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도덕성(동양철학, 맹자)

사단(四端)이 ‘도덕적’이라면 그 도덕성은 어디서 오는가? 이는, 사람이 도덕적인 四端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게 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四端을 ‘도덕적’인 것으로 만드는 특징을 묻는 것이다. 맹자는 四端을 말할 때, 四端을 느끼게 되는 과정(어떤 상황을 보고, 자발적으로(자연스럽게) 사단의 감정이 일어남.)을 말하지, 왜 그러한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상황을 보고, (맹자의 구도 하에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측은지심이 도덕적인 성격을 띤다고 말하는 것은, 어찌보면 '직관'에 호소(왜 도덕적인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하는 것이다. “봐봐! 이러한 상황에서 측은지심을 느껴. 이 마음이 바로 도덕적인 마음이 아니겠니?” 그러나 사단이 어떤 점에서 도덕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을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단은 반드시 도덕적인가? 나는 그렇다고 본다. 四端은 ‘실마리’이다. 어쨌든 맹자에 따르면, 인간에게 四端이 있으므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그래서 난, 四端 역시 선하다고 본다. ‘무언가’를 통해 性善을 알 수 있다면, 그 무언가 역시 善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四端은 性善 자체가 아니라 性善을 보이는 端이므로, 꼭 선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렇다면 四端은 왜 도덕적인 성격을 띠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 느낄 자발적인 감정’이 ‘四端이 도덕적임’을 보장해주는가? 아니면 이점이 바로 사단의 ‘도덕성’인가? 그런데 둘 다 아닌 것 같다. 물론 내가 ‘아니라’고 한 데에는, 맹자 구절을 근거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발성’과 ‘도덕성’이 함께 갈 수는 있지만(어떤 사례가 '자발적'이기도 하고, '도덕적'이기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발성이 곧 도덕성이라거나, 자발성이 곧 도덕성을 보장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화가 나 자연스럽게 ‘욱’하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올 수는 있지만, 이것이 꼭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단의 도덕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뭔가가 더 필요하다.

여기서 ‘인간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느낄’이라는 점을 주목해보자. 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자발성’ 하나로는 도덕성을 담보할 수 없지. 그러나 ‘인간이라면 모두 그렇게 자발적으로 느낄 것’이라면, 만약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인데, 비도덕적인 경우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을까?> 이 대답은, 어떤 요소가 사단을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지 답한다기보단, 四端의 개념를 이용해 ‘외연적으로’ 접근(사단의 사례를 생각해보았을 때, 비도덕적인 경우를 생각할 수 없음)하는 것이다. “사단의 정의(특성)를 만족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도덕적인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니?” 만일 맹자의 사고가 이와 같다면, 우리는 굳이 어떤 요소가 사단을 ‘도덕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사단은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여전히, 사단을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는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사단의 조건을 충족시킨 사례가 도덕적이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보기 어렵더라도, 그러한 사단의 사례들이 왜 도덕적인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럼 왜 사단은 도덕적일 수 있을지’ 답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외연적 접근’은 여전히 ‘그럼 왜 사단은 도덕적일 수 있을지’라는 질문을 남긴다. 사단을 ‘도덕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특성을 묻는 것은, ‘사단의 사례 중 ’도덕적‘이 아닌 것 같은 경우는 없다.’를 지적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 그렇게 느낄 것’이라는 점을 ‘자발성’ 외의 하나의 조건으로 추가해도, 반드시 사단의 도덕성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기, 질투의 경우, 그것들을 느낄 만한 상황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그런 상황도 얼마든지 존재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설명은, ‘논리적인 설명’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정한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느낌>을 만족시키는 사례의 집합은, <도덕성을 가짐>을 만족시키는 사례의 집합에 포함되더라도, <왜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정한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느낄 감정이 도덕적인가?>가 요구하는 것은 ‘설명’이다. 이러한 설명을 하지 않은채 집합의 포함관계만 밝힌다면, 아직 ‘사단의 도덕성’에 대해 충분히 해명하지 않은 것이다. ‘우연히’ 두 집합은 외연적으로 포함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관계를 설명하려면, 왜 ‘인간이라면 특정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모두 느낄 감정’이 ‘도덕성’을 담보하는지 말해야 한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측은지심을 느꼈다면 우리는 이 감정을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감정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것은 왜 도덕적인가?’를 물을 수 있다.

