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철,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제5장 요약

제5장 개체의 구조

개체적 실체 혹은 모나드의 구조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개체가 기체와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기체 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개체가 속성들로만 구성된다는 다발 이론이다. 각 이론은 그 자체로는 단순하지만, 그 논쟁은 진리론, 개체의 지속이나 통세계적 동일성 등과 같은 여러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있다. 따라서 개체의 구조에 관한 문제는 라이프니츠의 다른 철학적 입장들을 동시에 고려함으로써 탐구되어야 한다.

1. 기체 이론과 다발 이론

기체 이론적 해석과 다발 이론적 해석을 대표하는 각 해석자들은 러셀(B. Russell)과 요스트(R. Yost)이다. 라이프니츠는 여러 술어들이 인식되는 단일한 주체를 언급하거나 주체와 속성을 구별하는데, 러셀은 이러한 구절들을 근거로 개체가 상태들의 담지자인 실체라고 주장한다. 한편 요스트는 개체가 지각들의 흔적 혹은 표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언급, 실체에는 지각 및 지각의 변화들만이 존재한다는 구절들을 들어 개체가 속성들의 다발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논쟁은 문헌적 전거를 제시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각 전거들이 상이한 해석의 가능성을 충분히 지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쟁은 체계 내적 정합성을 기준으로 함으로써, 즉 라이프니츠의 다른 철학적 입장들에 비추어봤을 때 기체 개념이 필요한지, 이 개념이 다른 입장들과 충돌하지는 않는지를 검토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한다.

2. 기체의 역할

기체 이론은 적어도 네 가지 철학적 이유에서 도입된다. 첫째, 기체는 다수 개체들 사이의 수적 차이를 설명한다. 둘째, 기체는 개체의 지속을 담보한다. 셋째, 기체는 개체의 통세계적 동일성을 가능케 한다. 넷째, 기체는 속성들의 담지자이다.

1) 개체들의 수적 차이를 내는 원리로서의 기체

완벽하게 동일한 속성을 갖는 두 명의 쌍둥이가 존재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쌍둥이는 각각이 지니는 속성에 의해서는 서로 구별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 다른 개체이다. 그러므로 속성은 개체를 수적으로 구별하기에 충분한 기준이 아니다. 기체 이론은 이때 속성 상으로 완전히 동일한 두 개체를 구별해주는 원리가 바로 기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각 쌍둥이는 완벽하게 같은 속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체를 지니는 까닭에 서로 다른 개체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구별 불가능자 동일성의 원리를 제시하며 이러한 가정 자체를 거부한다. 그는 속성들이 완벽하게 동일한 두 개의 개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두 개의 개체가 존재한다면 이들은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니며, 완전히 동일한 속성을 갖는 개체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개체이다. 그러므로 개체들의 수적 차이와 관련해서 라이프니츠에게는 기체 개념을 도입할 이유가 없다.

2) 개체의 지속을 확보해주는 원리로서의 기체

개체는 시간과 변화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한 채 지속한다. 개체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 속성들을 갖거나 갖지 않는 듯 보인다. 예컨대 동일한 사람이 어제는 용감했다가 오늘은 심경의 변화로 인해 겁쟁이가 될 수도 있다. 만일 개체가 속성의 총합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어제의 용감했던 사람과 오늘의 겁 많은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그릇된 결론에 다다른다. 그러므로 기체 이론은 양자의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체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체 이론에 의하면, 변화란 기체에 이러저러한 속성들이 추가되거나 제거되는 일이며, 기체 자체는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존재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변화 중의 개체의 지속 역시 개체가 갖는 속성들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어제 용감했던 사람이 오늘 겁쟁이가 됐다면, 용감함과 겁 많음이라는 속성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람에게 귀속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동일한 사람에서 일어나는 심경의 변화는 용감함-속성과 겁 많음-속성의 순서 관계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라이프니츠가 개체의 지속을 설명하기 위해 기체 개념을 도입해야 할 이유는 없다.

3) 개체의 가능세계적 동일성을 확보해주는 원리로서의 기체

통상적으로 생각했을 때, 하나의 개체는 다르게 존재할 수도 있을 가능성을 지닌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은 현실세계에서 물리학자이지만, 생물학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자인 가능세계 w₁와 달리 아인슈타인이 생물학자인 가능세계 w₁가 존재한다. 이때 w₁의 아인슈타인과 w₂의 아인슈타인은 동일한가? 기체 개념을 도입하면 이러한 여러 가능세계 속에서 개체의 동일성을 설명할 수 있다. 기체를 도입한다면, 개체의 동일성을 구성하는 것은 기체이며, 개체의 현실적 및 가능적 속성들은 이 기체에 우연적으로 귀속된다. 따라서 아인슈타인-기체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하며, 여기에 물리학자임과 생물학자임이라는 속성들이 귀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통세계적 동일성을 부정한다. 그는 참인 모든 명제에서 술어가 주어에 포함되어 있다는 진리 이론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가령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이다”가 참이라면 물리학자임은 이미 아인슈타인의 개체적 동일성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 요소를 하나라도 결여한다면 그 개체는 자기동일성을 상실한다. 따라서 w₁의 아인슈타인은 w₂의 아인슈타인과 다른 개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라이프니츠는 개체의 가능세계적 동일성을 거부하는 까닭에, 그러한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체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4) 속성들의 담지자로서의 기체

『신인간지성론』에서는 기체의 이론적인 중요성을 인정하는 구절이 발견된다. 전거상으로 봤을 때 라이프니츠는 기체의 이론적 역할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런데 정작 기체가 수행하는 통상의 이론적 기능인 개체의 수적 차이, 시간적 지속, 통세계적 동일성은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딱히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적어도 기체 이론은 라이프니츠의 다른 이론적 입장들과 양립 가능한가?

