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의 『일시적 존재론』 제1장에 대한 내용을 블로그에 정리하였습니다. 비판적 평가 부분만 여기에 따로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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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이 ‘하나-로-셈하기’를 통해 존재자의 존재를 전체주의적으로 재단하고자 하였다는 비판은 정당하다. 플라톤 이래로 형이상학은 세계를 단일한 체계로 해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자신의 이론적 전제를 절대화하는 ‘가정 망각의 오류(ignoring the assumption)’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형이상학이 상정하고 있는 단일한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사태란 애초에 존재할 수조차 없다고 단정되어버린다.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대상은 단일한 체계가 표상하고 있는 필연적 질서에 따라 존재해야 한다고 규정되어버린다. 필연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사건(événement)’이란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되어버린다.
그러나 ‘하나가 없는 다수’에 대한 사유가 형이상학을 근본적으로 대체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형이상학의 가정을 비판하기 위해 또 다른 형이상학의 가정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동일한 방식으로 되풀이할 뿐이다. 즉,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하나’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모든 현상을 환원하고자 하는 것처럼 바디우의 존재론은 ‘다수’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모든 현상을 환원하고자 한다. 두 입장은 모두 특정한 가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상정하고 있는 가정은 비판해야 하는 반면 바디우의 존재론이 상정하고 있는 가정은 옹호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주장은 결코 자명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 존재는 무한히 차이화되는 다수이다? : 바디우의 존재론은 형이상학이 상정하는 단일한 질서를 비판해야 한다는 목표로부터 존재가 ‘다수’라는 주장을 거의 당위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즉, ‘하나’가 지닌 능력 아래에 세계를 종속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잘못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무한히 차이화되는 ‘다수’가 세계를 올바르게 나타내주고 있다는 이론을 곧바로 도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에 대한 비판과 ‘다수’에 대한 옹호는 서로 별개의 문제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그 자체로 바디우의 존재론을 성립시키는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하나’가 존재한다.”라는 형이상학의 가정에 대한 부정은 어디까지나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다수’가 존재한다.”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입장은 논리적 비약에 빠져 있을 뿐이다.
─ 수학은 존재론이다? : 집합에 대한 사유를 순수한 다수에 대한 사유로 해석하고자 하는 입장은 수학과 존재론 사이의 유사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다. 수학이 존재론이라는 주장을 유비 추리 이상의 방식으로 진지하게 옹호하고자 하는 태도는 학술적으로 무의미하다. 두 학문 사이의 유사성이란 평가자가 어떠한 기준을 상정하는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가령, 철학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학문인지에 대한 물음은 애초에 고정된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형이상학과 인식론처럼 세계의 구조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분야는 자연과학과 더 가까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리학과 미학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루고자 하는 분야는 사회과학과 더 가까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학과 존재론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주장 역시 두 학문을 바라보는 특정한 관점에 의존하여 성립하고 있다. 두 학문이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 존재로서의 존재에 대한 사유는 수학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 수학과 존재론 사이의 유사성으로부터 수학이 존재론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두 대상 a와 b가 x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는 사실만으로 y라는 측면에서도 유사할 것이라는 주장은 보증되지는 않는다. 즉, 순수 다수를 사유하고자 하는 존재론과 집합을 사유하고자 하는 수학의 작업이 일정 부분 유사하다고 인정하더라도 수학에서 이루어지는 발전이 존재론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근거가 요청된다. 두 학문 사이에 유사성이 성립한다는 사실 자체는 두 학문이 어떻게 발전해야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3
오히려 나는 바디우가 주장하는 ‘하나가 없는 다수’에 대한 사유보다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신의 회귀’에 대한 사유가 철학적으로 훨씬 철저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신의 회귀’란 결코 구원에 대한 막연한 동경 따위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어떠한 종교적, 신학적, 신비적 희망도 함의하고 있지 않다. 다만, 존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개시하는 ‘사건(Ereignis)’에서 우리가 ‘성스러움(Heilige)’과 ‘신성(Gottheit)’을 경험한다고 강조할 뿐이다. 즉, 신의 회귀를 기다리는 태도란 존재가 우리에게 매 순간 새롭게 개시될 수 있도록 사유를 열어두는 자세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존재를 ‘하나’와 ‘다수’ 중 어느 쪽으로도 미리 규정할 필요가 없다.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은 어떠한 가정도 없이 존재에 대해 개방된 태도만으로 충분히 성취된다. ‘하나’를 가정하는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다수’를 가정하는 바디우의 존재론은 모두 존재에 대한 개방된 태도에 철저하게 머무르지 못한 결과라고 여겨진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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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정통적 의미의 수학과 존재론을 연구하는 학자 대부분은 수학이 존재론에 기여한다는 주장을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가령, ‘지적 사기’ 사건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한 것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소칼은 수학과 정치학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바디우의 시도가 우스꽝스럽다고 평가하였다.(Sokal & Bricmont, 1998: 180-181 참조) 영국을 대표하는 뛰어난 분석철학자 중 한 명인 스크루턴은 바디우의 존재론이 수학과 경험적 세계를 난삽하게 오간다고 비판하였다.(스크루턴, 2019: 37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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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트는 하이데거의 존재-역사적 사유가 ‘형이상학적 사유’와 ‘사태적으로 논증하는 철학’ 모두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두 개념은 각각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바디우의 존재론에 대응할 수 있다.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거절, 곧 서양적 사유, 특히 형이상학적 사유의 전통 전체에 대한 거절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써 이성적인 그리고 사태적으로 논증하는 모든 철학에 대한 거절이기도 하다. 이러한 철학의 자리에 신화적-예언적 사유가 들어선다. 하이데거는──‘로고스’로부터 신화에로──‘뒤로 거슬러 오르면서’(im Sprung zurück), 초기-그리스적 사유에로 ‘뒤돌아가면서’(im Rückgang) “다른 시원”을 놓고자 한다. ‘다른 시원’은, 말하자면 존재를 진리의 ‘사건’으로서 내보이는 ‘존재-역사적’ 사유를 일컫는다.”(코레트, 199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