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11

주요 내용

니체에 따르면 비극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특히 희극과 두 측면에서 달리 몰락했다. 첫째, 그것은 자살했다. 둘째, 그것은 자신의 훌륭함을 잇는 자손 없이 죽었다. 비극의 죽음 직후, 자신이 비극을 계승한다고 공언하는 ‘신 아티카 비극’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의 타락한 형태’일 뿐이고, 이들이 영웅으로 간주하는 작가가 바로 에우리피데스다.

니체는 신 아티카 희극의 특징에 대해 논한다. 그에 따르면, 에우리피데스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영웅적인 모습을 상연하던 위대한 비극 작가들과 달리 에우리피데스는 일상적인(자연의 실패한 산물) 인간 모습까지 극에 올린다. 이제 극은 위대한 그리스적 정신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다. 둘째, 에우리피데스는 사실 인간 삶의 모습을 극에 올려 관객이 자신 모습을 극에서 찾을 수 있게 만드는데, 이때 그는 교묘하게도 그들이 “잘 말하는” 상황을 그려낸다(GT, KSA1: 79). 이를 통해 공중(관객)은 “자신이 그렇게도 잘 말할 줄 아는 것을 보고 기뻐했고, … 말하는 것을 (에우리피데스를 통해) 배웠다(Ibid.).” 이제 관객은 적절히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교육 대상으로, “선량하고 눈치 빠른 노예”, “교묘하게 관찰하고 토론하고 추론하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대상으로 전락해 있다(Ibid.). 그리고 그리스 정신(형이상학적 진리, 불멸성에 대한 믿음)의 정점을 보여주던 극도 한낱 교육 수단으로 전락한다. 셋째, 둘째 이유로 인해 도래한 ‘(노예적인) 그리스식 명랑성’이 유럽 문화로 퍼지고, 이것이 마치 ‘참된’ 그리스 정신으로 오해되는 사태를 빚는다.

니체는 에우리피데스에 대한 자신의 비난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반박에 대해 논하고, 에우리피데스의 정신 분열적 모습을 지적하며 이 반박에 대해 재반박을 가한다. 에우리피데스가 관객을 무대 위로 올려 교사 역할을 했으니, 이전 비극 작가들과 달리 평등한 관계를 수립한 것 아니냐는, 그래서 진보를 이룬 것이 아니냐는 반박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에우리피데스는 누구보다도 공중에 대해 경외심을 눈곱만치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사람들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이 교묘한 상황은 에우리피데스의 지적 전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대다수의 공중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꼈고, 논리적 총명함으로 인해 자신 작품이 모호하게 생긴 논리적으로 명징하게 이해 불가능한 이전 비극(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문화)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를 이해해 줄 사람을 필요로 했다. 이 논리적 총명함을 투사하여 극작가로서의 자신을 이해하는 자가 바로 사상가로서의 에우리피데스이다. 이상의 이유로 에우리피데스는 공중에 대해 경외심은 가지지 않으나, “자신 창작에 대한 타당한 판결”을 고대했기에 교사역을 수행한 것이다(GT, KSA1: 80). 이에 더해, 사실 그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로 대표되는 그리스 비극 정신과 문화에 대항할 또 한 명의 동료이자 동등한 위치에 선 관객 한 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이와 에우리피데스가 다른 모습은, “반박 논문”이 아닌 “자기의 비극관”을 대립시켰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바로 니체가 초반부에 사용한 ‘자살’이라는 단어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짚고 넘어갈 점

  1. 니체는 비극이 ‘자살’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째, 비극을 죽인 자로 사실상 지명된 에우리피데스가 “비극의 타락한 형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GT, KSA1: 75). 둘째, 비극은 디오니소스적인 힘과 아폴론적인 힘(충동) 사이의 끊임없는 발전-투쟁(아곤) 사이에서 탄생하는 것인데, 에우리피데스의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2. 박찬국본과 학회본의 “비극은 죽었다. 시 자체도 비극과 함께 사라졌다! 너희들 보잘 것 없고 말라빠진 아류들은 저승으로 사라져라!”는 다소간 의역된 번역이다(박찬국: 148). 여기서 “아류”는 “Epigonen”을, “저승”은 “Hades”의 번역어다. 본 저서가 그리스 문화에 대해 다루는바, 각각 “에피고넨”과 “하데스”로 직역하는 게 더 나아 보인다.

  3. 박찬국이 “관객”으로 번역하는 “Publicium”은 관객보다는 ‘공중’으로 번역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박찬국: 154). 이제 극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예술 관람객이 아니기 때문이고, 직역 상으로도 공중이 적절하다.

  4. 니체는 레싱과 에우리피데스가 비슷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레싱이 에우리피데스와 마찬가지로, 비평가로도 재능을 지녔고 예술가로서의 재능도 지녔지만, 그 자신은 비평가의 재능을 탁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5. 니체는 또 한 명의 작가 이름을 곧바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것은 GT 이외의 작품에서도 계속되는 니체의 문예적 특징이다.

출처: KSA1: 7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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