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대응론, 의미론, 셀라스

0: 진리 대응론

2020 Philpapers Survey (https://journals.publishing.umich.edu/phimp/article/id/2109/)에 따르면 거의 절반에 가까운 철학자들이 진리 대응론을 지지한다고 합니다. 진리 대응론이란, 고대~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버전이 있지만, 아퀴나스의 고전적 정식을 통해 말한다면

(1) 진리는 대상과 인식의 합치이다 (Veritas est adaequatio rei et intellectus).

의 입장을 말합니다. 물론 “진리 대응론을 지지한다”라는 것이 어떤 강도의 commitment인지가 사실 불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1)이 “진리”라는 술어의 “뜻”이나 “속성”을 설명해준다고 믿는 강한 입장이 있는 반면, (1)이 우리의 일상적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적어도 무해하다(innocuous)는 약한 입장도 가능합니다. 후자의 경우, 진리대응론은 다른 종류의 진리이론(정합론, 실용주의, 축소주의 등)과 결합가능하게 됩니다. 절반에 가까운 철학자들이 진리 대응론을 적어도 무해하다고 여긴다는 것은 곧 이들에게는 진리 대응론이 말해주는 바가 어느 정도 자명하다는 것입니다.

1: 진리 대응론은 자명한가?

먼저 이 질문은 구체적인 이론화 과정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1)에서 등장하는 “대상”, “인식”, “합치”가 무엇이냐를 두고 복잡한 철학적 논의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상”의 후보로는 object/fact/state of affairs 등이 거론되고, “인식”의 후보로는 (프레게적/러셀적) 명제/ (일상적/이상적) 문장/mentalese 등이 거론됩니다. 어떤 후보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조합의 이론화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진리 대응론을 지지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떤 종류의 진리 대응론이냐가 매우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그러나 제 질문은 좀 더 근원적인 층위를 향하고 있습니다. 진리 대응론에서 “대응”의 두 관계항을 봅시다. (object/fact/state of affairs 로서의) “대상” 은 보통 비언어적인(non-linguistic/extra-linguistic) 실재로 간주되는 반면, (명제/문장/mentalese 로서의) 소위 “인식”은 언어적(linguistic)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두 관계항은 그 존재론적 위상에서부터 구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 상이한,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 개체가 “대응”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 “대응”이 도대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존재론적으로 상이한 개체들 간의 “대응”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가 주어지지 않는 한, 진리 대응론은 의심스러워 보입니다. 가령 “진리는 aRb 의 관계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진리이론으로서 효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은 “진리”라는 말을 “aRb의 관계”라는 말로 대체했을 뿐, 이 “aRb의 관계”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이론”은 “진리”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야 합니다.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두 관계항 중 적어도 하나가 언어적 개체이기 때문에 이 “대응”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언어철학적이고 의미론적인 논의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타르스키식 의미론

이러한 맥락에서, 타르스키의 진리론에 영향받은 의미론적 시도들은 진리 대응론에도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2) “Sokrates ist weise” is true (in German) iff Socrates is wise.

(3) “Sokrates ist weise” (in German) signifies (=means/stands for/denotes) Socrates is wise.

이들의 핵심은, 특정 언어의 언어표현들이 가지는 진리조건을 규정하는 타르스키 이론이 사실상 그 언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의미론으로 기능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2)로부터 (3)을 도출해냅니다. 이것이 진리 대응론과 무슨 상관일까요? 가만히 보시면 (3)의 좌항은 언어적 표현을 다루고 있고, (3)의 우항은 실재의 대상 혹은 사태 (Socrates’ being wise)를 다루는 것처럼 보입니다. (3)의 의미론적 시도가 성공적이라면, 이것이 이미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실재적 개체 사이에 “의미론적 관계”가 성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실재적 개체 사이의 대응 관계를 논하는 진리 대응론이 그 자체로 문제적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3: Signifying-Relation

여기서 우리의 셀라스가 등장합니다. 셀라스는 타르스키식 의미론이 진리에 대한 설명으로서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타르스키식 의미론은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실재적 개체 사이의 “관계”를 제시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셀라스에 따르면,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 개체 사이의 “의미론적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의미론적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한 언어적 표현과 다른 언어적 표현 사이에서 성립합니다. 왜 그럴까요?

