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도덕 형이상학 정초』 - 서문

머리말(21-29)

이성적 인식은 ‘질료적 인식’과 ‘형식적 인식’으로 나눠진다. 전자는 어떤 객체에 대한 인식이고, 후자는 객체와 상관 없이 지성과 이성 자체의 형식 그리고 사유 일반의 보편적 규칙만 다룬다. 그리고 질료적 인식을 다루는 학문은 그 대상이 관계하는 법칙에 따라 각각 자연학과 윤리학으로 분류되고, 형식적 인식을 추구하는 학문(철학)이 논리학이다.

이 분류에 따르면 논리학은 정의상 경험적인 측면을 포함하지 않으나, 나머지 둘을 다루는 철학은 경험적인 부분을 내포한다. 경험적인 부분을 포함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철학은 경험철학과 순수철학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나아가, 순수 형식적이자 순수철학인 논리학이 지성의 특정 대상에 국한되는 경우, 그것을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형이상학이 자연학과 윤리학의 경험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이성적인 부분만을 다룰 때, 각각 자연 형이상학과 도덕 형이상학이라 부른다.

이처럼 학문을 위해 요구되는 방식을 분류하여 학문을 수행하는 것은 실로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든 영역에 탁월할 수 없기에, 각자가 잘할 수 있는 부분에 충실하면 된다. 그런데 경험적인 학문(자연학과 윤리학)에 앞서 순수 형식적인 형이상학(자연 형이상학과 도덕 형이상학)을 앞서 수행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특히, 도덕 형이상학의 경우 실천적 윤리학(인간학)에 앞서 수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법칙이 도덕적으로, 즉 구속성의 근거로 타당하려면, 누구나 그 법칙이 절대적 필연성을 지녀야함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24). 달리 말해, 도덕 법칙의 구속성은 ‘인간 본성’이나 ‘상황’에 근거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즉 인간에 관한 인식의 도움을 조금도 받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에게 선천적인 법칙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위와 같은 선천적인 법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통한 예리한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 적용되는지 알아내야 하고, 또 그것이 인간 의지에 작용하여 의지가 실제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이다.)

어쨌든, 순수하고 진정한 도덕 법칙은 형이상학 이외에 어디서도 찾아질 수 없고, 행위의 도덕성은 그 행위가 도덕 법칙에 합치할 뿐만 아니라 도덕 법칙 자체 때문에 일어나야 할 때 보장되기에, 도덕 형이상학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고, 먼저 탐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경험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을 섞을 경우는 도덕철학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도 없다.

예컨대 볼프의 ‘일반 실천 철학’을 염두에 두고, 위의 논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볼프의 것은 “의욕 작용 일반을 고려하면서 일반적 의미의 의욕 작용에 속하는 모든 활동과 조건”에 대해 논했을 뿐, ‘순수한 의지의 이념과 원리’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전혀 형이상학적 작업을 수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논한 것들은 대부분 심리학에서 논의되는 것이기에, 그가 말하는 도덕성의 구속성 따위는 전혀 도덕적일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통해 수행하려는 도덕 형이상학 작업은 여전히 해야 할 것으로 요구된다.

위와 같은 생각에 따라 도덕 형이상학을 저술하고자 하는데, 이에 앞서 ‘정초’ 작업을 하려 한다. 사실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정초 작업은 순수실천이성 비판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순수실천이성 비판은 순수사변이성 비판(순수이성비판)에 비해 대단히 필요한 것이 아니다. 동시에, 순수실천이성 비판은 실천이성과 사변 이성의 통일을 하나의 공동 원리에 의존해서 제시해야 하는데, 지금 단계에서 이를 행하면 독자가 혼란에 빠지기에 수행 불가능하다. 나아가, 도덕 형이상학은 대중성도 있고 평범한 지성도 이해할 수 있기에, 이 정초 작업을 지금 이 책에서 하려는 것이다.

이 정초 작업의 목표는 다른 도덕적 탐구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도덕성의 최상 원리를 찾아내고 확립’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적절한 방식은 ‘평범한 인식’에서 시작하여 ‘이 인식의 최상 원리를 규정하기 위해 분석’하고, 다시 돌아와 최상 원리를 검토하고 또 원리들의 원천에서 시작해 실제 사용되는 평범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종합적 방법이다. 이런 이유로 저술의 목차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1. 도덕에 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의 이행

  2. 대중적 도덕철학에서 도덕 형이상학으로 이행

  3. 도덕 형이상학에서 순수실천이성 비판으로 가는 최종적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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