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험성과 필연성

Plantinga 는 The Nature of Necessity란 책에서 선험성 (a priori) 과 필연성 (necessity) 을 구분합니다. 플란팅가의 예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내가 생각한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사실이지만 필연적으로 사실은 아닙니다. 두번째, sin (54) 의 계산은 필연적이지만 제가 사인/코사인 차트를 보고 답을 유추하기 때문에 이는 선험적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예시들로 플란팅가는 선험성과 필연성을 구분합니다.

제가 듣기론 플란팅가 덕분에 현대 형이상학에서는 선험성과 필연성을 구분한다고 합니다. 확실히 칸트도 선험성과 필연성을 구분하지 않고 쓴다는 말을 들었어서 (틀렸으면 지적바랍니다), 플란팅가 전에는 선험성과 필연성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되긴 합니다. 근데 한 편으로는 누군가는 플란팅가 전에 구분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혹시 플란팅가 전에 철학사에서 선험성과 필연성을 구분한 사례를 알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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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자신의 용어로는, 필연성은 선험성의 징표(Merkmal)입니다. 칸트에 의하면 "필연성과 함께 생각되"거나 "그 자신 다시금 필연적인 명제로서 타당한 명제로부터 도출"되는 명제는 선험적입니다(B3). 이런 의미에서 칸트에서 필연성과 선험성은 확실히 모종의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한편 선험성과 필연성의 구분은 플란팅가 외에도 1972년 크립키가 『이름과 필연』에서 제시한 바 있습니다. 크립키는 서술하신 바대로의 플란팅가가 제시한 이유와 비슷한 이유에서 양자의 동일시를 거부합니다. 크립키에 의하면, 선험성은 명제가 어떻게 알려지는가에 관련하는 인식론적 개념인 반면 필연성은 명제의 참의 양상에 관련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입니다. 어떤 명제가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해서 그 명제가 꼭 선험적으로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드신 예와 비근한 예시이지만, 골드바흐 추측이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해도, 우리가 수학적 증명을 통해 이 추측을 지식으로 갖지 않는다면 이는 선험적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크립키는 '선험성'과 '필연성'이 상호 교환 가능하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Kripke, S. (2014). 『이름과 필연』, 정대현, 김영주 역. 필로소픽. 5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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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칸트 역시 선험성과 필연성에 대한 개념적 구분은 뒀지만 현대에서 하는 것처럼 구분을 두진 않았군요..

아, 크립키가 플란팅가 전이었군요. 1m짜리 막대 이름을 m이라고 두었을 때, 그 막대가 1미터인 게 선험적이지만 필연적이지는 않다, 이런 예시도 들었던 것 같네요 (다만 크립키가 플란팅가 전인 줄 몰랐네요. 분석 형이상학사도 좀 외워야겠네요).

@TheNewHegel 님이 중세에 관심이 크시진 않은 걸로 알지만, 혹시 고대나 중세에도 그런 구분이 있는지 아시나요? 아시다시피 요즘 데카르트를 하는데, 데카르트가 선험성과 필연성의 구분을 헷갈려하긴 하지만 어렴풋이 구분을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데카르트 이전에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혹시 아시는 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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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토론에 약간만 덧붙이자면, '선험성'의 범위에 대해서 크립키는 살짝 다른 정의를 내립니다.

a priori truths are those which can be known independently of any experience (Saul Kripke, Naming and Necessity, HUP, p. 34)

크립키는 이때 선험적 참은 경험 없이도 '알 수 있는 것'일 뿐,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도 얼마든 무방하다고 말합니다.

some philosophers somehow change the modality in this characterization from can to must. They think that if something belongs to the realm of a priori knowledge, it couldn't possibly be known empirically. This is just a mistake. (p. 35)

특정 자연수가 솟수인지 아닌지 컴퓨터로 계산해서 알아내는 걸 두고 크립키는 선험적 참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사례로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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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고중세철학에도 선험성이나 필연성 개념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은 것 같긴 한데, 그쪽 분야는 잘 몰라서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저도 이 부분은 한 번 관련 전공자분들의 답변을 들어볼 수 있기를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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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에 대해서는 "칸트는 선험성과 필연성을 구분했지만, 결과적으로 동일한 외연을 가진다" 쯤으로 하는 것이 아마 적절할 것입니다.

칸트 이전과 이후의 차이에 대해서는 보통, 칸트 이전에도 선험/후험, 필연/우연, 분석/종합에 대한 (혹은 상응하는) 논의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선험적=분석적=필연적 명제", "후험적=종합적=우연적 명제"의 이분법이 당연시되었던 반면, 칸트는 분석/종합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모든 분석적 판단은 선험적 (따라서 필연적)이지만, 모든 선험적 판단이 분석적인 것은 아니다; 즉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따라서 필연적인) 판단이 있다"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죠.

흥미로운 것은, 이 선험적-종합적 필연성을 명시화한 것은 칸트이지만, 데카르트의 코기토 논증이 사실상 이러한 선험적-종합적 필연성을 나타낸 것 아니냐 하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20세기에는 "선험적 논변 transcendental arguments"라고 잠시 유행했던 적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형식을 가집니다.

전제1: Q 이다. (Q라는 지식/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제2: Q가 가능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 P이다.
결론: P 이다.

이러한 논증이 진짜 종합적인지 아니면 분석적 논증의 변종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의 필연성과 종합적 성격을 지지하는 쪽은 가령

이러한 진술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이들은 해당 논증이 선험적이면서 필연적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다른 흥미로운 예시들 역시 참조해볼만 합니다:

"For example, Descartes cannot assert truly that Descartes does not exist [...]. I can never truly say (aloud) ‚ 'I am not now speaking‘ [...]“ (B. Stroud: Understanding human knowledge; p.22)

여담으로, 현대 철학에서는 선험성은 인식론적 개념이고 필연성은 형이상학적 개념이라는 크립키식 구분이 어느정도 보편화된 것 같은데, 이것이 과연 유의미한 구분인지 개인적으로 의심스럽습니다. wildbunny 님이 지적하셨듯, 크립키의 선험성 개념은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유보를 통해서 사실상 유명무실화 되었고, 말씀하신 1m의 규정이 선험적 지식이라는 크립키의 주장 역시 해괴하다고 생각되어서요. 필연성에 대한 크립키의 논증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에 비해서 선험성에 대한 크립키의 논변은 그만큼 결정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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