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을수록, 그 책을 우리가 너무 온갖 해석들을 주렁주렁 달아놓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윤리학에 나열된 온갖 덕목들을, 우리는 그걸 어떻게든 정의하려 하고, 정의를 찾으려고 하고 그러고 있지만, 그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원하던 바였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과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덕목에 대한 "엄밀한 정의" 혹은 달리보자면, 일종의 플라톤적 이데아를 얻을 수 있을까, 여겼을까? (나는 아직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정의, 혹은 다른 학문적 방법론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덕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것은 그저 흐릿하게, 어떤 예시를 통해서 드러나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 여겼을 것 같다. 그림자가 있으며, 우리는 거기에 닿을 수 있다고,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 싶은 바의 전부였던 것 아닐까.
난 차라리 일종의 자기계발서로, 실용적 지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
위의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점점 더 추상적인 사고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나는 이제 보다 구체적인 것들을 좋아한다.
(3)
하지만 수학에 대한 모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대수학이란 연산을 통해 정의되는 수학적 관계에 대한 학문이다. +뿐 아니라, 어떠한 임의의 연산 관계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연산 관계라는 슬롯에 들어가는 수는 엄밀히 말하면, 대수학의 관심은 아니다. 이건 수론의 영역이다.
해석학은 함수에 관한 학문이다. 함수는 연속적이며, 일종의 길게 쏘아진 로프 같은 것이다.
기하학은 두 점 사이의 공간적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걸 아는 순간, 내가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던 대수학 교재의 첫 장을 이해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론이 무엇인지, 왜 그것이 대수학의 영역인지.
(4)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읽는다.
피에르 아도의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겹쳐 읽는다. 아도의 책이 의외로 앙상하고, 오늘날 기준으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2000년대 들어서 헬레니즘과 고대 후기 철학에 대한 연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리고 증가하고 있다.)
라에르티오스는 철학의 기원으로 고대 이집트의 신관들, 페르시아의 마기들, 인도의 나체 철학자들, 갈리아의 드루이드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한다. 하지만 그는 철학이 그리스인의 발명이라 단언한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철학은 자연학 - 논리학/수사학 - 윤리학을 모두 포괄하는 학문이라는 점이다. 철학의 기원을 말할 때, 이는 대체로 자연학의 영역에 해당하는 주장을 한다는 의미로 말한 듯하다.
라에르티오스는 윤리학이 철학의 영역에 들어선 것은 소크라테스의 공로라 말한다.
(5)
점점 더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에 대해 생각한다.
이들은 "경험"을 중요시하면서, 학술적인 개념어로 시작하는 철학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철학은 개념어가 아니라, "경험", 즉 현상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자주 잊는 바이다.
언어 철학에서 "의미"에 대한 연구는, 말 그대로 우리가 언어를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는, 그 현상을 탐구하려는 목적이다. 명제와 같은 것도, 결국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상정"된 것이지, 그것이 존재한다 확실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난 점점 더 영미권의 자연주의적 경향에 호의적이게 되고 있다. 스테판 스티치의 실험 철학은 물론, 여러 인지과학과 인지언어학, 심리학적 실험 결과들을 존중하게 되었다. 이들의 보편성은 여전히 미심쩍고, 데이터에 비해 비약되는 내용이 존재하지만 분명 진실의 파편은 가지고 있다 여기게 되었다.
(6)
40살이 되면 뭘 하지? 하던 것이 죄다 망하면?
하고 싶은 걸 하면 되죠.
그래서 유학을 간다고 했다. 그 나이에? 유학? 나조차도 놀란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