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에 작고한 일본의 문예비평가인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는 우치다 다쓰루가 일본의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당시 우치다 다쓰루는 50대 중반이었는데, 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현대철학 기수 중 한 명인 에마뉘엘 레비나스 철학서의 번역을 통해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알려진 정도의 작가였다. 그런데 어떻게 돌연 이러한 작가가 나타났을까. 아니 이렇게 묻는 것은 잘못되었다. 이렇게 바꿔 물어야 할 것이다. 왜 이 정도로 탁월한 작가가 50세에 이르기까지 번역서 이외에는 불과 몇 권의 공저를 내는 일밖에 하지 않은, '과묵'하고 '태만'한 작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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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다쓰루에게 잠시 빙의(?)해서 가토의 물음에 대답해 보자면, "가토 씨, 제가 글쓰기에 태만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남자 혼자서 육아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유를 추가하자면요…. 제가 한때 근무했던 대학에서 교무처장 일로 바쁜 나날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은 신체적 독립조차 어려운 두 아이의 아빠고, 얼마 전에 박사 과정을 시작했지요.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코로나가 한창 세계를 지배하던 때라 독일 집구석에 저와 제 처 둘이서 새로 태어난 아기를 안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독일이야 한국처럼 산후조리원같은 시스템이 없어서 산후 3일 만에 집으로 아이를 안고 걸어왔지요.
첫 아이 때는 요령은 커녕 아무 것도 몰라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품에 안은 채 빨래 건조대 위에 읽을 거리를 늘어놓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 움직이는 몇 초동안 한 문장씩 두 문장씩 읽고 곱새기고 다시 건조대 시야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문장을 읽고 또 곱새기고 그런 식으로 공부했습니다. 잠시만이라도 멈춰 서면 아이가 깨어나 울었거든요. 새벽에는 아이를 엄마에게 주로 맡기고 세 시간씩 두 시간씩 잠을 쪼개 자며 논문을 썼었습니다. 그 바람에 디스크는 영원히 터져버렸었고 더는 이전과 같은 건강과 젊은 몸을 갖지 못하게 됐지요. 하지만 오히려 저는 아이가 태어난 뒤로 글이 더 빠르게 완성되었어요. 아무래도 그전까지는 마음 속에 데드라인이란 것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이가 태어난 뒤로 삶의 우선순위들이 너무나 극명해지면서 강제로 글을 써내게 됐던 것 같아요. ㅎㅎ
이 글을 읽으니 갑자기 그때가 떠오르네요.
근데 저분은 무려 혼자서 육아를 했다니 감히 상상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