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독학러인데 칸트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이런 멋진 커뮤니티를 발견하게 되어서 너무 기쁩니다.ㅎㅎ
나이들어 우연한 계기로 난독증이 치료되어, 책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요,
철학..무척 재밌고 사랑습니다. ㅎㅎ 한 10년전에 난독증이 사라졌으면, 철학과에 들어갔을텐데,
너무 아쉽습니다.

여튼 제가 에티카 흄을 마무리하고 칸트를 진입하기 위해서, 칸트 2차저작물을 보고 있습니다.
헌데 책내용중
사물이 단순 물질의 연장이냐, 활력이라는 운동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냐에 대해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를 들어 증명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제가 이해하기론 칸트는 활력은 계산 불가능하며, 외적요인의 인과성에 의한 관계가 아닌
우연적이며 자유로운 본성을 즉 내적요인으로 표시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다 어떤분께 질문을 드리니 저부분은 칸트가 단자론을 연구한 시절에 나온 내용들이라 하시더군요.
그런데 이글을 문득 보니, 칸트가 이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사고관 자체를 이때 이미 형성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을 공부한지 얼마 안되 식견도 짧고 모르는 것 투성이라,
저 부분에서 느낀 비약적 발견의 어떤 인과성을 찾기가 무척힘드네요 ㅎㅎ
혹시 시간이 되시는 선배님이 계신다면,
저 단자론 연구당시 이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사고관 자체를 완전치 못하더라도 구성하였다.라는
점이 맞다 아니다..설명 해주신다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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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단 "활력"에 대한 칸트의 전비판기 입장과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제가 보기에 크게 관련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질문자께서 어떤 지점을 눈여겨 보고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인지를 잘 모르겠네요. 서술하신 "활력" 개념은 칸트 본인 역시 1750년대 이후 사실상 사용하지 않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의 활력 개념에 대한 전비판기-칸트의 서술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잠재력을 본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입니다.

  2.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칸트가 언제부터 사유했는가의 문제는 칸트 연구에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표준적 해석으로는, 비판기적 입장이 최초로 뚜렷하게 개진된 1770년 저작 《감성계와 지성계의 형식과 원리들 De mundi sensibilis atque intelligibilis forma et principiis》 부터라고 말해집니다. 물론 이 저작과 1781년 저작인 순수이성비판 사이에도 내용적으로 많은 차이와 발전이 있습니다.

  3. 조금 다른 맥락에서, 칸트는 전 생애에 걸쳐서 라이프니츠의 철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전비판기의 경우 예컨대 뉴턴의 자연과학적 체계와 라이프니츠-볼프의 형이상학적 체계 사이를 매개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고, 말씀하신 "활력" 개념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기 이후에도 그렇습니다. Eberhard 라는 당대의 진성 라이프니츠 지지자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주장한 것은 사실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것의 반복이거나 열화판이라는 요지로 칸트를 공격하자, 1790년에 쓴 이에 대한 응답에서 순수이성비판이 어떻게 라이프니츠의 정신을 간직하면서도 이를 넘어서고 있는지를 서술합니다. 여기에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야말로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진정한 변론이다 (die eigentliche Apologie für Leibniz) 라고 묘사합니다. 물론 이러한 수사가 얼마나 진정성이 있느냐는 것이 칸트연구에서는 또한 논란의 대상이지만 (예컨대 라이프니츠 광신도 앞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레토릭일 수도 있으니깐요), 적어도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전비판기 뿐만 아니라 비판기 이후에도 칸트의 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질문자께서 활력 개념에 대한 전비판기 칸트의 서술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향기를 느꼈다면,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주저리주저리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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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ㅎㅎ

(저는 철학 입문자입니다.) 뜬금없지만 흄의 2차저작물은 어떤 것을 보셨는지요? 참고할 만한 좋은 입문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