셀라스는 (3)의 형태가 (4)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4) “Sokrates ist weise” (in German) has the same use as your “Socrates is wise”.

“나”는 영어 모국어 화자로서 “Socrates is wise”라는 표현을 이해하고 있고, 일상적인 언어사용 및 추론 속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4)는 “Sokrates ist weise”라는 독일어 표현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Socrates is wise”라는 영어 표현의 개념적 역할에 대응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셀라스는 이 대응 관계를 significance 관계라고 표현합니다. significance 관계는 한 언어표현과 다른 언어표현 사이, 즉 언어적 개체와 다른 언어적 개체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지, (타르스키식 의미론이 주장하는)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실재적 개체 사이가 아닙니다.

4: Picturing-Relation

그런데 셀라스의 이러한 해석은 한 가지 의문을 불러옵니다. 셀라스가 말하는 의미론적 관계 즉 significance는 언어적 개체들만을 언급할 뿐 실재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전부라면, 실재에 대한 접촉 없이도 언어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러나 언어의 객관성과 상호주관성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함축은 반직관적입니다. 외부실재로부터의 규범적 제약 없이, 내 마음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합리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언어와 실재 사이의 규범적 관계를 정립할 수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셀라스는 이것을 당연히 고려하고 있고, 따라서 (3)의 signifying-relation과 구별되는 두번째 관계로 (전기 비트겐슈타인적 의미의) picturing-relation을 도입합니다. 비교를 위해 다시 한 번 써 봅시다.

(3) “P” signifies P.

(5) “P” pictures P.

섹션3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3)은 언어적 표현들 사이의 의미론적 관계였고 따라서 실재의 질서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5)의 picturing은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실재적 개체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일까요? 즉 (5)의 좌항은 언어적 개체이고 (5)의 우항은 이에 대응하는 비언어적이고 실재적인 개체를 나타내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3)의 의미론적 관계를 도입한 이유가 퇴색되고 다시 진리 대응론의 근본적 문제 (어떻게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 개체가 관계를 맺는가?) 로 돌아가게 됩니다.

당연히 이것은 셀라스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셀라스는 (5)의 경우 좌항과 우항 모두 실재적 대상들을 지시한다고 말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5)의 좌항(=“Sokrates ist weise”)이 단순한 언어적 표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 단순한 언어적 표현이라면 다시 (3)으로 회귀합니다 -, 음성을 통해 발화된 혹은 문자를 통해 새겨진 언어적 대상을 나타냅니다. (3)의 좌항이 추상적-언어적 개체라면, (5)의 좌항은 관찰가능하고 인과적 관계를 통해 추적할 수 있는 자연적-언어적 대상 (natural-linguistic object)입니다.

(5)의 picturing-relation은 우리의 언어 실천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자연적-언어적 대상과 환경 사이의 규범적 정규성(regularity)을 설명해 줍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오는 상황을 마주하여 “비가 온다”라고 발화하거나, “나는 일어설 것이다”라고 발화하고는 몸을 일으키는 상황 등을 (5)가 반영합니다.

(5-1) “it’s raining” pictures it’s raining.
(5-2) “I shall stand up” pictures S shall stand up.

5: 결론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 봅시다. 처음에 우리는 진리대응론을 다루면서 언어적 개체와 실재적 개체가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타르스키식 의미론은 “의미론적 관계”를 통해 이에 대한 실마리를 주는 것 같아 보였지만, 셀라스는 “의미론적 관계”를 언어적 표현들 사이의 관계로 한정지음으로써 타르스키식 의미론을 거부하였습니다. 대신 의미론적 관계와 별개로, 실재적 대상들 사이의 관계로서의 picturing-relation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significance 와 picturing을 구분함으로써 셀라스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6) Significance: “Sokrates ist weise” (in German) signifies Socrates is wise.
(7) Picturing: “Sokrates ist weise” (as a natural-linguistic object) pictures Socrates is wise.

