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철학자에 대해 논의할때

어떠한 철학자와 그 사상에 관해 얘기할 때 (그 사상을 파괴하거나 반론을 제기하고자 하는 목적이 아닌 상황에서)

그 철학자의 사상이 맞다고 어느정도 합의한 상태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게 효율적이라 생각하는 건 폐쇄적인 사고일까요? A학자의 이론에 대해 얘기해 보자. 라고 했을 때, 그 철학자가 말하고자 했던 본질에서 멀어진 부분에서 계속 의문을 제기하거나, 이론의 근본부터 문제를 제기하는 물음이 불필요하고 피곤하게 느껴져요.

새로운 이론을 세우자! 가 아니라 어떤 철학자의 이론을 공부하자!는 목적이면 그 이론의 본질에 가까운 논의를 하자...가 암묵적으로 합의된 거 아닌가요? 아니면 철학은 원래 자유롭게 비판을 제기하는 활동이고 제가 폐쇄적인 걸까요? 한 철학자의 이론에 대해 논의할 때 어떤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라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이건 추가적인 질문인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처럼 순환적이거나, 개인마다 다 다른 답을 낼 수 있는... 생각하기 나름인 물음들은 어떠한 철학적 논의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시나요?

7개의 좋아요

제가 이렇게 배워서인지 몰라도 아카데믹한 학술장에서 철학을 교육하는 방식, 그리고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일단 대상이 어느정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학술적 논의거리조차 되지 않으니까요.

6개의 좋아요

자꾸 철학 논의에서 대상이론의 비합리성을 주장하는 의견들을 보며 뭔가 갑갑함이 느껴지는 제 사고방식이 문제인가 진심으로 고민했는데 다행이네요..

2개의 좋아요

어느 정도가 정확히 무슨 뜻이냐에 따라 달리긴 했겠다만... 절대 폐쇄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철학자의 의견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고 비판하는 것이 폐쇄적인 것입니다.

5개의 좋아요

폐쇄적인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상대의 글을 가장 호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논리학이나 비판적 사고론에서도 '자비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이라는 이름으로 강조됩니다. 심지어, 가다머나 데이빗슨 같은 철학자들은 이러한 자비의 원칙이 전제되지 않을 경우 텍스트에 대한 이해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해진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자비의 원칙이 단순히 예의상의 규범인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해 자체를 성립시키는 해석학적 원리라는 것입니다.

9개의 좋아요

많은 철학자들은 "순환적이거나, 개인마다 다 다른답을 낼 수 있는 ... 생각하기 나름인 물음들"이라고 사람들이 흔히 여기는 물음 가운데 상당수는 실은 그렇지 않거나, 최소한 보다 깊고 생산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안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즉, '이거 그냥 개인의 의견차에 달린 것 아닌가요?'라는 질문은 종종 철학적 배경지식의 부재에서 비롯되고는 합니다.

마찬가지로

역시 비슷한 이유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4개의 좋아요

몰랐던 지식까지 함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의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물음과 생각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지식을 쌓아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자비의 원칙’에 관한 @YOUN 님의 말씀에 덧붙여…

제가 생각하기로 자비의 원칙은 진위 판단이 아닌 해석에서의 기준으로서 적합합니다. 어떤 이론이 최대한 참으로 간주되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그 이론의 구문론적 구성 요소들을 해석하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건 그 이론을 참으로 상정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자비로운 해석과 별개로 ‘무의미한’ 이론이 있을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떤 이론을 최대한 참으로 해석함 직한 해석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해석에 따르면 그 이론은 모순된 이론이 됩니다. 또는, 그 이론이 도출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바가 모순되어 그 이론의 주장이 모두 참이라면 그 이론이 모순된 이론이 됩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 이론을 ‘가능한 참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론에 자비로운 해석을 애당초 줄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이론이 그 해석 하에서 최대한 참인지를 확정할 수 없어서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응이, 제가 이해하기로, 이론을 무의미한(nonsense)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대응이 사실 이런 결에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자비로운 해석을 선제하는 것은 이론을 참으로 여기는 것과는 순서가 반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론을 참으로 여긴 뒤에는 자비로운 해석을 줄 수 없을 수 있고, 자비로운 해석을 주면 이론을 참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그 이론을 과연 참이라고 여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질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올바르게 참으로 주장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자비의 원칙을 선제하는 것은 옳을 수 있겠지만, 나아가 저는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만, 덮어두고 ‘일단 이걸 받아들이고 시작하자!’라고 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겠습니다.

4개의 좋아요

이러한 주장에 데이빗슨이나 해석학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 상대가 제시하는 주장이나 이론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발화자와 해석자가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거나 혹은 서로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데이빗슨의 요지니깐요. 발화자의 주장이 (설사 모순을 포함하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어떤 intelligible 한 해석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nonsense라고 간주하는 것은 자비의 원리와는 결이 다른 것 같습니다.

