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개념·관념
1678년 집필된 소논문 「관념이란 무엇인가」에서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 서설』과 『신인간지성론』에 앞서 관념에 대한 그의 입장을 완성하게 된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아르노와 말브랑슈의 관념 이론을 비판하면서, 표현관계에 기반한 자신의 관념 이론을 개진하는데, 이 이론은 심신 이원론 문제 해결에 큰 의미를 지닌다.
1. 관념의 정의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관념은 두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 안에 있는 것이다. 관념이 생각하는 활동에 의해 산출된다는 통념과 달리, 라이프니츠는 관념이 생각하는 활동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사유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2. 관념의 종류
라이프니츠는 관념을 구별하는 여러 개념들을 제시한다. 그는 분명한/모호한(clear/obsure) 관념, 구분된/혼동된(distinct/confused) 관념이라는 두 가지 개념쌍, 또 적절한(adequate) 관념과 직관적(intuitive) 관념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먼저 분명한 관념이란, 그 담지자로 하여금 사물들을 잘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관념을 뜻한다. 그렇지 못한 관념은 모호한 관념이라 불린다. 예컨대 닭에 대해 분명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닭을 오리나 거위와 구별할 수 있는 반면, 닭에 대해 모호한 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러한 구별을 하지 못한다.
한편 구분된 관념은 그 스스로 요소 관념들로 구별되어 드러나는 관념을 뜻한다. 이 관념은 사물을 구별하도록 도와주는 관념이 아니라 내적인 구별에 의해 분해되는 관념이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예컨대 금에 대한 구분된 관념을 갖고 있는 화학자는 금 관념을 황산에 잘 녹음, 철보다 경도가 무름, 전기가 잘 통함 등의 요소 관념으로 분해할 수 있는 반면, 금에 대한 혼동된 관념을 갖고 있을 뿐인 일반인은 금 관념을 이렇게 분석할 수 없다.
구분된 관념이 모든 요소 관념들로 완전히 분석될 수 있을 때 이 관념은 적절한 관념이다. 나아가 이렇게 분해된 정의 불가능한 요소들을 모두 한 번에 파악할 수 있을 때 이 관념은 직관적 관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다시피 적절한 관념과 직관적 관념은 인간으로서는 얻기 힘든 관념이며, 이런 관념들은 대개 신이 지니고 있다.
특히 신은 알렉산더나 소크라테스 같은 완전 개체 개념에 대한 적절하고 직관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까닭에, 이 개체가 어떻게 살아가고 무슨 행동을 하며 무슨 일에 맞닥뜨릴지를 모두 알고 있다.
3. 완전 개체 개념
『포르루아얄 논리학』 이래로 개념의 내포/외연 구별은 철학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개념의 내포란 개념의 요소 개념을 뜻하며, 외연은 개념에 포섭되는 대상들을 뜻한다. 내포와 외연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개념의 내포가 증가하면 그 외연은 감소하고, 반대로 내포가 감소하면 외연은 증가한다. 예컨대 동물 개념에 포유류, 말할 수 있음, 백인, 여성 등의 규정을 추가할수록 이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의 수는 점점 적어진다.
라이프니츠는 이 개념의 내포가 한계까지 늘어나 개념이 단 하나의 외연만을 갖게 되는 경우를 상정하고, 이를 완전 개체 개념이라고 부른다.
칸트는 이 완전 개체 개념에 해당하는 개별적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논리학』에서 칸트는 최하위 개념 혹은 최하위 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종은 그 스스로 류가 되어 다시 그 아래에 종차를 지닐 수 있다. 칸트가 보기에 구체적인 개별자에 대한 인식은 순전히 개념적 규정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으며 감성적 직관을 필요로 한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요소 관념들로 남김없이 분해되면서도 그 요소들이 한 번에 파악될 수 있는 (적절하고 직관적인) 개별자가 있으며, 신이 이러한 관념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완전 개체 개념은 […] 이 세계를 인식하는 신의 정신적 기능”(박제철, 2013, 70)이다.
