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계획서를 구상하다가 쓰게 된 주저리

내년 봄 학기에 박사 유학을 계획중인 관계로 거의 4년 만에 연구 계획서라는 것을 다시 쓰게 되었는데 너무 생경한 마음이 들어 석사 입학 때에는 연구계획서를 어떻게 썼었나... 한번 뒤적거려보았습니다. 다시 읽어보기가 민망하긴 해도 연구 동기나 목적, 논문 개요 (목차) ... 뭐 여기까진 괜찮았네요. 논문을 대략적으로 요약해서 설명하는 부분부터 진짜 처참하긴 하지만요.

그런데 문득 참고문헌 리스트를 읽어보다가, 정말 듣도보도 못한 저서들과 논문들이 많이 담겨있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저서들은 도대체 뭐지...? 내가 이런 것들을 알고 있던가...? 아니 이것들이 진짜 존재하긴 하는 것들인가...?' 그런데 이내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 작성하고 있는 박사학위 논문 연구계획서 또한 별반 다르지가 않으니깐 말입니다...

4년전 석사학위 논문 연구계획서를 작성했을 때에도 어렴풋이 들었던 의문이었습니다만, '내가 철학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데 뭘 참고할건지 내가 어떻게 아는가??'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었죠. 이 의문이 4년이 지나 박사 과정을 지망하는 지금까지 계속 남아있다는게 한켠으로는 부끄럽기도 합니다만 석사 논문 작성할 때 참고했던 문헌들을 그대로 복사 붙여넣기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곤란하게 되었네요. 물론 어느정도 염두에 두고 있는 문헌 리스트들은 있습니다만 계속해서 드는 생각이 '내가 이것들을 정말 참고하기는 할까? 석사때처럼 뭔가 리스트 채우기 느낌이 들진 않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이 책들 내용에 대해 단 한 구절이라도 아는 바가 있는가?' 등등..

나는 해당 분야에 대해 우선은 '공부'를 하고 난 후 논문을 작성하고 싶은 것인데 연구 계획서를 작성하는 시점에 이미 해당 분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고 있어야된다는 점이 약간 모순적이지 않나, 하는 잡념도 듭니다. (물론 제가 작성해야하는 것은 '연구'계획서이지 '공부'계획서는 아니기 때문에 투정에서 그쳐야겠습니다만.) 현재는 문제가 더욱 확장된 것이, 아무래도 해외 유학을 지망하고 있다보니 2차 문헌에서 참고할 자료들로 해외 논문들을 거론해야만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좋지 못하다는 점이죠...

혹시 선생님들께서도 연구 계획서를 작성하셨을 때 비슷한 곤란함을 느끼셨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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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계획서 쓸 때마다, 저는 연구할 계획서를 적는 것이 아니라, 이미 95% 연구되었으니 5% 연구할 시간을 달라, 라는 요구서라는 생각으로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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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주제나 분야를 연구하시는지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논쟁을 중심으로 참고문헌을 정리해 보시면 도움이 되시지 않을까 합니다. 모든 연구에는 항상 논쟁 지점들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게 텍스트 해석상의 논쟁이든지 철학적 견해들 사이의 논쟁이든지,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들이 있죠. 그 지점들을 하나하나 부각시키고, 각각의 의견들을 대표하는 학자와 글이 무엇이 있는지 정리하면, 실질적인 내용이 있는 참고문헌 리스트가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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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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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본 맥락과 조금 다른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주변에 박사 하시는 분들 이야기 들어보니 지원 과정에 별별 일이 다 있더라구요. 예를 들어, 박사 엑스포제를 몇 십장 써 내야 하는 게 전 당연한 줄로 알고 있었느데, 의외로 엑스포제를 상당히 짧게 작성해서 내고 박사 진학하신 분들이 있더라구요. 또 다른 예로는, 박사 엑스포제 수정하는 조건으로 교수님이 받아주셔서 박사 입학 초기 내내 엑스포제 수정 작업을 하신 분도 계시구요. 저는 완벽하게 완결된 최종 엑스포제를 내서 그것으로 승부를 보는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지도 교수님이 어느 정도 학생 방향이랑 자기 방향만 맞다 싶으면 일단 받아줘서 지도 과정에서 엑스포제 수정에 들어가기도 하구요. 그런 사례를 보니까, 아 교수님이랑 일단 컨택이 잘 되고 나서 필요하다면 논문 방향을 좀 수정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꾸준히 의사소통을 지속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구요. 제가 아직 박사 진학을 못해서 감히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는 그렇지만, 여하튼 제가 다른 분들 이야기 듣고 받은 인상은 그렇습니다. 어쩐지 뭐랄까.. 문헌 목록 작성에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논문 방향성만 뚜렷하면 일단 교수와 컨택해서 입시 과정에서 이런저런 수정 과정도 거치고 교수와 커뮤니케이션을 계속할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요...
다른 박사과정 계신 분들의 생각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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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주제는 아도르노 (및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산업론입니다. 석사 과정에서 공부를 얕게 해서 그런지... 아도르노 말고는 아는 바가 잘 없습니다. 그래도 아도르노 및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관련된 학자들, 예를 들자면 호르크하이머나 하버마스, 마틴 제이, 프레드릭 제임슨, 등등의 이름'만'은 알고 있지만...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책을 한번도 펴본 적이 없네요..