3개의 좋아요

아마 아무런 자비로운 해석도 줄 수 없는 이론이라면, 애초에 그 이론을 '이론'이라고 (혹은 '언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가 의문스러울 것 같기는 합니다. 적어도 데이빗슨의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말이에요. 다만,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고민인데, 저는 종종 '거짓(falsehood)'과 '무의미(nonsense)'의 경계가 다소 모호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합니다. 특별히, 데이빗슨의 철학에서는 '우리의 언어에서 참'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들만이 유의미한 언어일 텐데, 이 경우에는 우리 언어에서 참인 것들 바깥에 놓인 믿음들이 '거짓'인 동시에 '무의미'가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거짓'과 '무의미'가 동일시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데이빗슨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제가 데이빗슨을 잘못 이해한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4개의 좋아요

데이빗슨이 이렇게 명시적으로 말한 적이 있나요? 제가 알기로 데이빗슨은 거짓인 믿음들 역시 언어와 사유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인정하고 있거든요. 예컨대 어떤 발화자의 발화를 해석할 때, 해석자는 발화자가 거짓인 믿음을 발화하고 있다고 정당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요.

일단 데이빗슨은 "믿음"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언어가 선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 언어에서 참인 것들 바깥에 놓인 믿음"이 있다면 이 믿음 역시 (우리 언어와는 다른) 모종의 언어 속에 위치해 있는 것이죠. 완전히 상이한 개념적 도식을 인정하지 않는 데이빗슨에게는 당연히 이 다른 언어 속의 믿음 역시 우리 언어로 번역 가능할 것이구요. 그렇다면 해당 믿음은 거짓일 수는 있어도 무의미하지는 않죠. "무의미한 믿음"은 데이빗슨에게는 거의 형용모순이 아닐까 싶어요. 반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기계가 내는 소리는 데이빗슨에게는 믿음이라고 귀속될 수 없고 따라서 무의미 하다고 여겨질 듯 합니다.

3개의 좋아요

(1) 어딘가에서 데이빗슨이 '우리 언어에서 참(truth in our language)'과 같은 표현을 직접 썼던 것도 같은데, 제 기억이 부정확해서 어떤 맥락에서 이런 표현이 나왔는지는 가물가물하네요.

다만, 데이빗슨이 의존하고 있는 타르스키의 규약 T를 염두에 두고서 위와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데이빗슨의 해석론에서는 의미가 원초적 진리 개념에 의존하잖아요. 즉,

(규약 T) s는 p라면, 오직 그때에만 참이다(s is true iff p). (여기서 's'는 s의 기술에 의해 대체되고, 'p'는 L이 우리말일 경우 s 자체에 의해 대체되며, L이 우리말이 아닐 경우 s에 대한 우리말 번역에 의해 대체된다.)

라는 도식에서 데이빗슨은 's'의 자리에 들어가는 문장들을 참으로 만들어 주는 번역 p를 우리가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가 s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보는 거고요. 그렇다면 이때 의미의 이해란, 결국 주어진 언어 s를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참'이 되도록 만드는 활동이 아닌가 해서요.

(그런데 솔직히 저는 데이빗슨의 글을 읽을 때마다 아직도 불명확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저의 독해에 그다지 자신이 없습니다. 데이빗슨을 꽤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보았는데도, 몇몇 핵심 아이디어들을 제외하고서는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네요. 위의 내용들에서 제가 오해한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2)

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실, (댓글 수정 내역에도 나와 있지만) 자비로운 해석을 줄 수 없는 상태(?)를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 지 저도 막막하여서 처음에는 그냥 '것'이라고만 했는데, 너무 막연한 표현인 것 같아서 '믿음'이라고 바꾸었어요. 그런데 '이론'이라고 하든 '언어'라고 하든 '믿음'이라고 하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자비로운 해석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이론(언어 혹은 믿음)'과 같은 표현들은 엄밀히 말해 모두 형용모순적이겠네요.

2개의 좋아요

i) s에 대한 진리조건이 s에 대한 의미론으로 기능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T-문장이 ii) s가 곧 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죠. 예를 들어

"Schnee ist schwarz" is true (in G) iff snow is black

이 T-문장을 통해 "Schnee ist schwarz"라는 문장을 우리가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장이 (일반적으로) 참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요.

이 부분은 해석자가 발화자와의 공통된 배경지식과 반응성향에 기초하여 발화자가 그러한 발화를 하게 된 이유를 최대한 정합적으로 해석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컨대 비가 오지 않는 날 발화자가 물총에 맞고 "es regnet"하고 발화한다면, (독일어를 모르는) 해석자는 주위 맥락과 배경지식을 고려하여 이것이 "it is raining"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죠. 동시에 (실제로는 비가 오지 않으므로) 이 발화가 틀린 믿음이라고 여전히 생각하면서요. @YOUN 님이 "우리에게 참"에서 주목하시는게 이 지점이 아닌가 싶어요.

