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한 공룡의 이데아?

안녕하세요. 간단한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1) 이 문제는 독일 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의 어느 책에 잠깐 언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플라톤의 견해에 따라 공룡의 이데아라는 것이 과거 공룡이 지구상에 살아있었을 때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공룡이 멸종한 지금도 여전히 이 '멸종한 공룡의 이데아'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지가 궁금합니다.

(2) 또, 만약 멸종해버린 공룡의 이데아가 존재한다면, 전혀 존재한 적이 없는 키메라의 이데아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두가지 간에 질적 차이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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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기 계신 분들에 비하면 학식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제가 헛소리를 하면 많은 분들이 지적해주실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저 역시 더 배워갈 수 있을 것 같아 조심스레 답변을 남겨봅니다.

이데아계의 실재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상계 모상들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맞아도, 모상의 상태(존재여부)가 변화했다고 해서 이데아계의 실재들까지 모상에 맞춰 변화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변화에 따른 영향은 가지계에서 가시계 방향으로만 작용할 수 있지, 이데아계의 모방에 불과한 가시계에서 가지계 방향으로 작용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나무를 베면 나무의 그림자가 변하지만, 나무의 그림자를 잘 가려서 없앤다 하더라도 나무 자체는 계속 존재하는 것처럼요.

기본적으로 플라톤이 이데아계가 영원불변하다고 주장했기에, 가시계에서 공룡이 멸종한다 하더라도 이데아계에서는 온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허구적 대상의 이데아에 대해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논의는 이데아론에 의해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단 플라톤 철학의 또다른 해석에 해당하는 문제 같습니다.

어차피 플라톤의 핵심 논의에서는 조금 빗나간 문제니까 제 의견을 덧붙여 보자면, 두 가지 주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인간이 상상력을 통해 이데아를 조합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데아를 바탕으로 한 허구적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의견입니다. 예를 들어, 키메라는 사자, 뱀, 산양 등의 이데아를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재해석한 허구적 개념으로 이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키메라’의 완전한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 대신, 사자, 뱀, 산양 등의 이데아가 각각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플라톤 이론 하에서, 완전하게 존재하는 이데아를 현상계 인간의 사유 차원에서 결합-분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데아를 인간 사유차원에서 결합-분해 방식으로 변형하는 것이 불가하다면, 대신 아래와 같은 주장이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허구적인 존재들에 대해서도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해석할 여지 정도는 있다’는 의견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는 이데아계의 불완전한 모방이기에, 이데아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간의 상상력만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데아계에는 현상계보다 더 완전한 형태를 갖춘 키메라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즉 굳이 따지지면 위와 같은 의견을 내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보았지만, 대부분이 이런 논의에 대해서 “정말 그럴까?”하고 어색함과 반발심(?)을 느끼는 이유는, 이가 플라톤이 주로 다루고자 했던 실재의 본질과는 약간 다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주로 더욱 구체적이고 실체가 있는 개념들 (예를 들어, 인간, 정의, 동등성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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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스런 답글 감사합니다. 사실, "멸종한 공룡의 이데아"라는 문제를 통해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서 질문을 드려본 것이었는데, 함께 생각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전문가가 아니기에,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된다면 다른 선생님들께서 바로잡아 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질문 (1)에 대한 답변은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따른 논리적인 결과를 말씀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원형이자 불변하는 것이니, 일단 공룡이라는 유(類)에 대한 이데아가 일단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공룡의 멸종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 존속하고 있어야 하겠죠.

그런데 플라톤의 시대와 같은 고대에는 공룡이라는 것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고, 후세에 과학의 발전으로 공룡의 존재를 규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공룡의 이데아라는 것을 인간이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이것이 갑자기 사후적으로 소급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되어버리는 현상이 발생하죠. 이런 결과는 무언가 상당히 어색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고과정의 순서라는 면에서 볼 때, 이데아라는 것이 본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물의 존재로부터 유추하여 그 존재가 가정되는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는 사실상의 문제이고,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을 따른 것은 아니죠.

질문 (2)와 관련해서 저는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플라톤은 그의 <소피스테스>편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없는 것"을 일종의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친부살해'를 범하고, 비존재의 존재를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키메라가 비존재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논리에 터잡아 일종의 비존재의 존재함으로서의 이데아를 분유하고 있는 대상이라 할 여지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키메라의 이데아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생각은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플라톤 자신의 설명을 우리는 기대할 수 없기에 이리저리 상상하고 추측해 볼 뿐이지만,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어색한 부분들이 있음이 이러한 문제들을 사고함으로써 더 명확해지고, 그로써 플라톤의 철학 및 철학적 문제 일반에 대한 심화된 이해가 가능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