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철,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제9장 요약(完)

제9장 물체적 실체

쿠튀라는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1686년 『형이상학 논고』의 출간 이후 역사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반역사주의적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최근 연구자들은 이러한 해석에 반하여 라이프니츠의 체계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변해왔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으며, 그 변화는 대표적으로 물체적 실체 개념 속에서 포착될 수 있다.

1. 다섯 가지 실재물(entity): 1703년에 드 볼더(De Volder)에게 보내는 편지

1703년 라이프니츠는 드 볼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승인하는 실재물의 목록을 다섯 가지로 제시한다. 이는 (1) 근원적 엔텔레키(영혼) (2) 일차 질료(수동적 힘) (3) 모나드 (4) 이차 질료 (5) 물체적 실체이다.

먼저 엔텔레키와 일차 질료는 독립되어 존재할 수 없는 불완전한 실재물이며 모나드의 구성 요소에 불과한 반면, 모나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완전한 실재물이다.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빌면, 모나드는 영혼과 일차 질료에 의해 “완전해진다”. 이 모나드가 무수히 많이 모여서 “유기적 기계”인 이차 질료가 구성되며, 이 이차 질료와 지배 모나드가 결합된 것이 바로 물체적 실체이다.

물체적 실체 개념의 변화에 대해 다루기 위해서는 그와 연관된 개념들인 ‘개체적 실체’와 ‘모나드’의 의미상의 차이, 또 ‘실체적 형상’의 의미 변화 역시 밝혀야 한다.

1) 개체적 실체와 모나드

『형이상학 논고』에 의하면, 개체적 실체란 완전 개체 개념을 갖는 존재자이다. 하이데거 등 개체적 실체를 모나드와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피샹에 의하면 양자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즉 각 개념이 갖는 외연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각각이 수행하는 역할에 있어서 다르다. 먼저 ‘개체적 실체’는 알렉산더, 카이사르 등등의 인간 개체들을 가리키는 반면, ‘모나드’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지각하는 존재들을 모두 포괄하여 가리킨다. 개체적 실체 개념은 인간만이 영혼을 갖는 정신적 존재라고 보고 동물이나 식물 등 다른 생명체들은 순전히 물질적인 기계로 간주하는 데카르트 철학과 궤를 같이한다. 반면 모나드 개념은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존재자들이 확장되고 다양해졌다는 점을 시사한다.

개체적 실체에서 모나드로의 이행은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이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더 단순해졌음을 예증한다. 『형이상학 논고』에서는 개체적 실체 외에도, 물질에 부가되어 단일성을 부여하는 원리인 실체적 형상 또한 기본적인 실재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모나드론』의 존재론에서는 개체적 실체와 실체적 형상의 두 범주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범주, 모나드만이 인정된다.

그런데 모나드는 기능적으로 개체적 실체가 아니라 실체적 형상을 대체한다. 라이프니츠 존재론의 발전 속에서 개체적 실체는 사라지고, 실체적 형상이 아닌 모나드가 물질에 단일성을 부여하는 원리, 그것도 단 하나의 원리가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물체적 실체를 다룸에 있어서 ‘개체적 실체’는 사용하지 않고 ‘실체적 형상’ 혹은 ‘모나드’만을 사용하도록 한다. 그러나 물체적 실체를 다루기에 앞서 ‘실체적 형상’(la forme substantielle), ‘엔텔레키’(l’Entelechie), ‘영혼’(l’Ame), ‘단순 실체’(la substance simple), ‘모나드’(la Monade)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

2) 실체적 형상, 엔텔레키, 영혼, 단순 실체, 모나드

‘엔텔레키’는 드 볼더에게 보내는 편지에 따르면 독자적으로는 불완전하며 모나드를 이루는 구성요소이지만, 이 단어는 『모나드론』 등에서 종종 ‘모나드’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실체적 형상’, ‘영혼’, ‘단순 실체’도 마찬가지로 모나드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다소 간의 의미 차이를 내긴 해도, 이 모든 것들이(이 단어의 지칭체들이) 서로 다른 존재론적 범주에 들어갈 만큼 큰 차이가 나는 것들은 아니라고 간주할 수 있다”(박제철, 2013, 227).