여하간 짬바가 느껴지는 조언 감사합니다.

PSB님께서 본글의 맥락과 다르다고 말씀하시면서 댓글을 다셨는데, 저도 PSB님의 댓글과는 또 다른 맥락의 댓글을 달아보도록 하겠습니다 ㅋㅋ
저는 석사 학위 논문 연구계획서와 제가 실제로 작성하게 된 졸업 논문 사이에도 크나큰 괴리가 있었습니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정말 딱 두개의 키워드, "아도르노" 와 "영화" 이거 뿐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요.

저는 사실 아직도 '엑스포제'라는 것을 이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극 p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이것 때문에 지도교수님께서 저를 지도함에 있어서 무척이나 곤란함을 느끼셨었죠...)
expose 라는 말 자체를 '드러냄'이라는 의미로 파악해본다면, 이는 그 단어 안에 벌써 논리적으로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었다' 라는 것을 함의하는게 아닐까요? 그 감추어져 있던 것, 머리 속에 불분명하게 꿈틀거리고 있던 무언가를 명쾌하게 밝혀내는 과정이 학위 과정이 아닐까하는... 공부하기 싫어서 아무 말이나 뱉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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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동의합니다. 엑스포제에 기반해 진행되는 학위 과정 전체가 그러할 것이고, 또 엑스포제 하나만 한정해 두고도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석사 엑스포제 쓰면서 늘 듣는 지적이 그거였어요. 너가 생각하는 Thema는 엑스포제에 있는데, 그러나 논문을 관통하는 단 한 가지의 Leitfrage가 안 보인다, 논문의 내용은 그걸로 수렴되고 집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류 담론들만 다루는 피상적 논의에 그친다. 그 소리를 계속 들었네요. 사실, 제가 쓴 엑스포제인데도, 그 해당 테마 즉 그 문제 의식 안에 감추어진, 논리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질문들과 귀결들을 제 자신이 눈 뜨고도 못 찾고 있더라구요. 엑스포제 쓰는 게 이리 어려울 줄이야.. 저 자신에 대한 의심이 참 많이 들더라구요.ㅎ 또 글쓴이님도 애초 의도한 바와 다른 논문이 나왔다고 말씀하셨듯이, 저도 엑스포제 작성 과정에서 피드백 받으면서 제가 처음 야심차게 의도했던 바와는 다르게, 최종적으로는 여러 타협을 할 수밖에 없더라구요ㅎㅎ

말씀을 들어보니 지금 상황에서 당장 연구 계획서를 쓰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참고 문헌 목록 따위야 중심 연구 주제가 확고히 잡히면 그냥 따라나오는 것이구요. 별 것도 아닌 제가 한 마디 거들어보자면,

  1. Youn님의 말씀대로 주제나 쟁점을 따라 유명한 논문과 책들을 한 번 찾아보시지요.
  2. 뭐가 유명한지, 학계에서 인정받는지 모르겠다면 구글 스칼라 인용수를 참고하시구요.
  3. 책을 찾아본 후에 글쓴이님이 염두에 두는 주제의 저술인지 fit한지 아닌지 알기위해 다 펼쳐서 끝까지 읽어볼 수는 없으니, 초두에 있는 <들어가는 말> 이나 <요약> 부분을 읽고 걸러내시지요. 아주 효율이 좋은 작업입니다.
  4. 그러다보면 어느 정도 주제에 관한 전체 지형도가 그려지실 것이고, 이에 따라 연구 계획서를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문헌은 걸러내진 저술들 + 그 저작들이 공통적으로 인용하는 또다른 저술들으로 자연스레 채워지실 것입니다.

물론 이 또한 쉬운 작업이 아니고 손도 많이 가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한 번 제대로 틀을 잡아두면 향후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실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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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도르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찾아보니 독일어로는 2019년에 Adorno-Handbuch가 나왔네요. 박사과정에서 다룰 주제에 관련된 현재 연구상황이나 최신의 참고문헌 목록을 아마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하신 "호르크하이머나 하버마스, 마틴 제이, 프레드릭 제임슨" 등이 박사과정 연구주제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적어도 그 정도는 본인이 잠정적인 판단을 내리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박식하시고 훌륭한 연구자들도 많지만, 본인의 연구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다면, 저 학자들에 대해 솔직히 다 알 필요가 있나 싶네요.

  2.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상황에서 연구계획서를 쓰고 내년에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다는 계획이 무리라고 보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심정적으로 이해는 합니다만 학위논문은 무언가에 대해 두루두루 많이 아는 것을 평가한은 것이 아니라(그게 전제되긴 하지만), 논하고자 하는 분명한 주제와 지향점이 있기는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 도달하기까지 촘촘하게 논지를 짜고 문장화하는 것은 물론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가설적으로라도 내가 하고싶은 연구가 무엇이고 무엇을 하겠다라는 목표는 분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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