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 도덕적 공백에 관한 해결책이 있을까요

얼마 전 지인의 교통사고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미미한 접촉사고 였지만, 상대방의 잘못이 자명한 상태라 한의원에 가서 받을 수 있는 검사는 다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미미한 접촉 사고여도 문제가 될 가능성이 없진 않겠지만, (도덕적으로) 너무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하다라는 생각은, 그 사람에 대한 지적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인간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기적&합리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모럴해저드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1) 모럴해저드 현상은 정말 나쁜 것인가? 나쁘다면 왜 나쁜 것인가?
(2) 나쁘다고 한다면, 모럴해저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즉 개인의 도덕적 문제에 대하여 어떤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의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기인하는 교통사고-보험 문제는, 마치 사적언어와도 같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어떠한 규범적인 제안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충 공리주의적으로 사회에 손해를 끼친다..는 논리까지가 제 한계입니다.

(1) 과 (2)에 관해 진지한 물음을 던져보신 선생님, 올뺴미 학우분들이 계시다면 의견부탁드리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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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질문하신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철학자들이 있을 것 같긴 한데, 이런 주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논문이나 연구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저로서는 깊이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일종의 '비트겐슈타인적' 혹은 '매킨타이어적' 접근을 해볼 수는 있을 것 같네요.

(1) 모럴해저드 현상은 정말 나쁜 것인가? 나쁘다면 왜 나쁜 것인가?

'좋다/나쁘다' 혹은 '옳다/그르다'라는 판단은 특정한 기준을 전제할 때에야 내려질 수 있습니다. 운동 경기에 비유를 해 보면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네요. 가령, 공을 손으로 잡고 뛰는 행위가 허용되는지 허용되지 않는지는, 그 행위자가 어떤 경기에 참여하고 있는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합니다. 축구 경기에서는 공을 손에 잡는 행위가 규칙을 위반한 것이 되지만, 농구 경기에서는 이런 행위가 규칙에 따른 플레이로 여겨지죠. 즉, 우리가 어떤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지에 따라, 어떤 행위를 '좋다/나쁘다' 혹은 '옳다/그르다'라고 보아야 하는지가 달라집니다. 아무런 기준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좋다/나쁘다' 혹은 '옳다/그르다'라는 평가 자체가 불가능한 거죠.

글쓴이님께서 지인 분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셨다면, 이것은 글쓴이님이 그 평가 이전에 이미 특정한 윤리적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글쓴이님의 게임 규칙에서는 그와 같은 행동이 윤리적 규칙을 위반한 것으로 지적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정말 나쁜 것인가? 나쁘다면 왜 나쁜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결국 글쓴이님이 참여하신 게임과 그 게임의 규칙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윤리적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게임은 어떤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이 게임 이외의 다른 게임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 게임이 다른 게임들보다도 나에게 더욱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인 것이죠.

그리고 이 모든 물음은 결국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됩니다. 내가 어떠한 사회에서 태어나, 어떠한 문화와 규범을 받아들였으며, 어떠한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길 원하는지에 대한 물음인 것이죠. 우리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윤리'가 바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크 롤랜즈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해요.

"내 생각엔, 자신의 삶을 도덕적 이유에 따르게 하느냐, 이기적 이유에 따르게 하느냐 하는 선택은 궁극적으로 무합리적인 선택이다. 그 선택은 궁극적으로 자아 규정적인 선택이다. 즉, 어떤 이유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유형의 인간이 되고 싶은가 하는 그 인간상에 따른 선택이라는 것이다." (마크 롤랜즈,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SF영화로 보는 철학의 모든 것』, 신상규·석기용 옮김, 책세상, 2014, 262-263쪽.)

(2) 나쁘다고 한다면, 모럴해저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즉 개인의 도덕적 문제에 대하여 어떤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렇듯 윤리가 '자아 정체성(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자아 정체성은 더 넓게 우리 자신이 속한 '공동체(사회-역사-문화)'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면, 어떤 윤리를 지향할 것인지는 어떤 공동체를 지향할 것인지의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윤리를 따른다거나, 설명한다거나, 강제한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였고, '나'라는 사람이 속해 있고, '나'라는 사람이 살아가길 원하는 특정한 공동체를 따르고, 설명하고, 강제한다는 것이죠.

반대로 말하자면, 저는 도덕적 문제에 대한 해결이 단순히 특정한 개인을 합리적으로 계몽하는 식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좋다/나쁘다'나 '옳다/그르다'라는 판단은 언제나 게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게임을 넘어선 초합리성 따위에 의존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사람들의 지능이나 지식을 향상시킨다고 해서,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보편 윤리 따위가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 혹은 "이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다."와 같은 주장들은, 우리 자신이 참여하고 있고 또한 참여하길 원하는 공동체적 게임에 대한 설명입니다. 상대방에게 "나는 이러이런 사람들과 이러이러한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 이 게임을 같이 해보자!"라고 말하는 셈인 거죠. 아주 단적으로 말해, 저는 모든 종류의 윤리적 요구가 일종의 '전도' 혹은 '선교'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봅니다. 전도나 선교는, 단순히 종교에서 일어나는 활동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윤리적 평가와 판단과 강제에서 일어나는 활동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도덕적 문제에 대한 해결은, 우리 자신이 따르고 있는 공동체적 게임과 그 게임의 규범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선교사가 비종교인들을 전도하듯이, 아니면 오타쿠가 비오타쿠를 전도하듯이 말이죠. 여기에 어떤 고정된 방법이나 알고리듬이 존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가치를 홍보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투표나 정당 참여 같은 정치적 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결국 이런 식의 '전도'는 본질적으로 기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당신은 축구 게임보다도 농구 게임을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형이상학적인 이유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요. 사람마다 나름의 이유야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우리가 특정한 게임에 참여하기로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우연성'이 작용하는 것이죠.

실제로, 리처드 로티는 헤리엣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을 예시로 사용하여 이런 우연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수많은 미국인들을 감동시켜서 노예제 폐지의 흐름을 만들었지만, 스토 부인이 미국인들을 새로운 가치관으로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는 것이 로티의 지적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독교적 신념에 따라 노예제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소설을 썼고, 그 소설은 실제로 많은 미국인들의 생각을 뒤바꾸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지만, 스토 부인의 신념이 노예제 옹호자의 신념보다 더욱 정당하다는 것을 보증해 줄 철학적 토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죠. 단지 우리는 스토 부인처럼 우리가 따르는 공동체의 게임과 규칙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글을 쓰는 활동을 해야 할 뿐, 우리를 보증할 어떠한 토대에도 의존할 수 없고, 우리가 일으킬 어떠한 결과도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로티가 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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