실체적 형상이 수행하는 기능을 밝힌다면, 이와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다른 범주들 역시 그 의미를 명확히 할 수 있다. 앞서 말하자면, 모나드를 지칭하는 이 모든 개념들은 모두 목적론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3) 실체적 형상의 역할

『범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술에서 주어 자리에 오는 속성의 담지자인 감각적 개별자를 제일실체로 규정하고, 이 개별자를 규정하는 종을 제이실체로 규정한다. 종이 감각적 개별자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스콜라 철학은 후자를 실체적 형상이라 칭한다. 종은 개별자의 본질 및 개별자가 가질 수 있는 속성들의 유형을 정한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인간이기 때문에 철학자일 수는 있지만 등껍질을 가질 수는 없다.

이뿐만 아니라 실체적 형상은 개별자가 앞으로 어떤 속성들을 갖게 될 것인지 또한 목적론적으로 규정한다. 예컨대 도토리의 실체적 형상은 도토리가 싹을 내고 떡갈나무가 되어 이러저러한 모양의 잎을 틔울 것이라는 정보를 질료에 부여한다. 실체적 형상은 형상을 입은 개별자가 미래에 지닐 속성들과 개별자가 향하는 목적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실체적 형상 및 이와 동등한 개념들은 질료, 정확히는 이차 질료와 결합해서 그에 정보를 줌으로써 물체적 실체를 구성한다. 이 점에서 물체적 실체에 단일성을 부여하는 지배 모나드란 실체적 형상이다.

4) 집적체(물질)

(1) 집적체(물질)의 현상성

라이프니츠는 물체가 그 자체로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다수 모나드들의 복합물이며, 또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어째서 정신 독립적 실재물인 모나드의 집합체가 정신 의존적 현상이 될 수 있는가? 애덤스에 의하면, 그 이유는 모나드-물체 관계가 원소-집합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볼펜은 실재이지만, 볼펜들의 집합은 실재가 아닌 관념이다. 모나드와 모나드들의 집합 역시 같은 이유에서 존재론적으로 서로 다른 지위를 갖는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물의 단일성이 정신 의존적일 때 그 사물은 현상이며, 그 단일성이 정신 독립적일 때 그 사물은 실체이다. 물체 혹은 이차 질료의 자체적 단일성은 한낱 관념적인 데 반해 모나드의 단일성은 정신 독립적이며, 이 점에서 전자는 현상적이고 후자는 실재적이다.

모나드와 물체의 관계는 부분-전체 관계로 이해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2) 집적체의 요소

라이프니츠에게 물체는 무한 분할 가능한 것인 반면, 모나드는 분할될 수 없는 단순한 실체이다. 그런데 분명 물체는 이러한 단순 실체들에 의해 구성된다. 물체가 단순 실체로 구성된다면 어떻게 물체가 무한 분할 가능한가?

라이프니츠는 물체와 모나드의 존재 층위를 아예 변별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물체는 감각적 현상인 반면, 모나드는 지적이며 이론적인 실재물이다. 물체는 모나드의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모나드가 모임으로써 결과하는 현상이다. 즉 모나드가 집적되어서 물체를 산출하는 과정에서 층위는 지적 세계에서 감각적 세계로 옮겨간다. 모나드가 물체를 구성한다는 진술은 이론적 층위에 있는 반면, 물체가 무한 분할 가능하다는 진술은 현상적 층위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물체와 모나드는 전체-부분 관계로 이해될 수 없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나드는 물체의 “내적 요건”이다. 내적 요건은 부분과 달리 전체와 동질적이지 않다. 이는 점이 선을 구성하면서도 선과는 기하학적으로 다르다는 점에 비유될 수 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실재하는 것은 이산적인 양(모나드들)뿐이며, 연속량(무한 분할 가능한 물체)은 관념적인 것이다.

이제까지 모나드와 이차 물질에 대해 살펴봤다면, 이제부터는 물체적 실체에 대해 논의할 차례이다.

2. 물체적 실체

물체적 실체 개념은 아르노와의 논쟁 속에서 변화하게 된다. 먼저 라이프니츠는 1686년 아르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물체를 실체이게끔 만들어주는 것이 실체적 형상이며, 물체와 실체적 형상의 결합이 물체적 실체라고 말한다.

1) 아르노와의 논쟁: 실체적 형상과 실체적 형상들/전체적 단일성과 요소적 단일성

라이프니츠의 주장에 대해 아르노는 다음처럼 반박한다. (데카르트가 말한 대로) 정신과 물질은 세계를 이루는 상이한 두 가지 종류의 실체이고, 정신의 본질은 사유이며, 물질의 본질은 연장이다. 그런데 물체가 실체이기 위해 연장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인 실체적 형상을 따로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할 수 없으며, 정신이 실체적 형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한 해명해야 한다.

