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현대 인식론』, 제4장 요약

김기현 (2003). 『현대 인식론』. 민음사. 103-129.

제4장 인식정당성의 두 견해

지금까지는 지식의 문제를 살펴보았지만, 4장부터 6장까지는 인식정당성의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4장은 인식정당성에 대한 두 견해를, 5장은 내재론과 외재론을, 6장은 토대론과 정합론을 다룬다.

"어떻게 믿는 것이 적절한가?", "어떠한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한가?", "어떠한 인식적 행위가 인식적 목표에 기여하는가?" 이에 답하는 수많은 이론들이 있다. 이들은 구체적 사례들이 인식적으로 정당한지 혹은 정당하지 않은지조차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상이하다. 따라서 애초에 인식정당성의 개념 자체가 다의적이지 않겠냐는 의심에서, 많은 현대 인식론자들이 인식정당성의 상이한 개념을 구분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인식정당성에는 내재론적/외재론적, 주관적/객관적, 규제적/비규제적, 개인적/진리적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이들은 크게 두 가지 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은 각기 인식정당성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발생적 견해라고 불릴 것이다.

인식정당성에 대한 전통적 견해

한 믿음의 인식정당성과 관련된 평가는 인식 주관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이 경우엔 인식 주관이 인식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고려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하기 위해서는, 인식 주관이 믿음의 근거가 그 믿음을 이루는 명제를 참이게끔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에 의하여 그 명제를 믿어야 한다.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다:

S가 R이라는 근거에 의하여 P라고 믿는 것이 인식론적으로 정당하기 위해서는, S는 R이 주어졌을 때 P가 참일 가능성이 높다는 상위 의식higher-level belief[1]을 가져야 한다.

전통적 견해는 의무론적 견해에 의하여 얻어질 수 있다. 의무론적 견해에 따르면, 거짓을 피하고 참을 획득하는 것이 인식적 의무를 이루며[2], 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한가는 이러한 인식적 의무의 이행 여부에 의존한다. 그런데 믿음의 근거가 그 믿음을 참이게끔 한다는 상위 의식을 갖지 않을 경우, 그는 적절한 근거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믿음을 참이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다른 부당한 근거에서 그 믿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때 그는 인식적 의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의무론적 견해는 자연스럽게 상위 의식의 요청으로 이어진다.

이외에도 전통적 견해를 지지하는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이들 이론이 전통적 견해를 지지하는 근거는 상이할지라도, 전체적으로는 인식정당성을 위한 평가의 대상을 인식 주체로 보는 관점에서 전통적 견해가 도출된다. 인식 주체를 평가할 때 한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한가는 "한 사람이 그의 믿음을 정당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 좋은 근거를 갖고만 있지 그것이 문제의 믿음과 관련하여 어떠한 효력을 지니는가를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사람은 정당하게 그의 믿음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인식 주체를 인식정당성을 위한 평가의 대상으로 간주할 경우, 인식정당성의 분석에는 인식 주체가 상위 의식을 갖는지의 여부가 고려되어야 한다.

인식정당성에 대한 발생적 견해

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은 진리 추구의 목표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잘 형성된well-formed 또는 잘 유지된well-sustained 믿음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골드만의 과정 신빙주의process reliabilism는 "잘 형성됨"이라는 개념을 "신빙성 있는 인지 과정에 의하여 산출됨"으로 분석한다. 이때 "신빙성"은 "거짓 믿음보다 많은 참된 믿음을 산출하는 성향"이다. 골드만은 다음과 같이 인식정당성을 정의한다:

만약 S가 t의 시점에 P라고 믿는 것이 믿음을 형성하는 신빙성 있는 인지 과정의 결과라면, t에 S가 P를 믿는 것은 정당하다.

