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철,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제4장 요약

제4장 진리론

1. 참인 명제에 있어서, 술어가 주어 안에 있다는 원리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든 참인 명제의 술어는 주어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진리란 명제를 구성하는 항들(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이다. 명제의 참을 밝히기 위해서는 개념적 분석을 통해 주어와 술어의 포함 관계를 드러내야 하는데, 이는 바로 선험적 증명이다.

술어가 주어에 내포되어 있는 판단은 칸트에서는 분석판단이다. 칸트에 따르면 분석판단은 선험적인 판단이며, 선험성은 필연성 및 보편성을 그 징표로 하기 때문에, 모든 분석판단은 필연적이다. 개체는 직관을 통해 인식되어야 하는 까닭에, 칸트는 개체에 대한 분석판단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개체에 대한 분석판단이 존재하며, 더구나 우연적인 분석판단이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2. 가능세계, 우연적 명제, 필연적 명제

제2장에서 약술되었듯, 신은 가능한 모든 관념들을 갖고 있으며, 이들 중 특정한 관념들을 선택해서 현실화함으로써 세계를 창조한다. 이때 현실화되는 관념들은 그 결합 및 배제의 관계로 인해 일정한 계열을 이룬다. 즉 한 관념이 현실화되면 반드시 같이 현실화되는 관념이 있으며, 동시에 현실화될 수 없는 관념이 있다. 한편 창조될 수 있었지만 창조되지 않은 관념들의 계열이 여럿 존재하는데, 이 계열들이 바로 가능세계들이다.

이제 필연성과 우연성은 가능세계 개념을 통해 정의된다. 필연적인 명제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며, 우연적인 명제는 적어도 하나의 가능세계에서 참이다. 현대 양상논리에서의 필연성 및 우연성 개념과 맥을 같이하는 이러한 이해는 메이츠 등의 연구자들이 지지하는 해석이다. 반면 애덤스 등에 의하면 라이프니츠는 가능하면서도 모든 가능세계에서 거짓인 명제를 긍정한다. 애덤스는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 유다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그 예시로 든다. 그러나 이 명제가 정말로 가능한 명제인지 역시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예수를 배신한다는 개념은 유다라는 완전 개체 개념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요소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유다는 유다가 아니다”와 마찬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한 명제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총각은 결혼하지 않는 남자이다”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인 반면,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다”는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거짓인 우연적 명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프니츠는 카이사르라는 개념이 루비콘 강을 건넘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주어가 술어를 포함하는 명제가 우연적일 수 있는가?

3. 완전 개체 개념

개념은 다른 요소 개념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삼각형’은 ‘도형’과 ‘세 변을 가짐’이라는 요소 개념의 결합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복합 개념은 종, ‘도형’ 및 ‘세 변을 가짐’은 류에 해당하고, 류에서 종으로 점차 규정이 더해질수록 개념은 보다 복잡해진다. 이러한 과정이 최하위 종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지면, 그 결과로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외연으로 갖는 완전 개체 개념이 산출된다.

4. 완전 개체 개념에 대한 해석

이 완전 개체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먼저 그 중 하나에 따르면, 완전 개체 개념은 각 요소 개념들의 총체에 다름 아니며, 이 요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완전 개체 개념은 그 동일성을 상실하고 파괴된다.

S = P1 & P2 & … & Pn

다시 말해 P1, … Pn 모두 S에 본질적이다. 따라서 가령 루비콘 강을 건넘이라는 개념은 카이사르 개념에 본질적이며, 전자를 포함하지 않는 후자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는 일은 어느 한 순간에만 일어나는 일이며, 그 이전과 이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다”는 특정 시점에서만 참이고 그 이전과 이후에는 거짓인 듯 보인다. 그런데 완전 개체 개념은 요소 개념을 한낱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항구적으로 포함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 개체 개념을 요소 개념들에 의해 정의할 때 시간을 포함시켜야 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에서 시간은 사물들의 순서의 계기에 다름 아니다. 시간은 사물들에 선행하지 않고 사물들의 순서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완전 개체 개념에 시간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그 속성들에 순서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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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된 해석에 의하면, 완전 개체 개념은 순서지어진 속성들의 총체이다. ‘루비콘 강을 건넘’은 ‘카이사르’에 항구적으로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순서지어져 있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나 참일 필요는 없다. 가령 Pn-1이 ‘루비콘 강을 건넘’이라면 Pn-1은 시점 tn에서 참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5. 결론

판단을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구분하고 모든 분석판단이 필연적이라고 보았던 칸트와 달리, 라이프니츠는 참인 모든 판단이 분석판단이라고 보았으며 그 중에서도 우연적인 분석판단과 필연적인 분석판단을 나누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칸트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출발해서 다른 물음을 던지기 때문이다. 칸트가 인간의 관점에서 우리 인간이 인식을 획득할 가능성에 대해 물었던 반면, 라이프니츠는 신의 관점에서 신이 어떻게 세계를 창조했는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 이 점에서 칸트 철학의 등장은 신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인간주의적 철학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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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잘 이해가 안가네요.