나는, ‘인간이라면 모두 특정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그렇게 느낄’이라는 특징이, ‘도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사단은, 자연적인 것이 곧 ‘도덕적’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종종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자연성이 곧 도덕성의 기준이라는 생각과, 자연성이 별도의 도덕성 기준에 의해 도덕적인 것으로 판명된다는 생각, 두 가지 생각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전자의 생각을 취하면, ‘왜 자연적인 것이 도덕적인 것인가(도덕적인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맹자의 四端 주장이, 자연적인 것이 곧 도덕적임을 의미하고, 도덕성의 기준이 ‘자연성’임을 의미한다면, 나는 별도의 ‘도덕성’의 기준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엔, ‘자연적인 것이 도덕적’이라는 명제 배후에는, 별도의 ‘도덕성’의 기준이 있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것을 보고, ‘아! 이것은 도덕적이군!’이라고 말할 때, 나는 나의 ‘도덕성’ 기준을 가지고, 자연적인 것을 판단하여 ‘자연적인 것이 곧 도덕적’이라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즉 ‘자연적인 것이 도덕적’이라는 명제는, 자연성과 도덕성의 일치를 말해주기보다도, 자연성이 선재하는 ‘도덕성’ 기준에 의해 도덕적이라고 판단됨을 의미할 뿐이다. 만약 정말로 자연적인 것이 도덕적임을 주장하려면, ‘자연성’이 곧 도덕성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자연성과 도덕성의 ‘논리적’(개념적) 관계는 밝히지 못하고(내 생각엔, 밝힐 수 없다!), 현상적으로 관찰되는 자연성과 도덕성이 일치하는 것 같은 사례들을 근거로, 주장해야 한다. 즉 정말로 자연성이 도덕성의 기준임을 주장하려면, 자연성과 도덕성이 일치하는 것 같은 사례를 놓고 판단해보는 수밖에 없다.(물론 이건, 내 생각이다. ‘자연성’과 ‘도덕성’이 개념적으로 연관될 만한 단서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물론 이것도, 도덕의 본성에 대한 나의 견해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나는 맹자의 사단을, ‘자연성’ 자체가 도덕성의 기준이 된다고 해석하기보단, <사단의 ‘자연성’을 도덕적인 기준을 갖고 판단해보니, 도덕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무난하다고 본다. 이런 배경에서, 나는 유의미하게 ‘사단은 어떤 점에서 도덕적인가?’를 물을 수 있다. 그리고 앞의 작업을 참고하면, 이는 ‘사단 개념을 만족시키는 감정은 모두 ’도덕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두 느낄 것 같은 자발적인 무언가’가 아닌 다른 사단의 ‘요소’를 찾아, 그 요소 때문에 사단은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면 모두 다 그렇게 느낌’이라는 요소와 ‘자발성’이라는 요소는, 그 자체가 도덕성을 보여준다(도덕성과 관련된다)고 전제하지 않으면, ‘도덕성’과 (개념적) 관련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총각’과 ‘남자’는 개념적인 관련이 있다. 이는 단순히, 외연적으로 사례를 살펴보니, (우연히) ‘모든 총각은 남자더라’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그런 사례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총각’과 ‘남자’는 개념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에, 논리적으로 ‘남자가 아닌 총각’은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신장이 있는 동물의 집합과 심장이 있는 동물의 집합이 일치한다고 해서, ‘왜 심장이 있지요?’란 질문에 ‘신장이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이상한 이유와 통한다. ‘심장이 있음’이 ‘신장이 있음’을 통해 보장된다는 전제가 없고선, ‘신장이 있는 이유’에 대해 ‘심장이 있기 때문’으로 대답한다면, 충분한 대답이 안되고 이상하다.

그렇다면 다른 요소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느낄 것’이라는 사단의 (핵심) 요소가 아니면서 사단을 도덕적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요소는, ‘상황에 부합함’이라는 특징밖에 없다고 본다. 즉 측은지심이 도덕적인 이유는, 그 감정이 상황에 맞는(부합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측은지심이 도덕적인 이유는, 측은지심이 ‘모든 사람이 느끼는 것’이고, ‘자발적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점과는 무관하다. 나는 ‘자발성’ 내지는 ‘자연성’을 통해 ‘도덕성’이 정의된다는(보장된다는)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즉 측은지심은, 선재하는 도덕성의 기준에 맞기 때문에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선재하는 도덕성의 기준이 ‘상황과 부합함’이다.

여기서 혹자는 물을 수 있다: 그럼 ‘부합’이라는 아이디어는 과연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부합’이라는 개념을 설명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는, (나는 맹자 생각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특정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도덕적 반응은 정해져 있고, 따라서 ’특정 상황과 거기로부터 나오는 도덕적 반응’을 순서쌍 <S, R>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R이 도덕적인 이유는, R이 S에 ‘부합’하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도덕성’과 ‘부합’의 개념적 관계는 얼마든지 맺어질 수 있다. 예컨대 진리 대응론에서, ‘사태(state of affairs)와의 상응(대응)’이 ‘참임’을 설명하는 기준이듯이.

