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분야를 제대로 공부해본 적도 배워본 적도 딱히 없어서 어렵네요 ㅠ 맞게 서술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적 부탁드립니다.
감각 소여 이론(37-52)
1. 전통적 경험론
인식론적 경험론에 의하면 경험은 세계에 대한 지식의 궁극적인 원천으로, 믿음을 정당화한다. 이런 점에서 경험론은 토대론의 한 축을 담당한다. 경험론자에 따르면 경험은 지식을 제공하는데, 그 지식은 ‘주관적 세계’에 국한된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경험론은 데카르트적 견해를 수용하며 믿음의 정당성에 관한 물음에 답변한다.
전통적 경험론은 현대에 와서 ‘감각 소여 이론’으로 대변된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마음-독립적 사물을 ‘직접’ 지각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각 소여 이론가들에 따르면 우리가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그러한 물리적 대상들이 아닌 감각 소여이다. 우리의 의식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심적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현상됨, 즉 심적 대상들의 현상됨 또는 현상된 감각 소여가 바로 그것의 실재이다.
감각 소여 이론의 근거 중 하나는 지각의 상대성이다. 우리는 관점에 따라 동일한 물체를 다르게 본다. ‘대상 자체’는 변화하지 않으나 ‘현상하는 바’가 다른 상황이 지각의 상대성을 보여준다. 예컨대, 흰 컵은 조명에 따라 노랗게도 파랗게도 보일 수 있다. 이 경우, 실재와 현상은 구분된다. 그러나 감각 소여가 조명에 따라 변화할 수는 없다. 경험의 변화에 따라 노란 감각 소여가 주어졌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파란 감각 소여가 생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변화하는 경험의 측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감각 소여에 호소하는 것은 유용하다.
동일한 물리 대상에 대해 여러 현상이 존재할 때, 어느 현상을 실제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앞선 예시에 따르면 흰 컵이 실제 모습이다. 하지만 흰 컵 또한 ‘직접적 지각의 대상’이 아닌 ‘추론에 따른 대상’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의 경험에 ‘엄밀하게’ 주어진 대상은 일상적인 물리 대상이 아닌 변화, 생성, 소멸하는 감각 소여이다. 우리의 일상적 세계관은 이러한 감각 소여의 세계를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결국, 감각 소여 이론에 따르면 X가 자신의 경험에 호소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 믿음은 ‘일상적 지각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제한된다.
2. 감각 소여 이론의 문제점
첫째, 감각 소여 이론은 과도한 실재론이다. 감각 소여 이론에 따르면 감각 소여는 그것이 현상되는 바를 바로 그것의 실재로 본다. 즉 현상과 실재의 구분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감각 소여를 한 번 알게 되면 그것의 모든 것을 알게 되고, 결국 감각 소여에 대해서 완벽한 지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이전보다 더 잘 알게 되는 것이 가능한 것 같다.
둘째, 감각 소여 이론은 배중률을 위반한다. 감각 소여 이론에 따르면 현상과 실재는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가 멀리 있는 물체를 볼 경우, 우리 경험에 주어진 감각 소여는 원형도 각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감각 소여 이론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x에 대해 ‘그것은 원형도 각진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셈인데, 이는 배중률을 위반한다.
셋째, 감각 소여 이론은 구분 불가능성과 동일성의 구분을 유지할 수 없다. 노란 색종이 A, B, C가 있고, A와 B는 구분되지 않으며 B와 C도 구분되지 않으나 A와 C는 구분이 된다고 가정하자. 감각 소여 이론을 받아들일 경우, 그것 각각의 감각 소여 A′와 B′의 색은 구분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B′와 C′의 색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A′와 C′의 색은 구분된다. 그런데 감각 소여 이론에 따르면 현상되는 바가 실재이므로 A′와 B′의 색이 구분되지 않고 또 그것이 C′의 색과 구분되지 않는다면 A′와 C′의 색은 구분되지 않아야만 한다. 이는 모순이다.
넷째, 감각 소여 이론은 경험의 투명성을 설명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외적 물리 대상을 볼 때, 그 대상과 우리 사이의 접점 역할을 하는 대상이 없다고 가정한다. 이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감각 소여 이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증이 존재한다. 이는 ‘착시 논증’에 기반한다. 착시 논증 지지자는 우리에게 투명하게 드러나는 존재자는 감각 소여와 같은 심적 대상으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P1. 그 막대기는 휘어져 보인다.
P2. 휘어진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
P3. 그것은 (실제로) 막대기가 아니다.
