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분석철학

격주로 진행되는 논문 지도 수업에서 오늘 나는 '분석적 니체 연구자'가 되었다.

사실 교수님이 나를 이렇게 칭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흔히 대륙 철학 전공자가 '분석철학'을 말할 때 담아내는 나쁜 뜻을 전혀 담지 않으셨다. 단지 주된 참고문헌이 영미의 것이고, 논문을 구성하는 방식, 그리고 글쓰기 스타일이 분석철학을 쏙 빼닮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분석철학을 한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애초에 도대체 '분석철학'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저러한 호칭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닌 듯하다.

학부와 석사를 할 때에 나는, 몇몇 대륙 철학 전공자들이 그러하듯, (속칭) 분석철학은 쓰레기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별로 우리 삶에 유익한 것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말 그대로 언어 게임을 할 뿐이다. 말장난이다. 도대체 그것을 왜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졸업 이후 이런저런 일을 겪고, 특히 올빼미덕에 박사중인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생각이 바뀐 것을 넘어서 실제로 분석철학 논의를 보고 있다. 심지어 그 빈도가 이제는 (속칭) 대륙 철학 문헌을 넘어섰다.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니체 연구자인 라이터의 책을 읽는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 스트로슨과 윌리엄스의 글을 읽는다. 그가 주장하는 <자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한국에서 참고할 문헌을 찾기도 힘든, 그의 스승인 라일튼의 저술 목록을 찾아본다. 찾아보니 라일튼이 데이빗 루이스의 제자이다. 루이스가 양상논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저자인 엘리슨이 양상논리를 통해 칸트의 GMS를 분석한다. 찾아보니 <분석적 헤겔>을 한다는 브랜덤도 루이스의 제자이다. 브랜덤의 또 한명의 박사과정 어드바이저가 로티다. 로티를 알아야 하버마스를 깊이 있게 알 수 있다. 하버마스를 이해하려면 니체를 알아야 한다.

이제 철학은 이렇게 물고 물리는 상황이다. 니체를 하려면, 칸트를 하려면, 헤겔을 하려면, 뭐든 하려면 자기가 어떻게 평가하든 분석철학계의 논의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지질 않는다. 옛날과 달리 바보같이 생각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회철학>적 <니체> 연구, 이미 이질적으로 보이는 한 쌍에 또 하나 이질적인 <분석철학>이 내 공부 영역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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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안 변하는 것도 있지만 변하는 것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철학의 기능, 범위, 선호하는 경향 등이 예전과는 꽤 달라졌다는 걸 느낍니다. 아마 이러한 변화와 탐색이 올빼미의 순기능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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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 대륙철학 연구를 인용하다 보면, 혹은 분석철학의 용어나 기법을 사용해서 대륙철학을 해석하고 비판하다 보면, 종종 주위에서 '이단' 취급을 받지 않나요? 저는 솔직히 그런 이단 취급 때문에 맘 상한 적이 꽤 많았습니다. 특히, 분석철학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비전공자한테까지 이단 취급을 받으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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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선생님이 쓰신 글이 생각나네요. 말씀하신 이유와 유사한 이유로 이번에 내려는 논문을 게재만 시키고 발표는 하지않으려는 생각중입니다. 다른 곳에 업로드한 이 글의 다른 버전에는 사실 이런 문단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오히려 내가 문제이고 이상한 놈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니체라는 위대한 철학자에 '미국과 자본주의에 굴복한 학문', '논리에 집착하는' 등의 멸칭적 함의를 담은 '분석철학'을 덧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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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납은 강경한 사회주의자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오히려 초창기 분석철학자들, 특히 빈학파에 아버지들은 상당히 좌파였던걸로 아는데... 퍼트넘도 한때 미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리다 논란이 되었다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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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문제가 되는게 아니라, 학문의 풍조가 그렇다고 느끼는것일겁니다. 철학을 하는 사람 중에는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철학으로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철학자들은 자본주의가 낳는 병리적 현상 같은 것을 고민합니다. 이를 위해 헤겔, 아도르노 등을 공부하는 것이구요. 이런 이들 눈에는 ‘속칭’ 분석철학자들은 사회적 문제는 외면하고 단순히 논리적이고 주석적인 문제에만 집착하는 자들이기에 비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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