위와 같이 한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한가가 그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인식정당성에 대한 발생적 견해라고 부르겠다. 단, 인식정당성의 결정은 믿음을 산출한 인지 과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한 증거에 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근거"라는 표현에 증거와 인지 과정을 모두 포함시킨다면, 인식정당성에 대한 발생적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R이라는 근거에 의하여 S가 P라고 믿는 것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S가 P라고 믿는 것이 R에 의하여 야기되어야 한다.[3]

발생적 견해는 전통적 견해와 달리, 인식 주관을 인식정당성에 대한 평가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 발생적 견해는 인식정당성을 분석할 때 믿음이 어떤 인지 과정(혹은 근거)에 의하여 산출되었는지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생적 견해는 인지 과정의 성향을 인식적 평가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전통적 견해와 발생적 견해의 변주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한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인식 주관에게 참인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즉 인식 주관에게 그 믿음의 근거가 내재적으로 포착되고 그 근거의 참됨 또는 참일 개연성이 높음이 내재적으로 포착되어야 한다. 반면 발생적 견해에 따르면, 한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사실상 참일 개연성이 높아야 한다. 이러한 대립은 내재론/외재론, 주관적/객관적, 개인적/진리적 견해의 구분으로 이어진다.[4]

전통적 견해와 발생적 견해의 갈등

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을 잘 형성된 믿음이라 하면서, 상위 의식의 요청이 잘 형성된 믿음의 요건이라 한다면, 전통적 견해는 발생적 견해의 한 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 견해를 옹호하는 인식론자와 발생적 견해를 옹호하는 인식론자는 서로를 용납하지 않는다. 전통적 견해를 옹호하는 레러Lehrer는 발생적 견해가 인과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 믿음의 원인으로 그 믿음의 인식정당성을 따지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반면 발생적 견해를 옹호하는 인식론자들은 상위 의식의 요청은 지나친 조건이며, 적절한 인지 과정에 의하여 산출된 믿음이라면 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한 믿음이 정당함과 한 믿음이 정당함을 앎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위 의식은 정당함을 앎을 위해 필요할 뿐, 정당함 자체에 요구되는 것은 아니므로 전통적 견해는 양자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5]

하지만 두 견해는 평가의 대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상호 병존가능하다. 전통적 견해의 인식정당성 평가는 인식 주관에 대한 평가이지만, 발생적 견해의 그것은 인지 과정의 성향에 대한 평가이므로 서로 다른 인식정당성을 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견해의 문제

전통적 견해에서 한 하위 믿음이 정당하기 위해서는 상위 믿음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 상위 믿음 역시 정당하여야 한다. 상위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하지 않을 경우, 예컨대 추측에 의해 인식 주관이 '주어진 근거가 하위 믿음을 참이게끔 한다'고 믿을 경우, 그는 인식적으로 정당하게 하위 믿음을 믿고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주장은 무한 후퇴를 초래한다. 믿음 P가 증거 E에 의하여 정당하게 된다고 하자. S의 믿음 P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증거 E가 주어질 때 P가 참일 개연성이 높다는 상위 믿음 H를 가져야 하고 H가 정당해야 한다. 그런데 H가 정당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근거 E'와 그에 대한 상위 믿음 H'가 요구된다. 다시 H'는 그가 정당하기 위하여 그에 대한 상위 믿음 H''를 요구할 것이고, 이는 무한히 반복된다.

이러한 무한 후퇴로부터 두 가지 문제가 따라나온다. 첫째, 한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한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무한 후퇴에 빠지게 되므로, 어떠한 믿음도 인식적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는 기이한 결론이 도출된다. 둘째, 인식정당성의 개념이 해명불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 믿음의 인식정당성을 정의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상위 믿음의 인식정당성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인식정당성의 정의는 인식정당성 개념 밖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적 견해의 아이디어, 즉 인식 주관이 비판적 반성을 통해 믿음을 받아들인다면 그 믿음은 정당하다는 생각은 꽤나 유효해 보인다. 그러므로 전통적 견해의 대안은 단순히 무한 후퇴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뿐 아니라 전통적 견해의 초기 아이디어를 포섭해야만 한다.

