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14

주요 내용

니체는 계속해서 예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입장과 태도에 대해 논의한다. 설명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눈에 비극 예술은 원인 없는 결과/결과 없는 원인과 같은 비합리적인 것, 너무나 다채로운 것, 진리를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에게 그것은 단지 기분 좋은 것만을 표현할 뿐 유익한 것은 말하지 않는 대중 영합적인 예술이었다. 그렇기에 숙고하는 기질(besonnen Gemüthsart)을 가진 그는 비극을 보고 기쁜 마음을 가지지도 못했고 감동의 불꽃에 불타오르지도 못했다. 그의 취향에 맞는 것은 이솝우화였다.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기질은 그의 제자 플라톤이 이어받는다. 그는 비록 예술적 재능을 갖고 있었으나,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아 시가(예술)를 하찮은 모방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고선 지금까지 모든 예술 형식을 통합하면서 모든 문체의 통일성을 깨버리고 자신의 <대화편>을 만든다. 이제 예술은 마치 변증론적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던 것과 같이 철학의 시녀로 전락한다.

니체는 시녀 논의를 구체화하여 설명한다. 첫째, 아폴론적 경향은 논리적 도식주의 속에서 번데기가 된다(sich verpuppt). 둘째,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은 한낱 자연주의적으로 묘사된 격정으로 변했고, 비극적 연민은 상실될 위기에 처한다. 이렇게 예술을 이성적 합리성의 휘하에 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시도에서 그들의 이성에 대한 낙천적 태도를 알아낼 수 있다. 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덕은 지식이고, 죄는 오직 무지에서 비롯되고, 유덕한 자는 행복한 자’이기에, 비극의 주인공은 변증가이어야 하고, 덕과 지식, 신앙과 도덕 사이에는 필연적 연결이 존재해야만 한다. 어쨌든 핵심은 그들은 그리스 비극을 그들의 음악 세계에서 추방한다는 점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라는 현상을 단지 해체하는 부정적인 힘으로 파악할 수 없다”라며 논의의 방향을 바꾼다(GT, KSA 1: 96).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그저 예술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라며, ‘예술적 소크라테스’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시작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다가올수록 자신이 경멸했던 음악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그는 “몰이해를 통해서 죄를 지을 위험에 처해 있다”라고 느끼며 시를 작성한다(Ibid.). 니체는 이를 “논리적인 천성의 한계에 대한 의혹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칭한다(Ibid.).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니체는 14절을 끝맺는다. 즉, “어쩌면 논리가를 추방해 버린 지혜의 왕국이 있지 않을까? 예술은 학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상관물이자 보완물이 아닌가(Ibid)?”

짚고 넘어갈 점

  1.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키클롭스’에 비유하며 그가 비극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한다. 키클롭스는 깊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외눈박이이다. 즉, 이 비유를 통해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비극을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셈이다.

  2. 박찬국본과 학회본 모두 ‘besonnen Gemüthsart’를 ‘사려 깊은 기질’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besonnen’이 ‘besinnen (sich)’에서 파생된 것이고 후자가 ‘정신을 가다듬다, 숙고하다’를 의미하기에 숙고적 정신으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존 번역도 직역 상 올바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적 정신을 의미하는 ‘숙고’ 혹은 ‘정신’을 잘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3. 니체는 플라톤이 작시의 재능을 타고 태어났고, 소크라테스적인 원리에 “대항 투쟁(gegen ankämpfen)”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의 제자가 됐다고 말한다(GT, KSA 1: 94). 니체는 이 단어를 통해서도 아곤(갈등, 투쟁)이라는 세계의 기본 구도를 암시하고 있다.

  4. 플라톤은 결국 그리스 비극에 대항해 <대화편>이라는 자신만의 예술 형식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니체는 그것을 설명하는데, 독특한 것은 니체의 설명에 따르면 둘이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이다. 첫째, 그리스 비극과 대화편 모두 경험적인 것을 넘어선 것의 모방에 대해서 논한다. 둘째, 두 예술 형식 모두 다른 형태의 예술들을 흡수했다.

  5. 언급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예술 형식은 매우 다르기도 하다. 첫째, 비극과 달리 대화편은 변증술을 통해 이루어진다. 둘째, 비극은 이전의 예술 형태들을 잘 흡수하였으나, 대화편은 자신 이전의 모든 예술 형태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그 고유의 법칙을 모두 무시한 기형적 형태를 취한다.

  6.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이 논리적 도식주의 속에서 번데기가 된다(hat sich verpuppt)”라고 말한다(GT, KSA 1: 94). 박찬국본과 학회본은 이를 각각 ‘들어앉아 버렸다’와 ‘변질되었다’로 옮긴다. 하지만 이전의 문장에서 니체는 “무성하게 자라다”와 “줄기에 매달리다”라고 말하며 분명 생물학적 메타포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경우에도 ‘번데기가 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7. 니체는 “소포클레스에서 이미 합창단에 대한 당혹감이 보이고 있다”라며 13절에서 암시적으로 다룬 소포클레스 논의를 구체화한다(GT, KSA 1: 95). 즉, 소포클레스에서 이미 소크라테스적인 반-디오니소스적 경향이 태동했다. “따라서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반디오니소스적 경향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Ibid.).” 이로부터 니체가 비판하는 ‘소크라테스’는 단지 인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힘 혹은 양식으로서의 소크라테스’라는 점을 알 수 있다.

  8. 소크라테스의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는 마지막 문단이 14절의 핵심이다. 니체는 여기서 근대 시기의 문화를 논의하기 위한 토대를 다지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의하면, 소크라테스 전통의 이성적 합리성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다. 반면, 한낱 논리적 사유가 아닌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우리를 한계짓는다. 이런 측면에서 예술은 학문의 보완물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한 관계가 니체의 이상향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소크라테스의 유산(계몽적 근대)을 이어받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이다. 이 생각이 바그너에 관한 니체의 평가로 이어진다.


출처: KSA 1: 9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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