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과거에 작성했던 에세이에 대해서 교수님들에게 받은 편지들에 관하여

ㅇㅇ 자랑 맞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랑할거면 이곳이 아니라 다른곳에 올렸을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학문이란 스스로 어떤 글을 작성해가는거지 유명한 학자들과의 대화를 자랑하는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학문은 남들에게 뽑내는거나 인스타 자랑이 아니라 스스로의 성숙을 강화해가는것이니까요.제가 피드백들을 못알아 먹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ㅠㅠㅠ 이것이 제가 이 글을 올리는 요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게 부끄러운 일이지만 저는 어떤 피드백들을 받을때 그것이 긍정적인 피드백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피드백인지 아는 능력이 부족하답니다. 그래서 피드백들은 받았지만 그것이 칭찬이 섞인 훈육인지 아니면 저의 작업이 잘못되어 간다는 정중한 비평인지 구분할 능력이 솔직히 부족하답니다. 그것은 아마도 저의 자아 객관화 능력의 부족이겠죠. 솔직히 이런 말을 하는것 자체가 저의 역량과 능력을 잘 보여주는것이지만 이 피드백들에 대한 여기 분들의 통찰과 생각을 묻고 싶답니다.

ㅠㅠ 미숙해서 죄송합니다.

저의 에세이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저의 에세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비판하고 감정적 위안을 제공하거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데 있어 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저의 에세이는 에피쿠로스의 추론과 과식이나 성적 욕망과 같은 다른 인간의 욕망을 합리화하려는 시도 사이에 유사점을 찾아내며, 합리적 논증만으로는 깊이 뿌리박힌 비합리적인 욕망을 제거하는 데 불충분함을 주장한답니다.

이러한 욕망이 이성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듯이, 인간의 근본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강한 생존 본능에 의해 촉발되며, 이성적 논증만으로는 완화될 수 없다고 저는 주장한압니다. 이러한 생존 본능은 비합리적이지만 강력한 힘이라고 저는 주장하며 이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의 힘을 강조하는 심리학 및 과학 연구를 참조하여 뒷받침됩니다. 저는 교육, 중독, 종교적 맥락에서 비합리적인 욕망의 지속 등의 예들을 바탕으로 지식이나 합리적 설득이 욕망을 제거할 수 있다는 가정을 비판하고 있답니다. 저는 깊이 뿌리박힌 욕망과 행동을 바꾸는 데 있어 합리적 논증의 한계를 조사함으로써, 저는 궁극적으로 에피쿠로스의 논증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적, 본능적 측면을 다루지 못하여 논리적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효과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참고로 이 피드백들은 익명의 콜드 이메일을 통해서 얻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9분중 4분이 답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하네요.ㅠㅠ

"This is a very clear and well-structured argument, and I think you are articulating an objection that Epicurus must meaningfully grapple with. Though to be fair, it's a challenge for any philosophical or psychological program that encourages personal growth and transformation through the rational alteration of desires. I myself have argued, both in scholarly work and in my book for a general audience, that Epicurus does not intend to eliminate all varieties of the fear of death. For the most part, he aims to give people tools, some rational, some practical, for coming to terms with mortality and managing the process of death.

I think you're right to explore suicide as a possible objection to your view that humans have a universal desire to live that they cannot alter through reason alone. Epicurus, in fact, considers suicide deeply irrational (although Lucretius seems to make an exception for the diagnosis of dementia) because he thinks living is quite good under most circumstances. Yet he does seem to think that a wise person will occasionally give their life for a friend, and that is another case in which people override their drive to survive because they value something else more. So the drive to survive is clearly there, and he considers it beneficial, but he also thinks we are occasionally driven to override it. Though, as you might reasonably respond, the reasons one chooses to make such a sacrifice might not be purely rational.

All that to say, I think it's a common misconception, even among scholars, that Epicurus aims to eliminate fear through reason alone. I've attached the two chapters that I wrote on Epicurus on death in my book for a general audience, Living for Pleasure (apologies for the distracting watermarks, but the press does not offer unmarked galleys because, of course, they hope to recoup their investment). I have also attached a far more scholarly article that develops a line of argument that is quite sympathetic to your concerns. The chapter on 'experiencing death' might be the more relevant chapter for your purposes, but I'll attach them all.

