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4장 요약(完)

IV. 『형이상학』의 신학

제12권은 여태까지의 실체론과 이제 전개될 신학의 연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제12권의 전반부에서는 첫째가는 존재자로서의 감각적 실체를 이루는 원리들이 재서술되며, 그 다음에는 그 생성 이론이 요약적으로 다시 제시된다. 여기서 생성의 내재적 원인으로 질료, 형상, 결여의 세 가지가 제시된다. 질료는 변화의 기체이고, 형상은 생성의 지향점으로서의 상태이며, 결여는 형상의 결여이다. 한편 생성은 운동인(to kinoun)을 그 외재적 원인으로 갖는다. 질료와 형상은 생성의 원인이지만 그 스스로 생성되지는 않으며, 한편 운동인은 생성되는 것과 동종적이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 범주의 원리들과 다른 범주들의 원리가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 답한다. 그에 의하면, 양자의 원리는 기본적으로는 다르지만, 보편적 및 유비적으로는 동일하다. 개별 실체가 각기 다른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각 실체의 원리는 다르지만, 동종의 실체가 동종의 질료와 형상을 지닌다는 점에서는 실체들 간에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원리가 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형태와 다른 몸을 지니지만, 이들이 모두 사람의 형태와 사람의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또 실체와 다른 범주인 양이나 성질 등의 경우 형상, 결여, 질료에 유비되는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 예컨대 실체인 사람과 성질인 색깔 사이에는 ‘영혼:영혼의 결여:몸=하양:검정:표면’이라는 유비가 성립한다.

본격적으로 신학적 논의가 펼쳐지는 제12권의 후반부는 신 존재 증명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증명을 아리스토텔레스 대화편인 『철학에 대하여』의 남은 단편에 등장하는 다른 두 개의 증명들과 비교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존재론적 증명’이라 불리는 첫째 증명은 다음과 같다. 있는 것들 중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좋다. 그런데 좋은 것이 존재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의 연쇄가 있으며, 이 연쇄의 끝에 가장 좋은 것이 존재한다. 이것이 신이다.¹ 둘째 증명은 목적론적 증명이라 불릴 수 있다. 우리는 제작물로부터 그 제작자를 추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천체들 및 자연 사물들 및 이들의 질서정연한 운동으로부터 이 질서의 제작자를 추론할 수 있다. 이 제작자가 신이다.

한편 『형이상학』에서 등장하는 귀류법적 논증은 우주론적 증명이라 불릴 수 있다. 실체가 가멸적이라고 가정하자, 실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첫째가는 것이므로, 실체가 가멸적이라면 모든 것이 가멸적이다. 그런데 시간은 가멸적이지 않다. 시간이 생성되거나 소멸된다면 시간이 생성되기 이전이나 소멸되는 이후가 있어야 하는데, 이전이나 이후는 이미 시간적 개념인 까닭에 이는 부조리하다. 따라서 시간은 영원하다. 그런데 시간은 운동과 동일하거나 운동의 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영원하다면 운동 역시 영원하다. 즉 영원한 운동이 존재한다. 그런데 영원한 운동이 있다면, 이 운동의 원인이 되면서 그 스스로는 운동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이 부동의 원동자가 바로 신이다.

이어서 신적 사유의 특징 역시 신학의 논의 주제이다. 신은 완전한 현실성인 까닭에 자기 안에 가능적인 것을 지니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은 질료를 포함하지 않은 순수 형상이다. 또 신은 사유 외에 다른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의 사유 활동은 사유 능력(가능성)이 사유 대상을 만나 현실화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이 점에서 사유 대상에 의존적인 반면, 신의 사유 활동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유하며 이 점에서 다른 대상에 의존적이지 않고 전적으로 현실적이다. 여기서 신의 자기사유가 타자에 대한 사유를 포함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해석적 및 철학적인 논쟁이 있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은 목적론을 논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세계는 그 안에 좋음을 포함하고 있으나 궁극적인 좋음은 신 안에 존재한다. 또 세계의 내적 질서는 필연적·법칙적으로 운동하는 달 위의 천체들과 우연적 변화를 겪는 달 아래의 자연 사물들로 이루어진다.

