 의미 이외에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명제 논리로의 퇴행으로 이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것도 의아한게, 가다머는 결국 데리다의 차연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철학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어물쩡 넘어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a라는 근거 때문에 가다머의 해석학은 B가 될 수 밖에 없다, 라고 비판했을 때, a라는 근거에 대해서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하지만 B가 된다면 내가 이루고자 했던 해석학의 목표로서의 A는 이룰 수 없게 된다고!"라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즉 차연 개념이 어떤 면에서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 짚지 못했으며, 데리다의 비판하고자 하는 요점에 대해서 정확히 짚어서 해명하지 못하고 '그러면 공허한 기호학적 실증주의로 돌아가게 된다고!' 라는 논점에서 벗어나는 말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 에서 해결되지 않는 저의 의문은 단순히 이 책에서 데리다에 대한 가다머의 비판을 충분히 서술해놓지 않아서 생기는 정보의 부족인건가요, 아니면 정말로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적절한 것인가요?

이러한 저의 두 가지 의문점에 대해서, 철학적 해석학을 잘 아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답변 부탁드리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저의 글에 대한 모든 자유로운 의견이나 댓글 모두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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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제 전공이 해석학이라 자세히 답변드리고 싶은데,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보니 요 며칠 간은 글을 길고 꼼꼼하게 쓰기가 어렵네요. 두 가지 핵심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그롱댕과 해석학의 보편성 주장

말씀하신 것처럼, 그롱댕은 굉장히 유명한 해석학 연구자입니다. 특별히, 그롱댕의 대표 저서가 『해석학의 보편성』( L'universalité de l’herméneutique)이다 보니, 그가 쓴 다른 글들에도 이 논의가 매우 부각되어 있죠.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해석학의 보편성에 대한 그롱댕의 입장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롱댕은 이 보편성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다머의 해석학에 '형이상학적 측면'이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는데(가령, "Nihilistic or Metaphysical Consequences of Hermeneutics?" 같은 논문에서 이런 견해를 제시하는데), 저는 이런 해석이 (a) 과연 텍스트 주석적으로 올바른지에 대해 의문이 있을 뿐더러, (b) 철학적으로도 심각한 결함이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의문이 있어요. 지적하신 ②와 유사한 이유에서 말이에요.

(2) 가다머와 데리다

오히려 저는 가다머와 데리다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해석학을 형이상학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놓는 존 D. 카푸토의 입장에 더 동의하는 편이에요. 카푸토의 해석학 입문서인 『포스트모던 해석학』이 우리말로 잘 번역되어 있는데, 내용도 그롱댕의 책보다 훨씬 쉬운 데다, 가다머 이후 현대 해석학의 방향성을 개성적으로 제시하고 있기도 해서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카푸토는 그롱댕보다 훨씬 데리다 친화적이고, 가다머와 데리다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강조하죠. 물론, 카푸토의 해석에도 저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다소 극단적인 지점들이 있긴 하지만, 굳이 그롱댕과 카푸토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카푸토에게 좀 더 기울어 있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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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나중에 천천히 답변해주셔도 됩니다.

저도 서론에서부터 해석학의 보편성 요구에 대한 얘기를 끊임없이 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정말 이 문제에 진심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굳이 '보편성'에 집착하는 나머지 해석학의 중요한 논제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어요. 물론 해석학이 상대주의라는 비판에 맞서기 위함이었겠죠. 지금 당장의 저는 장 그롱댕과 가다머의 해석학이 위에서 제가 제기한 의문점들만 해결된다면 꽤 멋지게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견해를 가진 현대 해석학자들도 많나 보군요. 해석학이 상대주의라는 비판에 맞서는 방식들이 다른, 아니면 대담히 상대주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해석학자들도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카푸토의 책을 나중에 꼭 사서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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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짧게만 덧붙이자면 가다머-데리다 논쟁에 대해 그리고 두 사람의 입장차(사실은 상당히 공유하는 지점)에 대해 그롱댕의 관점이 미묘하게 바뀝니다. 관련해서 그롱댕의 <현대 해석학의 지평>(2019)이라는 책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적 해석학 입문』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한 리쾨르, 로티, 바티모의 해석학도 다루고 있으며 조금 더 서술이 가볍습니다. 『철학적 해석학 입문』은 좋은 입문서이지만, 사실 좋은 입문서라서 꽤 밀도가 있는 책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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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철학적 해석학이 다소간 형이상학적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만, 솔직히 골치아픈(...) 주제이고 가다머의 철학이 어느 정도로 형이상학적이고 그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보다 어떻게 해석학적인 철학이 형이상학적 전제나 혐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가 더 관심을 끌만한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리하신 글도 그리고 관련 문헌도 다시 찾아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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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마침 그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석학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기 전에 읽었었는데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