“R은 S에 부합하는 반응이므로, (R은) S에 의존(depend)한다.”는 식으로 ‘의존’이란 개념을 사용하면, ‘측은한 감정을 느끼지 않아야 할 때 측은한 감정을 느끼는 상황’에서의 측은한 감정은, 상황에 부합하는 반응이 아니므로 ‘도덕적’이지 않고 S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의 ‘의존’은 四端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핵심 요소’라고 본다. 단적인 예로, 맹자가 측은지심을 말할 때,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언급했다. 그래서 난, 맹자의 생각을 ‘사단의 도덕성은 상황에 의존한다.’와 같이 말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측은지심은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상황’에 의존한다. 물론 이때의 ‘향당의 칭찬을 얻으려 함, 어린 아이의 부모와 사귀려 함’은 ‘측은지심’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상황에의 의존’이 아니다. 왜냐하면 ‘측은지심’의 핵심적인 특성은 ‘자발성’이고, 어린 아이의 부모를 고려하거나 향당의 칭찬을 고려함을 통해 어떤 마음이 들었다면, 이는 ‘자발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측은지심이 의존하는 상황은, ‘자발적’ 반응이 유발되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이 무엇(상황)과 ‘부합’함을 통해 측은지심은 ‘도덕성’을 획득한다. 나는 이처럼 ‘의존(부합)’을 사단이 갖춰야 할 핵심 요소로 보기 때문에, 나의 입장에서는 ‘상황에 의존(부합)하지 않는 사단부중절(四端不中節)과 같은 경우’를 ‘사단’의 문제에서 배제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자발적인 x’에서의 ‘자발성’과 ‘상황과 부합하는 x’에서의 ‘부합’은 다른 개념이다. ‘자발성’(자연성)과 ‘상황에의 의존(부합)’이라는 두 가지 특징은, 사단의 하나인 측은지심의 모든 사례가 가지고 있으나, 측은지심의 각 사례가 서로 다른 특징인 ‘자연성’과 ‘부합’을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우연적이다. 즉 ‘자연성’과 ‘부합’이라는 특징이 공존하는 것은 우연적이다. 그러나 사단의 하나인 측은지심의 모든 사례가 <‘자연성’과 ‘부합’의 공존>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으므로, 이는 측은지심의 핵심 조건이 된다.

마지막으로 유의할 것은, 나는 ‘모든 상황에서, 그에 부합하는 반응이 '사단의 하나'여야함(예: 측은지심)을 주장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상황 S에서, 거기에 맞는 도덕적인 반응은 하나 이상 있을 것이다.(물론 내가 어떻게 반응해도 문제가 생기는, 그런 딜레마적 상황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도덕적일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신조차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도덕적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그 상황에 부합하는(의존하는) 반응 R이 ’모든 인간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느낄 것‘이 아닌 경우도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상황에 부합하는 반응이 사단의 하나가 아닌, 그런 상황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사단이 모든 상황을 커버하진 못해도, 적어도 상황에 부합하는(의존하는) 반응이 사단인 경우에는, 그런 경우에는 모두, 사단은 ’상황에 부합하기 때문‘에 도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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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력있는 동양철학 관련 글 감사합니다.

자발성ㅡ도덕성 개념이 완전히 동일한 개념일 수 없다는 직관에서 출발하여 맹자의 사단에서 자발적 마음과 도덕적 기준 내지는 개념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굳이 개념적 동일성에 의존하지 않아도 "자발적 마음이 곧 도덕성"이라는 말을 환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오직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마음을 가질때에만, 도덕적일 수 있다"고 한다면 이 명제는 자발성과 도덕성이 필요충분조건 관계에 놓여있음을 주장한 것이지 두 개념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맹자의 사단이론을 "자발성은 곧 도덕성이다"라고 해석하는 명제가 자발성과 도덕성 두 개념의 동일성을 주장한다고 가정하는 비판은 부분적으로만 유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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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핵심에 대한 좋은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다뤄지고 있는 내용은, "사단이 가진 도덕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라는 사단 도덕성의 기원(혹은 토대)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원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는 맥락을 배제하면, 말씀하신 대로 개념적 동일성 외에 필요충분조건도 가능한 선택지가 되겠지만, 이러한 기원에 대한 물음, 즉 "사단이 가진 도덕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자발성과 도덕성이 필요 충분조건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마음의 자발성에서 나온다"라고 답하는 것은, 제가 본문에서도

위와 같이 썼듯이, "왜 심장이 있지요?"라는 질문에, "신장이 있으니까요."라고 답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봤습니다. 이는 기원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는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과학적으로 심장이 있는 동물 집합의 외연과 신장이 있는 동물 집합의 외연은 같다고 알고 있고, 따라서 심장이 있음과 신장이 있음 사이에는 필요충분 조건이 성립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같은 기원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자 할때는, 도덕성과 자발성이 필요충분 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했습니다. 그리고 개념적 동일성이 불충분하다면, 이외의 선택지는 '모종의 다른 기준에 의해 자발적인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판단될 경우'밖에 없다고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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