이 부분에서 브렌타노나 롤페스 등의 연구자들은 세계의 이 질서가 합목적적이며 신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는 주장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귀속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접한)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확정적으로 귀속되기 어렵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사물들 사이에 자연의 사다리(scala naturae)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 위계 속에서 상위 존재자와 하위 존재자 사이에는 목적-수단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소는 사람에게 먹히고 쟁기질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상위 존재자는 하위 존재자를 자신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는 있지만, 이때 성립하는 목적-수단 관계는 존재자 상대적이다. 가령 소는 오직 사람의 관점에서만 밭일의 수단이다. 이러한 상대적 목적이 아니라 각 생명체가 지니는 고유한 목적은 신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중 천체들은 영원한 운동을 통해, 달 아래의 생명체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종을 이룸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신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론적 질서는 의식적이 아닌 무의식적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욱 합당하다.

1. 영원한 원동자의 존재와 작용

세계에는 두 종류의 자연적 실체와 한 종류의 부동적 실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중 후자에 대해 영원하고 부동적인 실체의 존재를 주장한다. 왜 모든 것이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가? 설령 영원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영원할 뿐만 아니라 부동적인 것의 존재가 요청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크게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자연 세계 내의 운동은 영원하며, 자연 세계의 영원한 운동은 이를 낳는 첫째 하늘(prōtos ouranos)의 영원한 운동을 전제하며, 첫째 하늘의 운동은 다시 이를 낳는 부동의 원동자를 전제한다.

부동의 원동자 논증의 첫 번째 단계는 운동의 영원성 논증이다. 만일 첫째가는 존재자인 실체들이 가멸적이라면, 시간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멸적이다. 그런데 시간이 가멸적이라면, 시간이 생성되기 이전(prōteron)과 시간이 소멸한 이후(hysteron)가 있어야 하는데, 이전과 이후는 시간 없이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시간은 영원하다. 그런데 시간은 운동과 동일하거나 운동의 한 상태(pathos)이다. 그러므로 운동 역시 영원하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원환 운동을 영원한 운동으로 제시한다.

영원한 운동이 존재한다면, 이 운동을 낳는 원리 또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원리는 현실적인 활동을 그 본질로 지녀야 한다. 왜냐하면 원리가 가능적인 능력을 포함할 경우, 이 능력은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론이 운동을 낳는 원리에 대한 설명 없이 단순히 영원한 것들을 가정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혼돈으로부터 생성되었다고 주장했던 철학자들을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이들은 이들이 가정하는 사물들의 혼돈 속 운동을 가능케 하는 원인에 대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레우키포스나 플라톤은 영원한 운동에 대한 생각에 다다랐다는 점에서 이들보다는 낫지만, 역시 이 영원한 운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므로 “항상 똑같은 것들이 원환 운동 속에 있거나 아니면 그와 다른 방식으로 있었”다(1072a8-9). 이 구절은 추정컨대 영원히 원환 운동을 하며 영속하는 달 위의 천체들과 생성하고 소멸하는 달 아래의 자연 사물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전자의 원인은 첫째 하늘이며, 후자의 원인은 천체들 중 하나인 태양이다.

한편 첫째 하늘 자체는 영원히 운동하는 천체들을 낳지만, 그 스스로도 운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하늘은 운동의 궁극적 원인이 아니라 중간자(meson)일 뿐이며, 첫째 하늘을 운동하도록 하는 원인이 요청된다. 이 원인은 스스로 운동하지는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운동하도록 하는 것, 부동의 원동자이다.

부동의 원동자는 어떻게 그 스스로는 운동하지 않으면서도 운동을 낳는가? 부동의 원동자는 욕구의 대상(to orekton)이자 사유의 대상(to noeton)이 됨으로써 첫째 하늘의 운동을 낳고, 첫째 하늘이 다시 다른 운동들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운동의 원인이 된다. 어떻게 부동의 원동자는 욕구의 대상이자 사유의 대상이 되는가? 그에 대한 논증은 다음과 같다. 부동의 원동자는 사유 대상 중에서 첫째가는 것이다. 첫째가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이다. 그런데 욕구는 항상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사유를 그 시작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부동의 원동자는 욕구의 첫째가는 대상이다. 다르게 말하면 부동의 원동자는 목적(to tou heneka)이다. 이때 목적은 과정 속에서 현실화되어야 하는 일상적인 목적과 달리, 현실화될 필요가 없는 작용이다.