1개의 좋아요

스레드가 더 달렸군요...

(i)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이 제 생각인데요, 자비로운 해석이 '상대의 말 모두를 참이라고 가정한다' 원리로 여겨질 경우 그 어떤 진술도 거짓 진술로 판명해서는 안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데이빗슨이 '요트'와 '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상대의 '욜' 이론이 나의 '요트' 이론에 상당하리라는 기대가 요구된다는 것이어야지, 그가 말하는 '욜' 진술이 전부 참이리라는 기대가 요구된다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겁니다. 가령, '저기에 욜 범선이 하늘을 둥둥 떠다닌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욜'을 통해 '요트'를 의미한다고 생각할지언정 그가 정상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고는 안 볼 겁니다.

(ii)
바로 (i)의 이유에서,

에는 부분적으로 공감하지만, 나름의 합리적인 간극을 찾을 수는 있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거짓과 무의미의 경계가 모호한 것은 단지 우리가 '저 사람이 '욜'을 통해 '요트'를 의미하는 것일까?'가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식적 모호성의 경우입니다. 그의 의미론에 관한 이론을 우리가 총체적으로 갖는다면, 그의 의미론이 무의미한 것인지 그의 진술이 거짓인지를 판명하는 것은 명확한 일이 될 것입니다.

(iii)
한편,

에 대해서는 이중적 답변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문장 s에 대해 무의미한 의미론을 갖고 있다면, 's가 참이다'라는 그의 믿음은 일종의 무의미한 것을 참으로 믿는 것이면서, 문장에 대한 명제 태도라는 점에서, 이는 데이빗슨에게도 믿음으로 용인 가능합니다. 그러나 s에 상당하는 명제는 없을 테니, 그는 s가 의미하는 바에 관한 믿음 태도를 갖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불합리한 인식 주체에게 '네가 s를 통해 의미하는 바를 잘 파악해 보면, 네 믿음이 무의미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제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4개의 좋아요

지인의 말이기도 한데 제겐 너무나 다가와서 인용해 남겨봅니다. 저는 배움의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 편입니다.
1.그의 제자의 마음으로 배우는 단계
2.그의 친구나 동료가 되어 대화를 해보는 단계
3. 그의 비판자가 되어 바라보는 단계

물론 위에 언급한 세가지 단계는 필요에 의해 나누지만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도 한거 같습니다. 저는 배움이 생길수록 동시에 고집을 부리는 측면과 더 심층적으로 알고싶은 지적욕망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너무나도 수준높은 답을 다들 주셔서 저도 은근슬쩍 끼어보네요 ^^

1개의 좋아요

학부생으로서 수업을 들을 때에 이따금 이러한 부분은 오류가 아니느냐 하는 식의 질문을 하곤 하는데 그런 질문들이 수업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 방해가 되는 질문일까요? 고민해보게 되는 글이네요

1개의 좋아요

일단 논의가 데이빗슨에 대한 맥락에 한정된다고 이해하겠습니다.

i)

이 부분이 저는 이해가 안가는데요. 위에서도 강조했지만, 자비의 원리는 해석(소통) 과정에서의 기본 원리일 뿐 결과적으로 발화자가 (해석자가 보기에) 거짓인 믿음을 발화하였다고 정당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데이빗슨이 강조하는 것은 애초에 발화자의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 문장이 어떤 "의미"와 "대상"에 대한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발화자의 문장을 참으로 간주하고 (accepting as true) 해석에 돌입하지 않는다면 (즉 자비의 원리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해석의 길이 아예 열리지 않으므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해석자는 발화자가 무언가에 대해서 veridical belief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따라서 발화자가 예컨대 "욜"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나와 다르게 사용하고 있거나 혹은 내가 보는 대상과 다른 대상을 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핵심은 "저기에 욜 범선이 하늘을 둥둥 떠나딘다"라는 믿음이 아예 nonsense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미"와 "믿음"이 상호의존적이고, 한 믿음의 참은 다른 믿음들에 의존한다는 데이빗슨의 전체론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한 정합적인 해석도 불가능한 "믿음"을 인정하는 것은 어색해보입니다. 혹은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어적인 것이 아닐 것이고 따라서 믿음도 아니게 됩니다.

ii)

애초에 이러한 의미론이 있다면 자비의 원리가 필요하지 않겠죠. 데이빗슨은 그러한 성공적인 의미론이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해석의 원리로서 자비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고, 따라서 "무의미"를 판정할 수 있는 의미론을 가정하는 것은 자비의 이론보다 훨씬 강한 테제입니다.

iii)

이건 확신은 없지만, 무의미에 대한 검증주의가 가진 내재적 문제와 별개로 데이빗슨은 아마 이러한 검증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겁니다. 실재에 대한 믿음 및 그 진리가 문장의 의미/무의미에 대한 판단에 (다소간) 의존한다는 반실재론적 혐의를 데이빗슨은 경계할 것 같아서요.

4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