  1. "예수를 배신한다"라는 개념은 "유다"의 요소개념이다.
  2.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유다는 유다가 아니다"이며 따라서 모순이다.
  3. 결론: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거짓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논리라면,

  1. "루비콘 강을 건넌다"라는 개념은 "카이사르"의 요소개념이다.
  2.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카이사르는 카이사르가 아니다" 이며 따라서 모순이다.
  3.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거짓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4. 결론: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다"는 필연적 명제이다.

라는 것이 되어,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다"를 우연적 명제로 보는 라이프니츠를 기준으로 할 때, reductio가 성립하는 거 아닌가요?

수정된 해석을 기준으로 해도, 애덤스에 대한 반박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특정 시점에는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다"가 참일 수 있다면 (즉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다"가 tn의 시점에서 참인 것으로 충분하다면), 같은 논리로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다"가 특정 시점에서는 참일 수 있고 따라서 적어도 가능하다 라고 말해져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제가 뭔가 놓친 건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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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시점에서 말씀드리자면, 옳게 보신 것 같습니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다”는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거짓인 우연적 명제이다.

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지점에서 책의 방점은 아마 라이프니츠가 우연성을 저렇게 본다는 점에 찍혀 있는 듯합니다. 저자는 일단 라이프니츠가 필연성과 우연성을 가능세계와 관련해서 정의한다는 해석을 애덤스에 반하여 옹호하고, 그 다음 이렇게 정의된 우연성 개념이 완전 개체 개념과 결합될 때 난점을 발생시킨다고 말합니다.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따른다면, 술어 개념이 주어 개념 안에 이미 들어 있어도 어떤 명제(완전 개체 개념을 주어로 하는 명제)는 우연적으로 참이다(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분석을 해보면, 이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 문제는 8장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박제철, 2013, 95)

제8장의 논의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넌다”처럼 완전 개체 개념을 주어로 하는 참인 명제가 우연적이라고 주장하며, 이 명제가 사실상 결정론적 필연성을 갖는다는 아르노의 반박에 이 명제가 "가설적 필연성"만을 가질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박제철의 분석에 따르면,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가설적 필연성"은 사실 대물필연성(de re necessity)으로 귀결됩니다. 이는 라이프니츠가 개체의 통세계적 동일성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와 같은 완전 개체 개념에 해당하는 실체는 오직 하나의 가능세계에서만 존재하며, 카이사르가 갖는 모든 속성은 카이사르가 존재하는 모든(=하나의) 가능세계에서 귀속됩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든가, 아니면 카이사르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는 완전 개체 개념과 식별 불가능자 동일성 원리에 비추어봤을 때 라이프니츠 체계 내에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추론이며, 이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결정론에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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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설명을 들으니 저자가 의도하는 스텝이 좀더 명확해지네요.

그런데 설명을 듣고 나니, 저자의 논변이 더욱 의심스러워졌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저자는 애덤스를 반박하는 동시에 라이프니츠의 대물필연성이 결정론으로 귀결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라이프니츠에게 대물필연성을 귀속시키는 한에서, 애덤스에 대한 저자의 반박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다음을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1. "예수를 배신한다"라는 개념은 "유다"의 요소개념이다.
  2.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유다는 유다가 아니다"이며 따라서 모순이다.
  3. 결론: "유다는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거짓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

이 논변은 "예수를 배신한다"라는 요소개념과 "유다"라는 완전개체개념 사이의 "필연성"에 기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필연적 관계이기에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모순을 포함하게 되고 따라서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러나 저자가 설명하는 대로 해당 필연성이 대물필연성이라면, 이 대물필연성은 해당 사물(="유다")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가능세계에서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즉 "유다"를 포함하고 있는 현재-가능세계에서 저자의 위 논변은 타당하지만, "유다"가 존재하지 않는 다른-가능세계에서는 "유다"라는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 유다"가 무의미할지언정 모순적이지는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해하는 바의 "라이프니츠"라는 완전개체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가능세계에서는 "여자인 라이프니츠"가 무모순적인 것과 비슷한 원리죠. (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 유다" 나 "여자인 라이프니츠"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모순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곧 라이프니츠가 대물필연성이 아닌 대언필연성을 주장했다는 불합리한 주장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 유다가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적어도 다른-가능세계에서는 가능하므로 애덤스의 주장이 반박된다고 보기 어려워 보입니다.

추가적으로 라이프니츠의 대물필연성이 결정론에 빠진다고 보는 저자의 입장이 애덤스의 해석이 거짓이라는 저자의 해석에 기대어 있는 question-begging일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제가 알기로 라이프니츠가 결정론을 부인한 근거 중의 하나는 쉽게 말하자면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루비콘 강을 건너는 카이사르"와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 카이사르"를 비교한 결과 후자보다 전자를 선호할 충분한 근거가 있고 따라서 전자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가 최선이라는 것이죠. 즉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 카이사르"가 불완전할지언정 적어도 신의 지성 속의 "가능한" 한 옵션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저자의 애덤스-반박에 따르면,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 카이사르"는 그 자체로 모순이므로, 신이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세계가 아니게 됩니다. 즉 "루비콘 강을 건너는 카이사르"의 대안-가능세계가 애초에 없었다는 불합리한 결론이 되고, "신이 창조할 때 여러 가능세계들 중 최선의 세계를 선택했다" 라는 라이프니츠이 변신론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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