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레, 「플로티누스」

송유레 (2016). 「플로티누스」. 『서양고대철학』, 제2권, 강상진 외. 길. 369-393.

3. 사상

1) 세계의 원리

플로티누스 이전의 플라톤주의자들은 『티마이오스』의 신화로부터 세 가지 원리를 읽어냈다. 첫째, 세계의 본(paradeigma)인 이데아, 둘째, 이데아에 의해 형태를 입는 원료, 셋째, 앞의 두 개를 사용해서 세계를 제작하는 데미우르고스가 그 세 가지 원리이다. 그런데 이 신화는 데미우르고스가 무엇인지, 세계는 어느 특정한 시점에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창조된 것인지 등의 물음을 불러일으켰다. 플로티누스는 데미우르고스 신화를 탈신화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영혼, 정신, 좋음(=일자)이라는 세 가지 원리를 이끌어냈다. 세 가지는 모두 가지계의 원리이며, 영혼, 정신, 좋음으로 나아갈수록 보다 상위의 원리이다.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세계는 그 전체가 하나의 생명을 지니는 유기체인데, 영혼은 세계를 통일된 생명으로 존재하도록 한다. 육체는 영혼 없이는 통일된 채 일정한 형태를 얻지 못하고 단순한 물질들로 해체된다. 영혼은 “물체를 특정한 형태로 구성하고 조직하는 역동적인 힘”(송유레, 2016, 376)이다.

플로티누스는 비연장성을 근거로 영혼과 물체를 구별한다. 물체의 본성은 공간을 점유하는 데에 있으며, 서로 다른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는 서로 다른 물체이다. 반면 영혼은 여러 다른 감각들을 동시에 느끼고 비교할 수 있으므로 비연장적이다. 영혼은 비연장적인 까닭에 그 단일성을 유지한 채로 육체의 상이한 부분들 모두에 작용한다.

질료는 영혼의 작용 없이는 어떤 형상도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형의 비존재이다. 질료를 영혼이나 형상과 독립적인 존재로 보았던 종래의 플라톤주의자들과 달리, 플로티누스는 질료가 영혼으로부터 파생되어 출현한다고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질료는 세계 영혼의 최하위 능력인 자연(physis)로부터 산출된다.

한편 영혼의 위에는 신적인 정신(nous)이 자리하는데, 이 정신이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에 해당한다. 정신은 직접적으로 세계를 구성하기보다 부동의 원동자로서 간접적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다시 말해 정신은 세계 영혼과 개별 영혼들에게 사유와 욕구의 대상이 됨으로써 세계를 간접적으로 형성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계와 사물들의 형상의 본이 되는 이데아는 신적 정신의 안에 있는 까닭에, 영혼은 정신을 사유함으로써 이데아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세계를 구성한다.

이때 이데아는 정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자기사유로 이해된다. 만일 이데아가 정신의 외부에 있을 경우, 정신은 이데아가 아니라 이데아의 인상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인식된 인상이 이데아에 대한 참된 인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기준으로서의 이데아가 필요하다. 결국 이데아가 정신의 외부에 있다면, 정신은 이데아에 대한 참된 인식이 아니라 한낱 불확실한 인식만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데아는 정신의 안에 있으며, 나아가 정신과 이데아는 동일하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신적 정신의 ‘자기 대응’(self-correspondence)”이다(송유레, 2016, 379).

신적 정신이 자기 사유를 통해 영혼과 세계의 구성 원리가 됨에도 불구하고, 신적 정신은 여러 개의 이데아들로 구성된 통일체인 까닭에 그 스스로는 궁극적인 원리가 아니다. 다수의 이데아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구성하는 원리가 신적 정신에 선행하며, 이 원리가 바로 하나(hen) 혹은 일자이다. 하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로 존재하며, 하나이지 않은 사물은 없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선행하는 까닭에 그 자신은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는 존재의 층위가 아니라 존재의 너머에(epekeina tēs ousias) 있다.

플로티누스는 이 하나가 『파르메니데스』의 절대적 일자 및 『국가』에서의 좋음의 이데아라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대화편에는 서술되지 않았지만 플라톤이 구술했다고 전해지는 피타고라스적 원리에 기반한 것이다. 플라톤의 ‘기록되지 않은 가르침’(agrapha dogmata)에 의하면, 세계의 궁극적인 원리는 하나(=좋음)와 무규정적 둘(ahoristos dyas)이다.

한편 오로지 존재하는 것, 즉 하나로 규정된 것만이 인식될 수 있는 까닭에, 존재의 너머에 있는 하나는 인식될 수도 없다. 즉 하나는 사유될 수도 없고 언어적으로 기술될 수도 없다. 이에 따라 하나에 대한 모든 기술은 기껏해야 잠정적일 뿐이며, 하나 자체에 대한 기술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기술이다. 그것의 일자성, 좋음 등은 사실 우리 자신의 다수성 및 불완전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2) 유출설

플로티누스는 샘의 비유를 통해 세계가 하나로부터 유출되어 나왔다고 설명한다. 물론 하나는 자기를 밖으로 유출하더라도 소진되지 않고 완전하고 충만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구체적으로 유출은 내적 작용과 외적 작용의 구별을 통해 설명된다. 내적 작용은 한 실체가 그 자체로 행하는 작용인 반면, 외적 작용은 실체가 다른 것에 가하는 작용이다. 하나는 내적인 작용을 행하면서도 그 작용력의 감소 없이 자기충족적으로 머물러 있는 채 자기 밖의 실체에 작용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작용으로서의 유출을 통해 하나에서 정신의 생산, 정신에서 영혼의 생산, 영혼에서 질료의 생산이 이루어진다. 생산적 연쇄의 끝에 있는 질료는 더 이상 자기로부터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무능한 것이다.

