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갑작스런 두려움, 그녀의 이유없는 변덕, 그녀의 본능적인 불안, 그녀의 까닭모를 대담함, 그녀의 허세, 그녀의 섬세하고도 부러운 감수성, 그것은 분명 여자였다. <사라진느>, 발자크
바르트는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하지만 역으로 다시 대답한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 이유로 글쓰기는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파괴라고 한다. 글쓰기는 주체가 도주해 버렸다.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해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피사체와는 반대되는 이미지이다. 여기서 그는 "주체의 부재와 그 전복적인 양상을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 하나의 시선이 현실에 직접 작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 자동사적인 목적으로 이야기되기만 하면, 상징 실천만을 한다면, 이런 분리가 나타난다.
- 목소리는 기원을 상실, 저자는 죽음으로, 그리고 글쓰기가 시작된다.
이런 현상에 대한 감정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 민속학적인 사회 : "천재성"의 찬미가 아닌 "언어 수행"을 찬미하는 매개자, 샤먼 그리고 낭송장가 담당
- 중세 이후 : 영국의 "경험주의", 프랑스의 "합리주의", 종교 개혁의 "개인적 신앙"과 함께 <인격(personne humaine)>의 발견 후에 생산된 현대적인 인물, 그것이 저자
이를 통해 바르트는 저자에 중요성을 부여한 것이 실증주의라는 전개를 한다. 그러면서 문학가들 사이에서 저자의 인간(personne) 과 작품을 연결시키려는 의식이 지배적이라 하며, 문학의 이미지는 저자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바르트가 든 비평의 경우, 보들레르의 작품은 인간 보들레르의 실패, 고흐의 작품은 그의 광기,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은 그의 악덕이라고 예시를 든다.
작품의 설명은 언제나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 쪽에서 모색되어 왔다.
작품의 설명 속에서, 이는 마치 유일하고도 동일한 사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저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바르트는 저자의 제국이라 말한다. 견고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제국에 도전하는 붕괴 시도를 예시로 든다.
-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의 모든 시학은 글쓰기를 위해 저자를 제거하는 데에 있다. 오직 언어만이 작업하고 수행하는 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 발레리(Paul Valéry) 는 자아의 심리학으로 말라르메의 이론을 약화시키긴 했지만, 고전주의적 취향에 의해 수사학의 가르침을 준수, 그러면서 저자를 의문시 및 조롱, 문학의 본질적인 언술적 조건을 위해 투쟁.
- 푸르스트(Marcel Proust) 는 작가와 작중인물의 관계를 정교한 수법으로 가차없이 뒤섞어 놓는 일에 몰두하였다. 화자를 글을 쓰려고 하는 자로 만들었다.
그는 현대성의 선사시대라 할 초현실주의에 국한시켜본다. 하지만 이것도 분명 언어에 최상의 자리를 부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언어는 체계 하지만 이 운동의 목표는 약호의 직접적인 전복이기 때문이다. 약호는 파괴될 수 없고 유희만 가능하다. 하지만 초현실주의는 기대된 의미의 좌절을 권유하고, 머리가 의식 못한 것을 빨리 쓰게 하는 임무를 맡겼다. 또한 다인의 글쓰기 체험과 원칙을 인정하여 저자의 이미지를 탈신성화하는데 공헌했다.
언어학에서는 언술행위 전체가 인간에 의해 채워지지 않고서 기능하는 하나의 텅 빈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이는 곧 저자의 파괴를 위한 도구를 제공한다.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나가 나라고 말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다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인간이 아닌 주어를 알 뿐이다.
저자와의 거리두기, 이는 역사적 사실, 글쓰기의 행위 그리고 현대적인 글쓰기까지 완전히 변모시킨다.
시간 상에서 우리가 저자의 존재를 믿으면, 저자는 항상 저자의 책의 관거로 간조되었다. 책과 저자가 동일선상에 전과 후로 위치한다. 저자는 책을 부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된다. 반대로 현대적인 필사자(scripteur) - 그 자신의 텍스트를 결코 초월할 수 없는 언술행위 안에서만 자신을 소모하는 자, 자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난다. 선행도 없고, 초과도 없다. 책이 술어가 되고 자신이 주어가 되지 않는다.
텍스트(Texte)가 유일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의 나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고 반박하는 다차원 공간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문화 속에서 나온 인용들의 직조이다. 근원적이기 보다 흉내냄, 모방이다. 유일한 권한은 글쓰기를 뒤섞든, 대립하게 하든, 어느 하나에도 의존하지 않게 하는 것에 있다.
자신의 표현, 번역하고 싶은 내적인 것은 이미 자신에게 내재된 만들어진 사전이다. 사넞에서 낱말은 다른 낱말로 설명되며, 이는 무한하다.
저자가 멀어지면, 텍스트의 해독은 전적으로 쓸모없어 진다. 텍스트에 저자를 부여한다는 것은 최종적 기의(signifié)를 제공, 글쓰기의 봉쇄이다. 비평에는 걸맞는 것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비평은 작품 아래에서 저자를 발견하고자 하며 이것이 완수되면 텍스트는 설명되고 비평은 승리한다.
저자의 통치는 곧 비평의 통치였다.
이런 비평이 이제 저자와 더불어 붕괴되어 가고 있다. 글쓰기의 복수태(pluriel)안에서 모든 것은 풀어 나가야(démêler)하는 것, 해독되야(déchiffrer)할 것은 없다. 글쓰기의 공간은 답사이며 관통하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가 의미를 증발시키면, 글쓰기 의미를 비워 나간다면, 문학은 텍스트에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하고 혁명적인 활동을 분출시킨다.
그리고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 글쓰기로 이루어지고 이 장소는 저자가 아닌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