(6)은 “Sokrates ist weise” 의 독일어 표현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영어 표현 “Socrates is wise”와 같은 개념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합니다. 그러나 양자가 동일한 개념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7)을 거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Sokrates ist weise”라는 음성적 발화 내지 문자적 기입이 해당 사태 (=Socrates’ being wise)와 정규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7)에서 진술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다음입니다.

  1. Picturing 관계는 실재적 대상 사이의 관계, significance 관계는 언어적 표현들 사이의 관계이다. 따라서 진리대응론이 자명해보이는 것과 달리, 언어적 개체와 실재 대상 사이의 "직접적" 대응관계는 진술할 수 없다.
  2. Picturing 관계는 significance 관계가 성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significance에 대한 진술은 picturing 관계에서의 정규성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picturing 관계는 significance 진술을 위한 규범성을 제시한다.
  3. 진리에 대한 주장이 실재에 대한 클레임을 포함하고 있는 한에서, 유의미한 진리-대응 관계는 (언어적 표현들 사이를 다루는) significance 관계가 아니라 (실재적 관계를 다루는) picturing 관계에 위치한다. 따라서 타르스키식의 의미론적 관계는 진리 대응론을 완전히 해명하는데 실패한다.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 개체 사이의 대응 관계에 대한 셀라스의 이해는 또한 그의 자연주의적이고 과학주의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미론적 질서 외부에 있는 실재적 질서와, 이 실재적 질서가 가지는 진리-규범성이라는 테마는 그의 저작들 도처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위 내용은 W. Sellars, "Being and being known (1960)", "Truth and Correspondence (1962) 등에 기반하여 "많이" 간소화한 내용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셀라스의 의미론에 대한 맥도웰의 비판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6개의 좋아요

오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니체와 굿맨, 셀라스, 콰인, 로티의 접점을 따지는 <Nietzsche‘s prefiguration of postmodern american philosophy> 이랑 요 책을 보고 있었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7개의 좋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는데요,

(1) Socrates is wise.
(2) Socrates is wise.

여기서 (1)과 (2)는 서로 다른 자연적-언어적 대상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1)과 (2)가 동일한 추상적-언어적 대상("Socrates is wise.")에 포섭됨을 나타내는 관계가 필요해 보이는데 이것이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 개체 사이의 관계보다 개선되었다고 볼 이유가 있나요?

1개의 좋아요

네 맞습니다. 말씀하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셀라스는 (1)과 (2)가 "Socrates is wise"라는 언어적 표현 (따라서 significance에 위치하는 추상적-언어적 대상) Type의 여러 Tokens (picturing에 위치하는 자연적-언어적 대상)라고 말합니다.

Type-Tokens 관계가 결국 언어적 개체와 비언어적 개체 사이의 관계를 교묘히 바꾼 것 아니냐, 이 질문에 대해서는 아마 셀라스는 다음을 염두에 둔 듯 합니다.

  1. 실재의 시공간적 질서 (picturing) 속에서 발화되거나 기입된 자연적-언어적 대상(tokens)는, 결국 해당 언어적 표현(type)의 의미(significance)를 이해하고 있는 언어 사용자에 의해 발화/기입된 것입니다. 따라서 type-token의 연결은 미스테리한 방식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언어 실천을 자연주의적 수준에서 관찰하는 것 뿐입니다.
  2. 본문에서는 논의가 복잡해질까봐 쓰지 않았는데, 셀라스가 significance 관계를 통해 추가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mental act에 대한 설명입니다. 셀라스는 mental act 혹은 대상-지향성을 일상 언어적 실천과 유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멍청하다" (type) 라고 의식 속에서 생각/판단하는 것과 "소크라테스는 멍청하다"(tokens) 라고 자연적-언어적으로 발화하는 것이 유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죠. significance/picturing, type/token의 구별이 이루어진다면, 지성의 mental act와 그 지향성 또한 picturing 관계 속에서 고찰될 수 있다는, 굉장히 자연주의적 함축을 가지게 됩니다. (셀라스는 picturing 관계에 위치하는 지성이 바로 "central nervous system"이라고 말합니다.)
4개의 좋아요

아하, 이제 셀라스가 목표하는 바가 더 와닿네요. 설명 감사드립니다!

1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