아직까지 저는 데리다가 제기한 그 ‘혐의’를 가다머가 제대로 해명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또 가다머의 해석학이 ‘형이상학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래서 뭐 어쨌다는거지?라는 생각도 합니다. 데리다의 비판은 분명 날카로웠고 저도 지금까지 가다머가 이것에 대해서 제대로 해명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형이상학적인 배후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철학으로서 기능성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학설에 비판점이 있듯이, 그저 가다머의 해석학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비판받을 수 있다. 라는 점이 추가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가다머가 ‘그래, (그것이 칸트적인 선의지를 무비판적으로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적인 대화모델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형이상학적인 배후(텍스트에 참여하고 대화로서 잘 이해하려는 (선한) 의지)가 존재한다!’ 라고 시원하게 인정해버려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싶습니다. 즉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 자체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다머의 해석학에 철학적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므로, 괜찮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두서 없이 썼는데 쓰다보니 제 스스로도 아직 혼란스럽네요. 특정 철학에 대한 비판은 타당하다고 해서 그것이 철학적 오류를 가지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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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e 님의 댓글을 읽으니, 제 표현을 좀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편적으로만 나열하자면,

(1)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해서는 분명 '형이상학적' 혐의가 제기될 만한 몇몇 지점들이 있습니다.
(2) 다만, 저는 이 지점들을 '형이상학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좋을지 '해체주의적'으로 독해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그롱댕과 달리 바티모나 카푸토에게 더욱 동의하는 편입니다.
(3) 더 나아가, 저는 (가다머를 넘어서) 철학적 해석학 일반이 형이상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바티모나 카푸토에게 동의합니다.

아래의 @Artorias 님의 댓글에 대해서도 간략히 답변드리자면, 해석학 내부의 형이상학적 전제나 배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애초에 해석학이 형이상학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의 유명한 논문 제목이 "형이상학의 극복(Überwindung der Metaphysik)"일 정도로요. 그런데 형이상학을 극복하겠다고 선언한 해석학이 다시 형이상학에 빠진다면,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해석학 내부의 근본적인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이 문제가 데리다나, 바티모나, 로티 등 이후 철학자들에게 심각하게 지적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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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이제 알았군요. 몰랐던 부분이에요..

그렇다면 장 그롱댕은 가다머의 해석학을 형이상학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혹시 YOUN님의 의견인가요, 아니면 장 그롱댕이 자기의 저서에서 그렇게 밝히고 있는 건가요? 즉, 장 그롱댕이 가다머의 해석학이 형이상학적인 배후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그것에 대해 YOUN님이 비판적인 입장이신건지, 아니면 장 그롱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의 저서들을 읽었을 때 YOUN님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신건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에 앞서 제 스스로 ‘형이상학’에 대한 공부가 먼저 선행되어야한다는걸 느끼네요. 저는 아직도 형이상학에 대한 명확한 개념 없이 인상적 진술만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요. 혹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1철학으로부터의 형이상학(metaphysics)부터 시작해서 형이상학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철학사에 진행되어 왔는지, 알 수 있는 책이나 논문이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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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롱댕 본인이 해석학의 '형이상학적' 측면들을 자주 강조합니다. 해석학의 '형이상학적 결과(Metaphysical Consequences)', '형이상학적 차원(metaphysical dimension)', '형이상학적 해석학(metaphysical hermeneutics)'이라는 표현들을 자주 사용하고, 또 옹호하죠. 위에서 소개해 드린 "Nihilistic or Metaphysical Consequences of Hermeneutics?"라는 논문도, 바티모의 허무주의적 해석학에 반대해서 해석학이 '형이상학적 결과'들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에요. 또 해석학의 보편성 주장에 대해 다루는 논문 중에는 "The University of Hermeneutic Understanding: The strong, somewhat metaphysical conclusion of Truth and Method"라는 논문도 있죠. 부제에서부터 나타나듯이, 그롱댕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이 '강한, 다소 형이상학적인 결론'을 지닌다고 생각해요. 아마 우리말로 번역된 『현대 해석학의 지평』 마지막 부분에도 이런 주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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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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