발생적 견해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포섭하기 위하여, 상위 의식을 토대로 하위 믿음에 도달하는 것을 믿음을 잘 형성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간주할 수 있다. 동시에 이것은 무한 후퇴에 빠지지 않는다. 상위 의식이 정당화되어야 함은 변함없지만, 더 고차의 상위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 다른 발생적 방식으로 정당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생적 견해의 문제

대부분의 발생적 견해를 옹호하는 인식론자들은 믿음이 객관적으로 참일 확률이 높은 한에서만 인식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인식정당성이 적절한 근거에 의하여 믿음이 산출되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더라도, 그 근거의 적절성은 믿음의 객관적 참/거짓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논증하기 어렵다. 인식정당성의 평가가 진리 연관적임을 받아들이고, 발생적 견해와 같이 한 믿음의 인식정당성은 인식 주관의 비판적 반성과는 무관하며 그 믿음의 발생 과정에 의하여 결정됨을 받아들인다면, 발생적 견해는 객관적, 또는 진리적 견해로 이어진다.

그런데 인식정당성을 객관적 확률과 연관시킬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인식 체계에 주어진 정보와 인지 과정이 정확히 동일한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은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데카르트의 전능한 기만자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자. 이 경우에 한 사람의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동일한 믿음 역시 정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믿음은 객관적으로 참일 확률이 지극히 상이하다. 예컨대 지각적 믿음은 현실 세계에서는 객관적으로 참일 확률이 높지만, 전능한 기만자의 세계에서는 전혀 그러지 못하다. 이 경우 현실 세계에서의 믿음은 정당하지만, 전능한 기만자의 세계에서의 믿음은 정당하지 않게 된다.

또한 전능한 기만자의 세계에서도, 정상적인 지각과 반성을 통한 믿음이 있고, 추측을 통한 믿음이 있다. 전자는 인식적으로 정당하지만 후자는 정당하지 않다. 그런데 이 둘 모두 객관적으로 참일 확률이 거의 없다. 따라서 위의 객관적 견해를 따를 경우, 양자 모두 인식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믿음으로 분류되어야 하며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발생적 인식론자들이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선, 적절한 근거를 객관적 참을 산출하는 것과 무관하게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적절한 근거를 주관적으로 참일 확률이 높은 방향으로 해석하거나, 애초에 적절한 근거의 성질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전자는 무한 후퇴의 문제에 빠질 것이고, 후자는 인식정당성에 대한 불완전한 이론일 뿐이다.


[1] 상위 믿음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그것이 인식 주관 내의 심적 상태인 믿음과 그 근거들에 관한 믿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이를 주로 상위 의식이라고 적지만, 영문 번역어가 belief라는 점이 조금 의문스럽다. 이 표현이 의식적 믿음을 가리킴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 책에서 인용한 봉주르의 글은 "자신의 믿음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그의 인식적 의무를 이루며"라고 적혀 있는데, 본문에서는 인식적 의무가 참을 획득하고 거짓을 피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의무론적 견해가 어떻게 상위 믿음의 요청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은, 인식적 의무 개념을 봉주르의 글에 쓰인 의미로 간주할 때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인식 주관이 적절한 근거만 갖고 있다면 그것이 믿음을 참이게끔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참을 얻고 거짓을 피함'이라는 의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대체 왜 R이라는 근거가 인식적 목표에 기여하는 근거여야 한다는 말이 없는가? "S가 P라고 믿는 것이 R에 의하여 야기되어야 한다"라는 구절은 단순히 "R이라는 근거에 의하여 S가 P라고 믿는 것"에 대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거나, 저자가 실수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겠다.

[4] 외재론/내재론의 이러한 구분은 거친 구분이고, 이에 대해서는 5장에서 더욱 상세히 논의될 것이다.

[5] 다만 이러한 주장은 선결 문제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먼저 정당함에 상위 의식이 필요 없음을 받아들인 채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3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