부동의 원동자는 완전히 현실적인 것인 까닭에 다르게 있을 수 없다. 즉 필연적이다. 또한 이는 가장 좋은 것으로서 욕구의 대상이 되어 모든 사물들의 운동을 낳는 방식으로 만물의 원리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를 ‘최선의 생’(diagogē)이라 부르는데, 이 명칭의 의미는 인간의 사유와 대비됨으로써 명확해진다. 인간의 사유는 능력의 상태에서 사유 대상을 받아들임으로써 현실화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신의 사유는 가능적인 상태가 아니라 항상 현실적인, 즉 영원한 활동 중에 있기 때문에 최고로 좋은 삶이다.

종합하자면, 신은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움직이게 하고, 질료를 포함하지 않는 순수 형상이며, 크기나 부분을 지니지 않는 단순한 것이고, 스스로는 어떤 작용도 받지 않는 채 다른 것에 작용하며, 영원불변한 것이다.

2. 신적인 정신: 사유의 사유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신의 사유 활동과 관련된 문제들을 제기하고 이에 답한다. 먼저 신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신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거나, 자기와 다른 대상을 생각하거나, 자기 자신을 생각하거나 셋 중 하나일 터이다. 일단 첫째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에게는 아무 위엄도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1074b16-17). 둘째 경우는 가변적인 것을 생각할 경우와 불변하는 것을 생각할 경우로 나뉜다. 신이 가변적인 것을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유의 고귀함은 사유 대상에 따라 결정되는 까닭에 가변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사유의 고귀함을 그만큼 떨어뜨릴 터이기 때문이다. 둘째 경우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불변하는 것이면서도 신과 다른 것이 신의 사유 대상이라면, 신의 사유 활동은 그 대상에 의존할 터이고, 결국 가장 좋은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자기 자신을 사유한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이때 신의 사유 활동이란 앞서 서술되었듯 능력에서 활동으로의 이행이 아니라 항상 활동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신이 순수 현실적인 사유 활동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신은 결론적으로 사유 활동에 대한 사유 활동(noēsis noeseos)이다.

인간의 사유는 일차적으로 다른 대상과 관계하고 한낱 부수적으로(en parergōi)만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반면, 신의 사유는 오직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 이는 인간이 질료와 형상의 복합체인 한편 신은 질료를 갖지 않는 순수 형상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질료를 갖지 않는 순수 형상의 사유 활동과 사유 대상은 동일하다. 이 주장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뒷받침은 『영혼론』 제3권 4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혼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유 작용을 사유 주체와 사유 대상이 하나가 되는 일로 규정한다.

복합체가 부분들로 구성된 전체인 까닭에 변화에 노출되는 반면, 질료를 갖지 않는 순수 형상적 존재자는 부분들로 나뉠 수 없는 단순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적 사유의 대상 역시 단순하다.

3. 선의 원리와 자연 세계의 질서

『형이상학』의 마지막 논의는 세계의 좋음에 관한 목적론적인 논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이 세계의 질서에 내재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보다 궁극적인 선이 그러한 질서를 가능케 하는 신에 귀속된다고 말한다. 이미 언급되었듯, 이 중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들은 필연적이고 규칙적이며 영속적인 운동 중에 있는 천체들과, 우연적인 변화에 노출되어 있는 가멸적인 자연 사물들로 나뉜다.

마지막 부분은 반대되는 이론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박을 담고 있다. 먼저 모든 사물이 대립되는 것들로부터 생성된다는 주장은, 그 생성을 가능케 하는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대립되는 것들은 있지 않을 수도 있는 우연적인 것인 까닭에 그 스스로는 운동의 원리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이들은 가변적 및 가멸적인 것이며, 그 작용은 항상 능력에 후행하는 까닭에 영원한 것들의 존재 원리는 더더욱 될 수 없다.


¹ 본문에는 연쇄에 관한 언급이 나오지 않지만, 이해를 위해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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