Regards,
Emily"
(이것은 매우 명확하고 잘 구성된 주장이며, 내 생각에 당신은 에피쿠로스가 의미 있게 씨름해야 할 반대 의견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것은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개인의 성장과 변화를 장려하는 철학적 또는 심리적 프로그램에 대한 도전입니다. 나는 학술 연구와 일반 청중을 위한 책에서 에피쿠로스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모든 종류를 제거할 의도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의 과정을 관리하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도구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나는 인간이 이성만으로는 변경할 수 없는 보편적인 삶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당신의 견해에 대한 반대의 여지로 당신이 자살을 탐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자살이 매우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비록 루크레티우스는 치매 진단에 대해 예외를 두는 것 같지만). 왜냐하면 그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사는 것이 꽤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명한 사람은 때때로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생존 욕구를 무시하는 또 다른 경우입니다. 그래서 생존하려는 욕구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는 그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도록 강요당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합리적으로 대답할 수 있듯이, 그러한 희생(자살)을 선택하는 이유는 순전히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에피쿠로스가 이성을 통해서만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흔한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일반 청중을 위한 내 책인 Living for Pleasure에 죽음에 관해 에피쿠로스에 관해 쓴 두 장을 첨부했습니다(워터마크가 산만해서 죄송하지만, 출판사는 당연히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워터마크가 없는것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나는 또한 귀하의 우려에 매우 공감하는 일련의 주장을 전개하는 훨씬 더 학술적인 기사를 첨부했습니다. '죽음 체험'에 관한 장이 귀하의 목적에 더 관련성이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첨부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밀리)
"Professor Emily A. Austin: Professor of Philosophy at Wake Forest University, Winston-Salem, NC. Earned her doctorate from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in 2009. Focuses on Ancient Greek theories of complex emotions."
https://philosophy.wfu.edu/people/faculty/emily-austin/
(Emily A. Austin 교수: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세일럼 소재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의 철학 정교수입니다. 2009년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복잡한 감정에 대한 고대 그리스 이론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aaakorea1234/221790601891

Wake Forest University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는 미국대학랭킹(USNews 기준) 27위에에 올라있다.

"Dear ?........
(it's not polite to write a letter without even giving one's name)

re your questions about Epicurus : no doubt the fear of death is based on the instinct for survival that humans share with other animals, and without which they might be long extinct.
But Epicurus does not recommend suicide, of course.
Almost 40 years ago I wrote a short paper on Epicurus' claim that 'Death is Nothing to Us'. it's
Commentary on Mitsis' "Epicurus on Death and the Duration of Life", in: Boston Area Colloquium in Ancient Philosophy 4, 1988, pp. 323-328 - no doubt hard to get in Korea, but I no longer have a file of the text.

The main point is, to put it shortly, that one needs to distinguish between the fear of being dead (e.g. because one might go to hell, be punished for one's crimes, etc.), and the fear of dying, i.e. losing one's life.
Epicurus addresses only the first (when one no longer exists, one can't be suffering), but not the second. And though the instinct for survival is no doubt just that, an instinct and not based on reasons, fearing the loss of one's life is not at all unreasonable so long as one can enjoy life. So no wonder Epicurus' notorious thesis provides no comfort.

Best wishes,

Gisela Striker

Gisela Striker
Walter C. Klein Professor of Philosophy and of the Classics, Emerita
Harvard University

Langenfelder Strasse 71, 22769 Hamburg, Germany"

(에게 ?.......
(이름도 밝히지 않고 편지를 쓰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에피쿠로스에 대한 귀하의 질문에 대해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이 다른 동물과 공유하는 생존 본능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오랫전에 멸종될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자살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거의 40년 전에 나는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에 관해 짧은 논문을 썼습니다. "Epicurus on Death and the Duration of Life", in: Boston Area Colloquium in Ancient Philosophy 4, 1988, pp. 323-328

의심의 여지 없이 한국에서 구하기 힘들지만, 더 이상 저에겐 그 파일이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요점은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예: 지옥에 갈 수 있기 때문에, 범죄로 인해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과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 즉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첫 번째(사후세의 두려움)만 언급하고 두 번째(생명을 잃는것의 두려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존 본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합리적인 이유에 근거한 본능이 아니지만, 에피쿠로스가 볼때 삶을 즐길 수 있는 한 생명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의 악명 높은 논제가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행운을 기원하며"

기셀라 스트라이커)

(그녀는 하버드 대학 의 철학 및 고전학 명예 교수이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철학의 전문가입니다.)

"Hello!

Thank you for your interesting letter about Epicurus on death. Give me a few days to think about how to respond and I'll write you back--.... !

