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철,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제6장 요약

제6장 시간론

라이프니츠와 클라크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클라크는 뉴턴과 같은 절대적 시간론을 주장하는 한편, 라이프니츠는 관계적 시간론을 주장한다. 절대적 시간론에 의하면 시간은 존재론적으로 사물들보다 우선하는 반면, 관계적 시간론에 의하면 시간은 사물들 사이의 일종의 관계로 환원된다. 본 장의 목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보이는 것이다. 첫째, 관계적 시간론은 이론적으로 정당화된다. 둘째, 관계적 시간론은 절대적 시간론보다 존재론적으로 단순하다. 셋째, 관계적 시간론은 시간적 현상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

1. 절대적 시간론과 관계적 시간론

통상적으로 우리는 시간축을 전제한 다음 그에 따라 사물들의 변화를 생각하는데, 이 점에 비추어 보면 사물에 앞서 시간을 전제하는 절대적 시간론은 직관적이고, 시간을 사물들의 관계로부터 구성되는 관념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관계적 시간론은 반직관적인 듯 보인다. 관계적 시간론자인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공간은 공존(coexistence)의 질서이고 시간은 계기(succession)의 질서이며, 절대적 시간론은 모순적이다.

2. 절대적 시간론을 부정하기 위한 라이프니츠의 논변: 충분이유율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건에 이유가 있다는 원리, 특히 신의 행위에 이유가 있다는 점에 근거해 절대적 시간론을 부정하고자 한다. 그의 반론은 다음처럼 진행된다. 만일 사물들 이전에 시간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세계는 신에 의해 어느 한 시점에서 창조되었다. 그런데 신은 세계를 그보다 앞선 시점에서 창조할 수도 있었다. 앞선 시점에서 창조될 수 있었던 세계와 뒤의 시점에 따라 실제로 창조된 세계는 아무런 차이도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이 세계 창조의 특정 시점을 선택한 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는 충분이유율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시간은 사물들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논변은 충분이유율을 받아들이는 클라크에게는 결정적인 논변이다. 그러나 충분이유율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이 논변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충분이유율에 근거하지 않은 채 관계적 시간론을 옹호할 전략을 모색한다.

3. 라이프니츠의 존재론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개체와 그 속성뿐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개체로 환원될 수 있다. 만일 시간이 꼭 필요한 범주가 아니라 개체와 속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라면, 존재론에 굳이 시간을 도입해야 할 이유는 없어지며, 존재론적 단순성에 의해 관계적 시간론을 옹호할 수 있다.

4. 시계란 무엇인가?

시계란 무엇인가? 절대적 시간론(그리고 우리의 직관)에 따르면, 시계는 시간을 재는 기계이다. 이 답에는 시간이 먼저 존재하며 시계가 그 측정 장치로서 후행한다는 생각에 의한 것이다. 반면 시계가 꼭 이렇게 정의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라이프니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받아들여 시간이 (지구의 공전과 같은 주기적) 운동의 수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계란 주기적 운동을 발생시키는 장치이다.

5. 시계 만들기

시계를 만든다고 할 때, 시계가 발생시키는 운동은 반복적이어야 한다. 예컨대 강물의 흐름은 반복되지 않는 운동인 까닭에 시계로 부적합한 반면, 심장 박동은 반복되는 까닭에 시계로서 적합하다. 혹자는 이때 심장이 빠르게 뛰기도 하고 느리게 뛰기도 하는 까닭에 심장 박동이 시계로 부적절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 ‘빠르다’와 ‘느리다’ 같은 개념은 이미 시계를 기준으로 해서야 의미를 지니는 까닭에, “심장이 빠르게 뛴다”거나 “심장이 느리게 뛴다”와 같은 진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심장보다 진자를 시계로 삼기를 선호하는데, 이는 우리의 편의 때문이다. 진자는 비례 사건 부류(equivalent class)에 속하고 심장은 비-비례 사건 부류(non-equivalent class)에 해당하는데, 비례 사건 부류에 속하는 사물의 주기적 운동은 다른 사물들의 주기적 운동에 정확히 대응하는 반면, 비-비례 사건 부류에 속하는 사물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노래 한 곡이 재생되는 동안 진자는 꼭 200번 움직이는 반면, 심장은 그동안 100번 뛸 수도 있고 120번 뛸 수도 있다. 그러나 비-비례 사건 부류의 사물들을 시계로 삼는다고 해서 시간의 성립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시계를 시간을 재는 시계가 아니라 주기적 운동 발생 장치로 정의한다면,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사물 및 그와 관계 맺는 사물들 외에 시간이라는 존재자를 상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사물의 주기적 운동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6. 주기성과 시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박이 제기될 수도 있다. 시간이 없다면 애초에 사물이 발생시키는 동종의 두 운동을 구별하고 순서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운동은 시점의 상이성에 의해 변별되고 순서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주기적 운동에 시간이 선행해야 한다.

그러나 시점의 상이성에 호소함으로써 운동에 순서를 부여하는 일은 인식론적 난점에 맞닥뜨리며, 라이프니츠의 시간론은 시점을 도입하지 않고서 각 운동의 순서를 설명할 수 있다.

절대적 시간론에 의하면 두 시점 t1과 t2는 서로 다르며, 양자의 차이가 반복되는 두 운동의 차이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t1과 t2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두 시점은 그 속성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지니지 않지만 수적으로 다르다고 가정될 뿐이며, 양자의 차이를 보증하는 원리는 이 이상 제시되지 않는다. 속성상 아무런 차이도 지니지 않으면서도 아무 이유 없이 수적으로 다른 두 존재자가 있다는 주장은 대단히 문제적이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내 왼쪽 팔과 속성상 전혀 변별되지 않으면서도 그냥 수적으로 다른 제3의 팔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문제에 맞닥뜨리지 않고 두 운동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반복되는 두 운동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내 다른 모든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양자의 차이 역시 각각이 다른 사물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예컨대 진자의 첫 번째 흔들림에서 거북이가 앞발을 땅에서 뗐지만 두 번째 흔들림에서 거북이가 앞발을 땅에 붙였다면, 각 운동은 그 점에서 변별될 수 있다. “[…] 두 운동을 수적으로 분화시켜주는 원리는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이다.”(박제철, 2013, 145)

한편 한 운동이 다른 운동에 앞선다는 점, 즉 양자의 시간적 순서는 비시간적 순서로 환원됨으로써 설명된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선행하는 사물은 단순하고, 불완전하고, 후행하는 것의 이유를 포함한다. 반면 후행하는 사물은 복잡하고, 완전하고, 그 이유는 선행하는 것에 포함된다. 단순/복잡, 불완전/완전 등의 이러한 기준들에 의해 사물들은 논리적 계열 속에 놓여 있는데, 사물의 운동은 이 계열을 순서로 해서 일어난다. 결국 시간은 논리적 순서에 의해 환원된다.

7. 결론

절대적 시간론에 대한 반박 및 관계적 시간론 옹호 논변은 요컨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절대적 시간론은 세계의 창조 시점과 관련해서 충분이유율을 위배한다. 설령 충분이유율을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하더라도, 시간은 주기적 운동의 수로 환원될 수 있다. 결국 존재론에 사물들 외에 시간을 추가적으로 도입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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