라이프니츠는 물질의 독자적인 실체성을 부정함으로써 답한다. 물질은 그 자체로는 실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물질에게 단일성을 부여하는 실체적 형상이란 바로 영혼이다. 그리고 이처럼 실체적 형상과 물질(몸)이 결합되어 있다면 이는 물체적 실체이다.

물질이 독자적으로는 실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물체적 실체는 물질과 영혼의 결합을 통해 성립한다는 점에서 물질은 영혼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시기에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은 물질과 영혼이라는 이원론적 존재론이다.

그러나 이후에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로만 이루어진 일원론적 존재론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 선회는 아르노의 다음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대리석이 갖는 실체적 형상이 그 대리석이 하나가 되게 해줍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이 대리석을 두 개로 쪼개서 하나의 존재이기를 멈췄을 때, 그 실체적 형상은 어떻게 됩니까?”(Le Roy, 145, 박제철, 2013, 242에서 재인용) 라이프니츠는 대리석이 실체가 아니라 다수의 실체들로 이루어진 집적체이며, 이러한 집적체에 단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영혼(=실체적 형상)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뒤, 라이프니츠는 물질의 실체성이 영혼에 의해 부가된다는 견해를 바꾸어, 물체의 실체성이 그 물체를 구성하는 실체들로부터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물체에게 단일성을 부여하는 원리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실체적 형상들이다. 수정된 견해에 따르면, “[…] 사물들은 자신들을 구성하는 진정한 단일성이 있는 만큼의 실재성 혹은 실체성을 갖는다”(Le Roy, 165, 박제철, 2013, 244에서 재인용). 피샹의 표현을 빌리면, 실체적 형상이 이전까지는 “위에서”부터 물체들에게 단일성을 부여했다면, 이제는 “밑에서” 혹은 “여러 요소들로부터” 단일성을 부여한다.

한편 이론적 입장의 선회 중에서도 이전의 입장과 유사한 부분이 남아 있다. 물체를 구성하는 다수의 실체적 형상들 즉 모나드들은 위계를 이루며, 물체는 이 위계 중 최상위에 위치하는 모나드가 다른 실체적 형상들을 지배함으로써 물체적 실체가 된다. “물체적 실체를 구성하는 요소들 […] 물체와 실체적 형상, 이 둘의 존재론적 차이는 없어졌지만 […] 이 둘 사이의 위계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박제철, 2013, 246)

3. 중간 결론

위에서 살펴보았든 물체적 실체의 구조는 변화 이전에는 실체적 형상과 물질의 결합으로 (이원론적으로) 이해되었으나, 변화 이후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모나드들에 의한 구성체로 (일원론적으로) 이해된다.

4. 예정 조화설

이제 지배 모나드와 나머지 모나드들의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지배 모나드는 어떻게 나머지 모나드들에 단일성을 부여하는가? 양자의 결합 문제는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인 심신 문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데카르트는 몸과 영혼이 직접적으로 인과관계를 맺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는 양자가 어떻게 인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한편 말브랑슈 등은 신체적 사건과 정신적 사건의 실제 원인이 모두 신이며, 신체적 사건은 정신적 사건의 기회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그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관계를 인과적 소통의 문제로 이해해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양자의 결합 문제를 인과관계의 문제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정신적 사건의 원인은 정신적인 것이며, 신체적 사건의 원인은 신체적인 것이다. 그러면 양자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라이프니츠는 이를 인과관계가 아닌 표현관계, 즉 양자가 갖는 각 속성들의 대응 관계로 본다. 모나드의 지각상태가 세계의 상태에 대한 표현인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영혼의 상태는 신체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영혼의 상태와 신체의 상태가 이렇게 대응할 수 있는 이유는 예정조화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정신과 물질 사이에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일을 거부하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편, 말브랑슈의 기회원인론은 일종의 미적인 이유로 거부한다. 즉 예정조화설을 받아들이면 신은 매 사건마다 개입하지 않아도 되고, 세계 역시 최대한의 통일성을 가지고 구성되어 작동한다.

예정조화설에 의하면, 모나드가 모나드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양자 사이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배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들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신이 그렇게 예정해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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