Hello and apologies for this late reply!

First, I think you are absolutely right that clever short arguments such as Epicurus's claim that 'Where we are death is not and where death is we are not' cannot possibly remove the fear of death. And he is just wrong that severe pains are short and all long term pain is mild.

And I think you are absolutely right about two more things--the survival instinct as programmed into living things and the difficulty of giving up pleasures for abstract, theoretical reasons that do not feel immediate. However, the very old and ill often do prefer nonexistence to living longer and long for death as a release. (Not all of them of course-- people are different from one another)

So agreed-- Epicurus gives a weak, unpersuasive argument for not fearing death. But his main motive it seems to me is to remove fear of the afterlife especially Hell, an idea used to frighten people into submission he thinks.

More persuasive are Lucretius's arguments in his Epicurean poem De Rerum Natura. There he makes the following points:

Everything in nature has a limited time span, and we are part of nature.
It's bad to have your life cut short when you are young and have not experienced all the pleasures of the world, including having children of your own.
When you are very old and have lived ( as you should) a full and fearless life, you should not try to cling to life and overstay your time at the feast. This is futile and embarassing.
It is dignified as an very old person to make way for future generations- to 'hand on the torch of life'as in a relay race.

All this is much better quality of argument, I think-- and maybe you will agree?

With best regards, and thanks again for writing,
Catherine Wilson"
안녕하세요. 늦게 답장한것에 사과드립니다!

첫번째로 저는 "죽음이 존재할때는 우리가 없으며 죽음이 있을때는 우리가 없다는"같은 에피쿠로스의 현명하면서 짧은 주장으론 죽음의 공포를 없애게 할수없다는 당신의 주장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두가지 더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데요.--생명체들안에 프로그램된 생존 본능과 즉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기쁨을 포기하는 것의 어려움에 관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아주 늙고 병든 사람들은 종종 비존재를 더오래 사는것보다 선호하며 죽음을 해방으로써 갈망하기도 합니다.(물론 전부는 아닙니다.--사람들은 서로 서로와 다르니까요.)

그러니 동의합니다.--에피쿠로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논증은 약하고 설득력 없습니다.그러나 저에게는 그의 주된 목적은 사후세계의 두려움 특히 지옥의 두려움 같이 사람들을 굴복 시키는것으로 생각되는것을 없애는것으로 보입니다.

훨신 설득력 있는것은 루크레티우스의 에피쿠로스 시 De Rerum Natura에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제시합니다.

자연에 있는 모든것들은 제한된 시간 범위를 가졌다. 그리고 우리도 자연의 일부이니

당신이 젊었을때 죽게되어 아이를 가지는것을 포함한 모든 세상의 쾌락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인생이 단명하는것은 나쁜것이로다.

당신이 매우 늙었고 충만하고 후회없는 삶을 살았을때 (당신이 해야하는대로) 당신은 삶에 매달리려서 하면 안되며 잔치에서 시간을 너무 끌어서도 안된다.

이것은 부질없고 창피한 일이니

아주 늙은 사람으로서 미래 세대들을 위하여 길을 비겨주는것은 릴레이 경주에서 삶의 햇불을 건너주는것 처럼 위엄있는 일이로다.

저는 이 모든것이 훨신 나은 논쟁의 질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아마도 당신도 동의하셨나요?

안부 전합니다. 다시 한번 편지 적어주어서 감사드립니다.

캐서린 윌슨( Catherine Warren Wilson FRSC (born 28 March 1951)[1] is a British/American/Canadian philosopher. She was formerly Anniversary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York and from 2009 to 2012 the Regius Professor of Moral Philosophy at the University of Aberdeen. She is known for her interdisciplinary studies of visuality, moral psychology and aesthetics, and especially early microscopy and Epicurean atomism and materialism.She was Anniversary Professor of Philosophy at the University of York (2012–2018). Before that, she was Regius Professor of Moral Philosophy at the University of Aberdeen (2009–2012).[2] Wilson is a Fellow of the Royal Society of Canada and a former president of Mind Association of Great Britain.)(캐서린 워렌 윌슨 (1951년 3월 28일생)은 영국/미국/캐나다 철학자이며 그녀는 이전에 요크 대학의 명예 교수였으며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애버딘 대학의 도덕철학 흠정강좌 교수였습니다. 그녀는 심상, 도덕 심리학과 미학, 특히 에피쿠로스 원자론과 유물론에 대한 학제간 연구로 유명합니다. 윌슨은 캐나다 왕립학회의 회원이자 전 영국 정신학회 회장입니다.)

