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키와 의미에 관해서- "히틀러"의 의미

크립키의 언급에 관한 이론은 알겠는데...그래서 "히틀러"와 같은 이름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소통 사슬로 구성원들간에 전해지는 그 형이상학적 무언가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걸까요? 카플란이 지적하는 게 이 점이 맞는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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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닉슨', '괴델', '히틀러' 같은 고유명사의 의미는, 그 고유명사의 지시체입니다. "형이상학적 무언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굳이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다고 봐요. 사실, 어떤 의미에서 크립키는 굉장히 상식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거라서요.

가령, 우리가 어떤 사람을 '히틀러'라는 이름으로 명명하였다면, 설령 그 사람이 화가를 지망하지 않고, 나치당에 입당하지 않고, 콧수염을 기르지 않고, 독재자가 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은 여전히 '히틀러'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런 세계에서는 "히틀러는 화가를 지망하지 않았다."라거나 "히틀러는 콧수염이 없다."라는 주장이 참이 되겠죠.

반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철수'라는 이름으로 명명하였다면, 설령 그 사람이 화가를 지망하고, 나치당에 입당하고, 콧수염을 기르고, 독재자가 되었더라도, 그 사람은 여전히 '철수'라는 거죠. 이 가능세계에서 철수가 히틀러의 삶의 궤적을 그대로 밟았다고 하더라도, 철수는 여전히 철수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세계의 히틀러와 아주 똑닮은 사람일 뿐, 히틀러는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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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프레게의 Bedeutung에 관한 주장 그대로군요.

음... 프레게와 비교하면 좀 곤란하긴 해요. 프레게의 철학에서 '지시체(Bedeutung)'는 '참'과 '거짓'이라는 정말 "형이상학적 무언가"인데, 크립키는 그런 종류의 지시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서요. 프레게의 지시체 개념과는 달리, 크립키는 고유명사나 자연종 명사가 아주 일상적인 개체들을 지시한다고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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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거짓이 지시대상이라는 주장은 문장에만 적용되지 않나요?

크립키를 읽으실 때는 프레게의 도식 자체를 생각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크립키는 프레게와 무관하게 자신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서요. 참/거짓이 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일종의 지시 대상이라는 생각은 프레게만의 고유한 입장이에요. 프레게를 제외하면, 참/거짓을 지시체로 상정하는 철학자는 아무도 없다고 해도 좋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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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프레게와의 비교가 조심스러워야 하는 이유는, 프레게의 Bedeutung은 그것이 주어지는 방식(mode of presentation)으로서의 Sinn과 쌍으로 논의되기 때문입니다. 즉 프레게에 따르면 고유명이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경우, 이 고유명은 Bedeutung 뿐만 아니라 Sinn 역시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히틀러"라는 이름이 특정 인물을 지시하여 Bedeutung을 가진다면, 질문자님의 질문처럼 "히틀러"의 Sinn이 뭐냐? 라는 질문이 발생합니다. 크립키의 목적은 바로 이 (러셀-)프레게주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즉 고유명의 경우 Sinn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애초에 질문자 님의 질문 " '히틀러' 의 의미가 무엇이냐?"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히틀러"는 Sinn의 매개 없이, 명명을 통해 지시된 (그리고 인과적 사슬을 통해 전해진) 바로 그 사람을 지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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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어떤 ‘지적’을 염두에 두시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직접 지시 이론과 프레게적 이론이 ‘표상 방식’에 관해 갖는 태도 차이를 이해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프레게적 이론에서 Sinn이라고 불리는, 표현의 표상 방식은 그 자체로 표현의 의미를 구성합니다. 프레게의 정확한 의도는 그의 논문에서 확인하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제가 프레게에 정통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는데요), 프레게적 이론이 카르납에 의해 발전된 내포-외연 이론의 형태로 재구성될 때, 표현의 외연인 지시체(Bedeutung)는 표상 방식인 내포, 또는 Sinn으로부터 의미론적으로 결정됩니다. 즉 이름의 의미는 Sinn이고, 이름의 지시체는 그 Sinn을 만족하는 바로 그 대상입니다.

반면 직접 지시 이론가들은 단칭어의 의미가 그 내포라는 데에 반대합니다. (이는 크립키의 양상 반론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단칭어의 의미는 그 외연 자체일 뿐입니다. (명제에 관해 크립키가 러셀적 관점을 취한다는 게 이 이야기입니다.) 다만 표상 방식이 여기에서 아무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고, 단칭어가 최초로 지칭되는 순간의 표상 방식이 그 단칭어의 지시체를 결정합니다. 가령, “샛별”이 바로 그 천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침에] 저기 뜬 저 별’을 “샛별”로 일컬었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나 프레게의 경우와 달리, 여기에서의 결정 관계는 일종의 인과적 관계입니다.

문제는 지시사(demonstratives)가 또한 일종의 단칭어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지시사가 문제인 것은, 가령 “나”, “여기”와 같은 표현이 맥락에 따라 다른 지시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단칭어가 외연적 의미만을 (양상적 의미에서) 고정적으로 갖는다는 크립키적 이론의 반례가 되는 것인가? 카플란은 이에 대해 단칭어의 특성(character)과 내용(content)의 구분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모든 “나”의 사례들은 동일한 유형적 특성을 갖지만, 그 내용은 발화 맥락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시는 고정적입니다. 여기에서의 “맥락에 따라 달라짐”은 평가 세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아닌, 그것과는 다른 어떤 차원에서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카플란의 이론은 일종의 이차원적 의미론이 됩니다. 지시사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에는 두가지 양상이 고려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평가 세계가, 다른 한편으로는 발화 맥락이 고려되고 있으니까요. 발화 맥락이 고정되어 있다면, 평가 세계가 바뀌어도 “나”의 지시체는 바뀌지 않습니다. 반면 발화 맥락이 변이한다면, 평가 세계가 고정되어도 “나”의 지시체는 서로 다를 것입니다.

한편 내포-외연 이론에 따르면 내포는 형이상학적 양상, 즉 평가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카플란의 이론은 단칭어의 내포가 항상적(constant)이라는 관점을 보존합니다. 이 관점이 크립키의 이론에서 핵심이기에, 카플란의 이론은 크립키의 이론에 대한 배격이 아닌 그 보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카플란 논문의 서문(Preface)을 잘 읽어보시면 이 점이 더 잘 이해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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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닉네임이 카르납이시군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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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