5) 참인 문장에서 주어의 지칭체로서의 기체

기체 이론에 의하면, 기체와 속성들의 관계는 주어와 술어들의 관계와 같다. 주어가 술어들의 담지자이듯 기체는 속성들의 담지자이며, 기체는 언어 속에서 주어의 지칭체이다. 한편 다발 이론가들이 보기에 주어가 지칭하는 것은 기체가 아니라 속성들의 다발이다. 기체 이론가들은 다발 이론에 대해 다음의 비판을 제시한다. 주어가 속성들의 다발이라면, 그러한 다발을 주어로 갖는 모든 문장은 분석판단이어야 한다. 예컨대 다발 이론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이다”에서 ‘아인슈타인’ 개념은 이미 ‘물리학자임’을 포함하는 다발인 까닭에 전자를 분석함으로써 후자를 추론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이다”는 아인슈타인의 개념만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종합판단이다. 그러므로 다발 이론은 문제적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의 진리 이론에 따르면 참인 모든 명제의 주어는 술어 개념을 이미 그 안에 포함한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이다”와 같은 판단 역시 분석판단이다. 따라서 기체 이론가들의 비판은 라이프니츠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체가 주어에 포함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는 기체가 주어에 포함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에 따라 기체 개념이 주어에 포함된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이론에 따라 개체 개념을 다음처럼 집합으로 제시할 수 있다.

S = {P₁, P₂, …}

주어와 술어를 갖는 “S는 P₁이다”라는 판단은 다음처럼 표현된다.

P₁ ∈ {P₁, P₂, …}

이제 개체 개념 ‘S’가 기체 개념 ‘s’를 포함한다고 하자.

S = {s, P₁, P₂, …}

그런데 이때 라이프니츠의 체계에서 ‘s’는 기체 이론가들의 주장대로 논리적 주어일 수 없다. 즉 “S는 P₁이다”와 달리 “s는 P₁이다”는 분석판단이 아니다. 이는 ‘s’가 ‘S’와 달리 자기 내에 속성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s’가 논리적 술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S는 s이다”는 분석적으로 참이기는 하지만, s가 다른 속성들 P₁, P₂ 등과 다른 지위를 지니는 특별한 술어로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s’가 특별한 술어(“기체이다”)로 취급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S는 s이다”는 필연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이다. ‘s’를 “기체이다”로 이해할 경우 저 문장은 “S는 다른 모든 속성들과 독립된 채 정체성을 지니는 기체이다”라는 뜻을 지니며, 이는 참일 수 없는 명제이다.

결국 기체 개념은 완전 개체 개념 속에서 논리적 주어로도, 논리적 술어로도 기능할 수 없다. 나아가 완전 개체 개념과 창조된 개체의 구조는 정확히 일치하는 까닭에, 개체의 개념에서는 물론이고 실제 존재하는 개체에서도 기체는 존립하지 않는다.

물론 개체는 근원적인 (능동적, 수동적) 힘을 지니며, 이 힘은 속성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힘을 기체로 간주할 이유는 없다. 혹자는 라이프니츠가 인정하는 영혼, 일차 질료(물질), 모나드, 이차 질료, 물체적 실체라는 다섯 가지 구별을 들며, 일차 질료가 아리스토텔레스 및 스콜라 철학 이래로 기체로 간주된다는 점을 들어 반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차 질료도 이차 질료도 기체일 수 없다. 라이프니츠는 일차 질료를 모나드가 갖는 수동적 힘으로 이해하며, 이차 질료 역시 기체라기보다는 자기 내에 형상을 지니는, 모나드들의 집적체이다.

3. 결론

기체에 대한 주장은 『신인간지성론』에만 등장할 뿐이며, 그것도 해당 저작은 라이프니츠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저작이 아니라 로크 『인간지성론』에 대한 비판의 형식을 띤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적어도 기체 개념이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중심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저작에서 라이프니츠는 기체 개념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개체 개념에 대한 기체 이론적 해석을 전거의 관점에서 완전히 반박할 수는 없다. 한편 위에서 살펴봤듯이, 라이프니츠가 제시한 다른 철학적 입장들과의 정합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기체 이론적 해석에 효과적인 반론을 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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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기에 라이프니츠의 완전 개체 개념 이론은 고유명에 대한 기술 이론과 유사해 보여요. '아인슈타인'이라는 고유명이 '상대성 이론을 제시한 그 물리학자'와 같이 한정기술어구로 대체될 수 있다는 주장 말이에요. (라이프니츠식으로 바꾸면,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주창함, 물리학자임, … }과 같은 속성들의 집합이 되겠네요.) 크립키 이후로 이런 입장이 크게 비판받은 것으로 아는데, 라이프니츠 전공자이신 박제철 선생님께서 이 문제를 라이프니츠의 관점에서 논평해주셨으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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