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적 견해(21-36)
1. 주관적 토대
‘세계에 대한 인식, 앎, 지식’이 성립되기 위한 전통적인 필요조건은 ‘우리의 믿음이 참 또는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다. 정당성이 요구되는 이유는 참인 믿음이라 할지라도 적절한 근거가 없다면 진정한 앎이라고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지식이 어떤 주체에게 부여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찾는 시도에는 크게 두 방식이 있다.
토대론은 기초 믿음을 기반으로 다른 믿음들이 그 정당성을 획득하는 피라미드 구조를 취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토대론은 ‘우리의 어떤 믿음도 정당하지 않다’라는 회의주의를 부정하기 위해 인식 정당성 퇴행에 기초한다. 즉, 다양한 토대론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토대론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다른 믿음들에 정당성을 의존하지 않는 기초 믿음을 전제한다.
정합론은 믿음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서로를 지탱해주고 이러한 믿음들의 관계가 믿음의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뗏목 구조를 취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개별 믿음의 어떤 성질이 그것의 정당성을 결정하지 않고, 어떤 체계가 정당성의 원천이며 개별 믿음은 그 체계에 속함으로서 정당성을 얻는다. 이렇게 토대론과 정합론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초적 믿음을 전제하느냐 아니냐에서 드러난다.
토대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의 핵심인 기초 믿음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획득되나?’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대응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 스스로 정당성을 가지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믿음이 아닌 다른 상태로부터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식’이다. 1장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방식은 전자이고, 이를 옹호하는 대표 학자가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를 통해 기초 믿음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초 믿음을 획득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라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환각 등에 의해 우리의 인식이 정당성을 잃어버리는 가능 세계를 고려하여 끝없이 회의를 시도한다. ‘나는 인식적으로 정상적인 상황에 있다’라는 가정조차도 정당성을 요구하기에 이에 대해서도 인식론적 퇴행이 요구된다. 데카르트는 이 과정 끝에 ‘나는 생각한다’라는 나의 내적 세계에 대한 믿음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 즉, 그는 ‘사고 주체로서의 나 혹은 마음’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반면 심적 태도와 독립된 존재로 여겨지는 심적 태도의 대상들의 존재는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결국, 데카르트가 명료하게 인식하는 대상은 자신의 정신적 활동에 의존하는 대상들로 국한되고, 존재를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존재는 인상이나 관념과 같은 주관적 대상들이다. 쉽게 말해,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내 마음 안의 대상들’이고, 지식의 토대는 ‘주관적 세계’에 있다.
위와 같은 데카르트적 견해에 대해서 두 가지 비판이 가능하다. 첫째는 ‘나는 노랑을 보고 있다’라는 명제가 의심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성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는 심리적 태도인 의심 불가능성과 객관적 참을 보장해주는 인식론적 성질인 확실성을 혼동했다. 둘째는 내가 노란 컵을 보고 있다고 해서 ‘나는 노란색을 보고 있다’라는 명제가 자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기껏 우리에게 자명한 것은 ‘노란색이 보여진다’이다. 즉, 데카르트는 ‘나’와 같은 지각 주체인 자아가 지각의 내용에 포함된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갖고 있음에도 많은 후대 철학자는 여전히 주관적 토대와 데카르트적 견해를 받아들인다. ‘나’라는 실체가 직접적 인식 대상은 아니지만, 적어도 ‘노란색이 보여진다’라는 현상 자체는 경험 주체에게 자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어지는 것들을 ‘감각 소여’라고 부르며, 현대의 감각 소여 이론은 경험을 통해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내적, 심적 대상들에 국한된다는 데카르트적 견해를 계승한다.
2. 형이상학적 이원론
데카르트는 자신의 견해에 기반하여 마음은 그 존재를 확실히 알 수 있으나, 몸은 나의 의식에 직접 주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일 대상은 모든 속성을 공유한다’라는 라이프니츠의 법칙을 적용하면, 마음과 몸은 별개의 실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마음은 몸과 전혀 다른 비물리적 실체이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에 대해서 심리 상태를 보고하는 문장의 특수한 의미론적 특성으로 인해 ‘의심할 수 없다는 속성’에는 라이프니츠의 법칙이 적용될 수 없어 타당하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반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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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요카스타와 결혼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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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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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요카스타와 자신의 어머니는 동일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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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요카스타는 자신의 어머니다.
다른 방식의 반박도 가능하다.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심적 인과의 문제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반박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반박이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몰락하게 만든 결정적 원인이다. 이 반박을 가한 자들은 이원론자들에게 심적 인과를 부정하는 부수현상론과 같은 입장을 받아들이기를 강제했다. 이에 대해서 부수현상론이 과잉결정의 문제를 범할 위험이 있다며 재반박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모든 행동에 대한 충분한 물리적 원인이 있지만 추가적으로 심적인 원인이 있다고 보면, 우리의 행동은 과잉결정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우리의 마음이 행동을 유발하는 모든 경우가 과잉결정인지 의심스럽다는 대응에 적절한 설명을 제공해야만 한다.
이상의 문제들로 인해 유물론자들에 의한 이원론 극복이 시도됐다. ‘경험적 상태는 외적 세계에 의존한다’라고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선언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에 따르면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외적 대상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며, 이런 관계 맺음이 심성의 핵심이다. 마음은 세계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은 내부의 고립된 영역에서 발생하는 사건들로 구성된다’라고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형이상학적 선언주의는 대립한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선언주의는 지각 경험과 환각 경험 사이에 어떠한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직관을 설명해야 할 부담을 안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어찌 됐든,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타당성이 공격받는다고 해서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견해도 버려야 할 필요는 없다. 앞선 것은 형이상학적 주제이고 후자는 인식론적 주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는 하다. 이에 대해서는 3장에서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