하나로부터 이러한 유출이 일어나는 이유는 좋음이 자기 확산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한 존재는 자기가 지니는 좋음을 다른 모든 것들과 가능한 한 나누고 싶어 한다. 이런 의미에서 “더 완전한 원리일수록 더 생산적”(송유레, 2016, 382)이다.

3) 악의 실체와 기원

그러므로 플로티누스에서 세계의 모든 좋은 것들은 단 하나의 원리인 좋음 자체에 근거한다. 한데 세계의 궁극적 원리가 좋음이고 세계가 좋음의 자기 확산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왜 세계에는 악이 존재하는가? 플로티누스의 영향을 받은 중세 철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했듯, 플로티누스는 나쁨 혹은 악이 선의 결여라고 말한다. 그러나 후대의 철학자들과 달리 그는 악의 원리 역시 하나의 실체적인 것으로 소급한다. 선이 절제, 형상성, 안정성, 자족성, 규정성 등을 띠는 데 반해 악은 무절제, 무형상, 불안정, 부족성, 무규정성 등을 특징으로 갖는다. 이 악이란 바로 질료이다. 아무런 형상도 없다는 점에서 비존재로 불리는 질료는 악 자체이자 악의 단일한 원천이며, 악덕과 질병 같은 세계 내의 악은 이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이차적 악이다. 질료는 아무런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무능하다.

후대의 프로클로스는 질료와 악이 동일하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질료는 좋음 자체인 일자로부터 결국 파생되어 나온 것인데, 질료와 악이 동일하다면 결국 선 자체로부터 악 자체가 생겨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한편 플로티누스는 선의 자기확산에 근거해 선으로부터 악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주장한다. 선의 최종적인 산물이 선과 조금이라도 닮을 경우, 이는 자기확산에 의해 또 다른 것을 산출할 터이고, 더 이상 최종적인 산물이 아닐 터이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산물은 아무런 선도 내포하지 않는 완전한 악이다.

4) 영혼의 상승과 하강

플로티누스의 철학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에만 몰두하는 듯 보이지만, 그의 형이상학은 실천적인 함축을 띠고 있다. 이 점을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플로티누스의 비판에서 엿볼 수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신의 창조물인 세계가 무지 혹은 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으며, 오로지 신약의 선한 신에게 선택받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택받은 소수가 지니는 신에 대한 영지(gnosis)에만 의존하고 다른 모든 것을 저버리는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플로티누스는 세계 속에서 덕을 따름으로써만 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를 악으로 충만한 곳으로 간주하고 신이 세계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던 영지주의자들과 달리, 플로티누스에 의하면 세계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가능한 한 좋은 상태에서 신에 의해 영속적으로 존립한다. 그리고 덕을 따르는 일은 신을 닮아가는 일이라는 점에서 신에 가까워지는 일이다.

플로티누스는 상위의 덕과 하위의 덕을 나눈다. 상위의 덕은 관조적 덕이고, 하위의 덕은 정치적 및 실천적 덕이다. 하위의 덕은 플라톤이 제시했던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가리킨다. 이는 인간이 육체를 지니고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녀야 하는 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덕은 관조적 덕에 이르기 위해 필수적으로 함양해야 하는 덕이다.

위의 네 가지 덕은 영혼을 육체로부터 정화하는 덕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혼은 지성적인 존재이면서도 육체를 돌보며 살아간다. 육체를 돌보는 일은 영혼의 과업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집착할 경우 영혼은 자신의 지성적 본성을 잃어버리고 육체에 종속된다. 정화는 영혼의 자기망각으로 인한 육체에의 예속을 벗어나는 일이다. 육체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육체를 올바르게 다스리고, 나아가 배우고 탐구함으로써 영혼은 관조적 덕의 수준에 다다르며, 신적 정신의 삶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신적 정신에 참여하는 영혼은 곧 이데아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다.

한편 영혼의 상승은 신적 정신의 수준을 넘어 궁극적으로 하나와의 신비적 합일을 향한다. 이때 합일 상태에 있는 영혼은 “신에 사로잡히거나 신들린 사람과 같지만, 동시에 고요한 고독과 동요 없는 상태에 있다”(송유레, 2016, 389). 비의적 합일은 『향연』의 에로스론에서 그 전거를 찾을 수 있는데, 즉 아름다움의 원천인 신에 대한 철학적 사랑을 통해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렇게 신에 이르기까지 상승을 거듭한 영혼은 정점에 이르고 나서 세계 내로 하강하여 자신이 얻은 지혜를 모두와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감각계와 정신계 모두에 걸쳐 있는 양서적(ampibion)인 성격을 지니며, 이에 따라 감각적 세계를 정신계의 질서에 따라 다스리는 일 역시 영혼의 과업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감각계를 다스리는 일은 세계가 신의 섭리에 의해 관장되고 보살펴지는 일에 상응한다. 여기서 섭리는 신의 자의에 의해 임의적으로 작동한다기보다는 자연의 이치 즉 자연법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 자연의 법칙은 인간의 도덕적 및 정치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이성의 완성이라는 플로티누스의 가르침은 초월적인 신과의 합일을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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