4. 관념의 존재론적 지위: 관념의 실재성
앞서 라이프니츠는 관념이 정신 안에 있는 무엇이며 생각하는 활동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입장은 데카르트에 의해 촉발된 관념의 존재론적 지위에 관한 논쟁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 논쟁은 말브랑슈 등 관념의 대상적 실재성을 지지하는 입장과 아르노 등 관념의 형상적 실재성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나뉜다. 대상적 실재성은 관념이 정신 밖의 독립적인 존재로서 지니는 실재성인 한편, 형상적 실재성은 관념이 정신 내의 속성으로서 지니는 실재성이다.
말브랑슈는 관념을 심적 사건과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심적인 것은 각 의식에 따라 달리 존재하며, 동일한 의식 내에서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수 1에 대한 관념이 심적인 것이라면, 1의 관념은 그것을 떠올리는 사람에 따라 내용을 달리할 것이며, 동일한 사람에게도 이전에 떠올렸던 1의 관념과 지금 떠올리는 1의 관념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사람들은 같은 관념을 갖고 의사소통할 수 없을 터이며, 하나의 일관적이고 지속적인 관념을 갖기도 어려울 터이다. 그러므로 말브랑슈는 관념이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에 독립적이면서 정신에 맞서 있는 추상적 대상으로서 대상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일종의 플라톤주의 내지 보편자 실재론으로 귀결된다. 이런 이유에서 아르노는 말브랑슈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관념이 형상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아르노에 의하면, 관념은 정신과 떨어져서 어딘가에 존재하는 추상적 대상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의 변용이다. 이에 따라 관념은 주관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띤다.
라이프니츠는 관념이 지각의 무매개적 대상 혹은 생각의 성질이라는 두 가지 설명 방식을 모두 거부하고 이와는 다른 설명을 모색한다. 먼저 라이프니츠가 보기에, 아르노는 관념이 정신 내재적이며 심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옳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아르노와 달리 관념이 한낱 주관적 및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항구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말브랑슈의 주장 중 일부를 받아들인다. 물론 그가 보기에 관념이 정신 독립적인 추상적 대상이라는 말브랑슈의 주장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관념은 “정신의 기능” 혹은 “정신의 성향적 속성”이다(박제철, 2013, 75). 관념은 우리가 사물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성향이다. 정신은 항상 사물을 생각하지는 않지만, 기회가 되면 정신은 이 성향에 의해 언제든 사물을 떠올린다. 이는 컵이 깨지기 쉬움이라는 성향을 갖고 있되 항상 깨지지는 않고 기회가 될 때 깨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컵이 항상 깨지기 쉬움이라는 성향을 갖고 있듯, 관념이라는 성향은 정신이 사물을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항상 정신 안에 있다. 위와 같은 이론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플라톤주의적인 과포화된 존재론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이고 정합적인 의사소통 및 지식의 가능성을 담보했다.
5. 관념과 표현관계
이때 관념이 정신 안에서 수행하는 일은 정확히는 사물을 표현하는 일이다. 관념이 사물을 표현한다는 것은, 관념의 속성이 사물의 속성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 대응은 관념과 사물의 비례관계를 통해 성립하며, 관념이 사물과 어떤 유사성을 지닐 필요는 없다. 예컨대 x²+y²=4는 이 방정식이 갖는 비례관계를 통해 반지름 길이가 2인 원을 표현한다. 이 비례관계에 의해 우리는 방정식의 속성으로부터 원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정식과 원은 서로 닮아있지 않다. 관념이 사물을 표현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관념과 사물이 서로 닮아 있지 않고 심지어 존재론적으로 다르더라도, 전자는 후자를 표현할 수 있다.
표현관계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이론은 심신 이원론을 둘러싼 인식론적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공한다. 데카르트 이후 정신과 물질은 존재론적으로 상이한 지위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신이 어떻게 물질에 대해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라이프니츠의 이론은 정신과 물질의 존재론적 차이를 견지하면서, 정신과 물질 사이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요청하지 않고도 어떻게 정신이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한다.
6. 결론
라이프니츠의 관념 이론은 정신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추상적 실재물에 호소하지 않고도 어떻게 관념이 지속적이고 객관적인 속성을 지닐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관념과 사물의 표현관계에 대한 이론을 통해, 정신과 물질의 존재론적 차이를 받아들이면서도 정신이 어떻게 외부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처럼 라이프니츠의 관념 이론은 단순히 관념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으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철학적 논쟁들 속에서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