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므로 나는 존재하는가?

생각하는 나를 통해 나의 존재를 입증하려면 다음과 같은 이중적 사태가 존속해야 할것으로 보인다.

나의 나(‘나’와 동일한 존재자로서의), 존재의 존재, 생각의 생각

‘나는’ 이라는 주어가 동일한 나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존재를 계속하여 같은 선상에서 포착할 수 있는 존재의 존재가 존재하는지 이중, 삼중으로 의문점은 계속 이어진다. 또한 생각함을 생각할 수 있는지 까지 말이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는 문법적으로 나마 위의 물음들을 해결해줄 가능성을 보여준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생각하고 있다면 나, 존재 그리고 생각이 각각의 층위에서 이중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사실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는 한번에 하나씩 하기 때문이다. ‘ㄴ’을 생각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불가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우리 의식에 관해서만 타당한 일인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ㄴ을 생각하며 ㄱ을 같이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면,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는 우리가 사유를 위해 구해야 할 기초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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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프로필 사진으로 하이데거의 사진을 사용하고 계셔서, 이런 글을 올리신 것이 다소 의외입니다. 적어도 하이데거라면,

라는 주장에 반대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19-21절과 「형이상학의 극복」 4절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와 그 명제에 기반한 존재론을 비판합니다.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비판점은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즉,

(1) 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존재론은 결코 실체에 대한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2) 이런 존재론은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가 어떻게 서로 완전히 다른데도 모두 '실체'라고 불릴 수 있는지를 해명하지 못한다.
(3) 이런 존재론은 자연을 인간의 부품처럼 지배하고자 하는 오늘날 기술문명을 야기하였다.

물론, 작성자 님이 반드시 하이데거의 데카르트 비판을 수긍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이데거에 관심이 있으시면서 데카르트의 명제에도 관심이 있으시다면 『존재와 시간』 19-21절과 「형이상학의 극복」을 공부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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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잡한 글에 유익한 코멘트를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본 명제의 전제부를 나는 생각한다 라고 하지 않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라고 명시해둔 이유가 사유를 의식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체상의 이유로는 나는 생각한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사태를 희구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한다."라는 동사를 "생각하고 있다."라는 현재 진행형으로 바꾼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가령,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우리 두뇌에 전기 자극을 주어 만들어 낸 일종의 '매트릭스'가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데카르트식의 의식철학에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라고 단언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런 회의주의의 문제로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애초에, 데카르트 본인부터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만 나는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작성자 님의 주장이 데카르트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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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이데거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말씀하신대로 일면 데카르트주의자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