P4. 휘어진 것은 감각 소여이다(감각으로 소여된 것은 휘어진 것이다).
C. 일반적으로 우리의 지각에 주어진 대상은 감각 소여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반박이 가능하다. 하나는 ‘X로 보이는 것이 있다’에서 ‘X가 존재한다’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 비판이고, 또 하나는 착시의 경우를 인정하더라도 결론부에서 이뤄진 일반화는 불가능하다는 비판이다.
착시 논증의 일반화에 대한 비판은 ‘최대 공약 논제’ 비판과 궤를 같이한다. 착시 논증에 따르면 환각과 참인 지각은 구분할 수 없다. 예컨대 내가 책상 위의 노란 컵을 볼 때, 환각에 걸려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나는 책상 위의 노란 컵의 존재를 알 수 없게 된다. 즉, 착시 논증은 ‘주관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경험들(i.e. 착시, 환각)의 인식론적 함의는 그중에서 가장 열등한 경험의 인식론적 함의를 초과할 수 없다’를 뜻하는 최대 공약 논제를 미리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환각 상태에서 보는 대상이 어떠한 감각 소여라고 해도 왜 참인 지각의 경우에도 동일한 감각 소여를 가져야만 하는가? 즉, 최대 공약 논제의 타당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맥도웰은 바로 이 최대 공약 논제를 공격함으로써 외적 세계에 대한 회의주의를 빠져나가려고 시도한다. 이 시도의 특징은 데카르트적 견해를 받아들인 다음 회의주의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데카르트적 견해를 차단한다는 점이다.
3. 명제적 소여
‘주관적으로 동일한 두 경험의 인식론적 기여는 동일하다’라고 주장하는 ‘동등성 원리’는 앞서 살펴본 최대 공약 논제와 유사한 점을 갖고 있다. 동등성 원리에 따르면 실제로 노란 컵을 보는 경험과 환각 상태에서 노란 컵을 보는 경험 모두의 경우에서 ‘내면적으로’, 혹은 ‘경험 주체에게’ 현상하는 바는 동일하다. 그렇기에, 실제로 노란 컵을 보는 경험이 노란 컵이 있다는 믿음을 정당화해준다면, 환각 상태에서 노란 컵을 보는 경험 또한 동일한 믿음을 정당하게 가질 수 있다.
동등성 원리와 최대 공약 논제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후자와 달리 전자는 데카르트적 견해를 함축하지 않는다. 물론 동등성 원리는 경험의 현상적, 주관적 성질의 인식론적 의미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주관주의-데카르트적이지만, 경험의 인식론적 기여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즉, 지식의 토대가 주관적 세계에 있다는 데카르트적 견해에 대한 반론을 수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험이 경험 주체가 가지고 있는 사고 및 세계관과 독립적으로 소여를 가진다’라며 경험의 인식적 독립성을 주장하더라도 데카르트적 견해를 따를 필요는 없다. 그 소여가 반드시 주관적 세계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데카르트적 견해를 따르지 않고도 경험론을 주장하는 경우들이 있었지만, 전통적 경험론이라 할 수 있는 감각 소여 이론은 ‘명제적 소여’라는 가정을 둠으로써 데카르트적 견해로 귀착됐다. 명제적 소여 이론이란 ‘경험의 인식적 기여는 항상 특정 명제 P에 대한 정당화를 제공한다’를 의미한다. 명제적 소여를 가정할 경우, 착시의 경우에는 실제의 경험과 달리 외적 명제 P를 소여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경험이 명제적 소여를 지닌다면 외적 대상에 관한 명제는 배제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데카르트적 견해와 궤를 같이하게 된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견해를 계승하는 전통적 경험론(감각 소여 이론)에 ‘경험의 소여에 내적 대상에 대한 명제가 문제없이 포함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감각 소여가 상대적이지 않다고 하여 우리가 경험에 대한 직접적 인식을 얻을 수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경험의 주관적 성질이 감각 소여로부터 기인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것과 관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감각 소여 이론가들 말마따나 경험이 객관 세계의 대상에 대한 직접적 의식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주관적 세계에 대한 직접적 의식을 제공하는지 또한 의문이라는 말이다. 결국, 한마디로 전통적 경험론이 갖는 문제의 핵심은 ‘명제적 소여’라는 가정에 있다. 이러한 비판은 ‘최대 공약 논제’를 지적하는 맥도웰의 비판과 다른 효과를 지닌다. 물론 맥도웰의 비판도 유의미하다. 하지만 맥도웰의 비판에 의존하게 되면 비-명제적 소여를 통해 이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포착하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