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13

주요 내용

니체는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이미 고대인들이 직시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민중을 타락시키는 자들(Volksverführer)로 소크라테스와 에우리피데스를 꼽았고, 아리스토파네스의 경우엔 소크라테스를 “모든 소피스트적 노력의 거울이자 총화”라고 논하기도 하였다(GT, KSA 1: 88). 이에 더해,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비극은 보지 않았으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만큼은 보곤 했으며, 델포이 신전에도 둘의 이름은 나란히 적혀 있다.

이후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행보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알고 있다’라고 착각하는 자들을 찾아가 논쟁을 벌이면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기이한 자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같은 행위를 통해 단지 본능에 의존해 직업, 예술, 윤리를 행하는 자들을 단죄하고, 이성을 통해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기이함을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에 대해 언급한다. 그것은 ‘지성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특수한 상황에 들려오는 X를 하지 말라는 신적인 목소리’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이것이 본능이다. “모든 생산적인 인간에게는 본능이 창조적·긍정적 힘이고 의식이 비판적이고 경고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에, 소크라테스에게는 본능이 비판적인 역할을 하고 의식이 창조자”이다(GT, KSA 1: 90). 니체는 이점을 강조하며, 소크라테스는 “모든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기괴할 정도로 결여”한 동시에 이성적 천성이 이상 발육을 통해 과도하게 발달해있는 “괴물”이라고 언급한다(Ibid.).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행보를 추동한 그의 면모를 ‘논리적 소크라테스’라고 언급하며, 소크라테스도 자기의 본능적인 힘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변론하는 모습과 죽음에 처했을 때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 ‘이상적인 모습’에 그리스의 청년들은 반하였고, 소크라테스는 새로운 이상으로 등극한다.

짚고 넘어갈 점

  1. 13절은 GT 전체에서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정확히 책의 중간 지점인 13절을 기점으로 니체는 그리스 문화를 다루는 문헌학자에서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근대의 르상티망을 비판하는 문화 비평가로 뒤바뀐다. 그리고 13절의 내용 자체에도 이 두 요소가 결합해 있다.

  2. 박찬국본과 학회본은 ‘Volksverführer’를 ‘민중 선동가들’로 번역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민중을 타락시킨 죄로 고발당했으니, 이를 염두에 두고 ‘민중을 타락시키는 자들’로 번역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직역 상으로도 문제가 없다.

  3.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서 소크라테스가 ‘모든 소피스트적 노력의 거울이자 총화’로 그려지는 것을 보고 근대인들이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흔히 소크라테스-플라톤과 소피스트는 대립하는 자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4. 소크라테스가 비극은 보지 않았으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만큼은 보곤 했다는 발언에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비극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니체의 견해가 드러난다.

  5. ‘소크라테스의 다이모니온’은 변론 40a에서, 플라톤의 죽음은 향연 233b 이후에서 그려진다.

  6. 니체는 델포이 신탁을 거론하며 소포클레스가 3등으로 적혀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소포클레스에서 벌써 비극의 몰락이 시작됨을 암시한다. 소포클레스도 아이스킬로스와 달리 ‘알고 있음’에 기반하여 비극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비록 그 명확성의 차이만 있을 뿐 에우리피데스와 결을 같이한다. 이에 대해서는 GT 9절에서 이미 니체가 은은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앎을 통한 작법은 소포클레스를 시작으로 에우리피데스·소크라테스를 넘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이어진다.

  7.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자신이 알지 못함을 아는 자’로 특징짓는다. 이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다른 그리스인들과 달리 ‘자기 자신에 대해 묻는 자’이다. 이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토대에 대한 물음을 시작하고, 이 경향은 칸트로 대표되는 비판철학에서 정점을 이룬다. 한편, 소크라테스에게 자기 물음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도 관련 있는바, 앎은 이제 삶을 살아가는 기예 혹은 윤리의 근간이 된다. 이제 삶을 이루는 최고 근간에서 본능의 역할을 배제되고, 앎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이유로 니체가 소크라테스(주의)를 공격한다.

  8. 니체는 “소크라테스에게서 보이는 논리적 충동은 그 창의 끝을 자신에게 겨냥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라고 말한다(GT, KSA 1: 90-91). 니체의 이 냉소적인 말은 소크라테스의 비판적 의식이 논리적 충동에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의도하고 있다. 쉽게 말해,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는 이성의 합리성에 대한 한계를 탐구하지 않고, 설정하지도 않는다. 즉, 그에게 이성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위 주석 7번과 달리) 소크라테스와 칸트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칸트는 소크라테스주의의 정점이기도 하고, 몰락이기도 하다. (이는 소포클레스가 비극의 정점이기도 하고 몰락이기도 하다는 점과 공명한다.)

  9. 니체는 마지막 문단에서 소크라테스에 예수의 모습을 겹쳐서 묘사한다. 재판관 앞에서 자신의 신적인 소명을 주장하는 것, 죽음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 제자들을 앞에 두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 그 대표적인 징표이다. 사실 앞선 문단에서 언급된 “외경심에서 옷자락을 살짝 건드릴 수만 있어도 우리가 가장 커다란 행복으로 여기게 될 그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라는 문장도 <마가복음 5:22>에서 나오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와 공명하기에, 분명히 니체는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겹쳐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겹침의 효과를 통해 니체가 의도하는 것은, 주지주의자로서 소크라테스가 본능을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것으로 만들고 또 한계 없는 자기 비판적 태도를 삶의 윤리적 태도로 만들었다는 점을 똑같이 예수가 이어받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두 인물 모두 본능을 긍정하고 자신에 대한 한계 지어진 앎(아폴론)을 추구하여 건강함을 유지한 그리스인들과 달리 삶에 대한 르상티망을 전개한 사상가이다.

출처: KSA 1: 8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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