"Dear Friend,

  Thanks for sharing your thoughts on Epicurus, the fear of death, and suicide.  In reply, we may begin by observing that Epicurus does not argue that we should be careless about preserving our lives; on the contrary, sensible precautions are perfectly reasonable.  He considers rather that many people have deep anxieties about what may happen to them after they are dead, and he tries to convince them that this is an idle worry, since death is the complete extinction of all awareness.

  The problem with such anxiety is that it distracts us from the pleasures of this life.  This is so much the case that Lucretius, a committed Epicurean, affirms that some people have committed suicide precisely out of a fear of death, which they didn’t understand.  Carrying such a fear, for example of hell or punishment in the afterlife, can make our actual life miserable, to the point that we might even want to end it.



  So this is a philosophy that affirms life, and its pleasures.  As long as life is pleasurable, we wish to prolong it, and rightly so.  The fear of what will happen to us after we die has the negative consequence of poisoning the pleasures in this life.



  I hope that these remarks are helpful.



        Best wishes, David Konstan"

(친애하는 친구에게,

   에피쿠로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자살에 대한 생각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에피쿠로스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부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관찰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심한 자기 보호 조치는 완벽하게 합리적입니다. 그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깊은 불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죽음은 모든 의식의 완전한 소멸이기 때문에 이것이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납득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한 불안의 문제는 그것이 우리를 이생의 즐거움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헌신적인 에피쿠로스주의자인 루크레티우스(Lucretius)는 일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살했다고 단언한 사례가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옥이나 내세의 형벌에 대한 그러한 두려움을 품는 것은 우리의 실제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심지어 끝내고 싶을 정도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삶과 그 즐거움을 긍정하는 철학입니다. 인생이 즐거운 한, 우리는 인생을 연장하고 싶어하며, 당연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은 이생의 즐거움을 중독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 의견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행운을 빕니다, 데이비드 콘스탄이)

콘스탄은 고전학자이자 헬레니즘 연구자입니다. 현재 뉴욕 대학에 재직중입니다.

이 편지들에 대한 여러분들의 고견이 궁금합니다.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남겨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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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에피쿠로스에 대해 아는 바가 적어서 내용을 평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편지의 내용들보다도, 작성자님의 행동력과 답장을 보내주신 교수님들의 성실성이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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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 안녕하세요! 먼저 제 글에 관심 가져주시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세이의 내용과는 별개로 저의 어떤 면에서 무모한 행동을 좋게 평가해주어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번에 처음으로 이런 에세이를 작성해 보았는데, 제 글의 학문적 수준이나 깊이에 대해 자신이 없어요. 교수님들께서 보내주신 피드백들이 단순히 예의상의 격려인지, 아니면 제 논지가 어느 정도 학술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신 것인지 궁금하네요.

사실 저는 학문적 깊이나 완성도에 대해 확신이 없거든요. 혹시 학부생 또는 심지어 고등학생 정도 수준에 그치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youn님의 눈에는 제가 받은 교수님들의 코멘트들이 어떤것 같으신가요? 전문 학술 연구가의 관점에서 살펴본 소견을 들려주신다면 앞으로 저의 부족한 글을 개선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니다.

물론 교수님들께서 바쁘신 와중에도 성심껏 답변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지만, 한편으로는 제 에세이의 질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궁금합니다. 이 글을 보시고 youn님께서는 제가 받은 피드백들이 제 주장의 학술적 완성도나 설득력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보시는지 의견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 자체가 아직 부족함이 많음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그래도 궁금하고 또 걱정이 되네요.ㅠㅠㅠ

질문의 방향이 잘못 설정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해당 교수들이 답변한 것은 sew 님의 "논변 혹은 비판"에 대한 "답변"을 한 것이지 sew 님이 쓴 에세이의 "질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영어 해석에 어려움이 있어 보이지는 않으니, 교수들이 제시한 논변이 설득력이 있는지 아닌지 sew님 스스로 판단하면 됩니다. 저명한 에피쿠로스 연구자들이라고 해도 이들의 주장이 항상 옳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질문의 방향이 잘못 설정되어 있다고 말씀드린 것은, 애초에 이메일을 보낸 의도가 교수들이 어떤 "논변"을 통해 답변할 것인지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내가 쓴 에세이의 질을 이들이 좋게 평가할지 아니면 평범하다고 평가할지를 궁금해한다는 인상을 받아서 입니다. 저는 이것이 학문적 교류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sew님의 논변이 교수들을 설득시켰는지, 혹은 거꾸로 교수들의 논변을 통해서 sew님이 설득되었는지, 설득되지 않았다면 어떤 반대 논변을 가지고 있는지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학술적 완성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논변을 가지고 있는 글이 바로 완성도 있는 글이 됩니다.

따라서 질문에 대한 노골적인 답을 드리자면, 해당 교수들은 대체적으로 sew 님의 비판에 설득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주장을 오해했고, 따라서 miss the point 라는 답변들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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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씀을!!!

"어떤 "논변"을 통해 답변할 것인지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내가 쓴 에세이의 질을 이들이 좋게 평가할지 아니면 평범하다고 평가할지를 궁금해한다는 인상을 받아서 입니다. 저는 이것이 학문적 교류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에 백퍼센트 동의합니다!!! 학술적 대화의 근본이죠! 근데 설득이 안된건 당연하답니다 왜냐하면 에피쿠로스 지지자분들에게 보냈습니까요.
제가 그분들을 설득하면 박사학위를 지금 당장 따겠죠..

여기서 제가 궁금해한것이 지적하신 학술적으로 안중요한게 맞습니다...
네 솔직히 말하자면 저 유치한 사람이 맞습니다.....

선생님의 학술적이고 가치있는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근데 그건 중요했습니다

1.저의 전제인 비합리적인 생존 본능이 죽음 공포의 근원인건 동의한다
2.그러나 비합리적인 본능들이 합리적 논증으로 없이진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3.에피쿠로스식 죽음 해결은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좋으니 다이어트가 합리적임을 설득하며 이것이 다이어트의 만능법이라고 주장하는" 다이어트 광고지 수준의 주장이다.

이 전제들에 대부분 동의하신걸로 보입니다

이건 중요한 성과이긴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전제가 공격당하는걸 가장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근데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에피쿠로스의 주장이 그게 아니라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했는데요. 저에게는 희소식이었습니다. 저의 비판 대상은 사실 에피쿠로스의 정밀한 이해(사후세계의 공포의 제거)가 아니라 그런 "오독된" 에피쿠로스 주장을 사용하는 다른 분들이었기 때문이랍니다. 셸리 케이건이나 스티브 케이브가 실제로 그 오독한 (사후세계의 공포의 제거를 죽음 그자체의 공포의 제거) 에피쿠로스 논증을 쓰시는데 저의 목적은 그분들을 반박하는것이었습니다

" I know--that there are people who have overcome their fear of death, and this is due, in part, to their thinking the matters through carefully and logically. "

실제로 셸리 케이건은 합리적 숙고를 통해서 죽음 공포를 "극복한" 사람이 있다고 진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수의 에피쿠로스 학자들이 거부하는 논제이죠.

즉 저의 입장에서 에피쿠로스 입장이 제가 비판한것과 다르다는건 제에겐 호재입니다. 왜냐하면 스티브 케이브와 셜리 케이건 같은 학자들의 에피쿠로스 이해를 역으로 반박하는것이니까요.

그러니 결국 저의 글은 에피쿠로스 논증이 아닌 "죽음의 공포는 비합리적이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죽음을 수용할수 있다는" 셸리 케이건과 스티븐 케이브가 이해한 에피쿠로스 견해에 대한 비판인 셈이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406452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407052

제가 이것을 비판한건 약간 심리적? 동기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셸리 케이건이나 스티븐 케이브의 주장이 정말 많은 분들이 사용해요. 지금 생각나는것만 해도 성서학자 바트어만 심리학자 마이클 셔머 뇌과학자 샘해리스 등등 아주 많답니다. 사실 저는 그런 주장들에 희의적이기 때문에 늘 반박을 하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이런글을 작성해서 편지들을 보내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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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메일을 읽었을 때 제가 받은 인상은:

  1. 사람들이 많이 얘기하는 반박을 @sew 님이 언급했고, 그 뜻은 @sew 님이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
  2. 교수님은 이 반박에 대해서 본인의 reply가 있다.
  3. 이제 이 반박에 reply를 알았으니, 계속해서 반박해나갈 것인지는 @sew 님에 달려있다.

라고 해석이 됩니다.

제 생각엔 조금은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sew 님의 위치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제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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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