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지식에 대한 전통적 정의 — 그 문제점 및 해결 방향
예비적 사항
한 명제로 표현되는 지식은 인식 주관에 상대적이다. 나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프리카 콩고에 사는 우탕가는 그러한 사실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식은 시간에 상대적이다. 과거에는 잘 알던 사실도 시간이 지나서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은 인식 주관과 시간에 상대적이므로, 인식론은 "S가 t에 P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한다. 이때 S는 지식을 소유하는 인식 주관이고, P는 지식의 내용을 이루는 명제이며, t는 S가 P를 아는 시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편의 상 시간에 대한 논의를 생략하고 "S가 P를 안다"에만 주목한다.
지식을 정의하기에 앞서 철학에서의 정의가 무엇인지 간략히 살펴보자. 정의가 되는 항목은 피정의항definiendum이라 불리고, 정의를 수행하는 항목들은 정의항definiens이라 불린다. 한 개념의 정의는, 정의항들을 나열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때 정의항 각각은 피정의항의 필요조건이고, 정의항들의 결합은 피정의항의 충분조건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는 경우 정의는 실패한다.
지식에 대한 전통적 정의
전통적 정의에 따르면 지식은 인식적으로 정당한 참된 믿음이다. 즉 (1)-(3)이 'S가 P를 안다'의 정의항들이다.
(1) S는 P를 믿는다.
(2) P가 참이다.
(3) P를 믿는 것이 S에게 인식적으로 정당하다.
어떤 경험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정보를 표상해야 한다. 그리고 정보를 표상하는 것은 그에 대응하는 명제를 믿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표현하는 명제를 믿어야만 한다. 이것을 지식을 위한 믿음 조건이라 한다.
한 명제가 거짓인 경우, 그 명제에 대한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지식은 그것의 내용을 표현하는 명제가 참이어야만 한다. 이것을 지식을 위한 진리 조건이라 한다.
한 믿음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적절한 근거에 토대하지 않을 경우 지식이 될 수 없다. 즉 S가 P를 적절한 근거에 의거하여 믿을 때에만, S는 P를 안다. 여기서 인식론자들은 '적절한 근거에 의거함'을 '인식적으로 정당함'으로 표현한다. 이것을 지식을 위한 인식정당성의 조건이라 한다.
믿음 조건
S가 P를 알기 위해 S가 P를 믿어야 한다면, 믿음이란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믿음의 여러 유형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아야 한다.
현대 심리철학의 견해에 따르면, 믿음이란 기억 장치 내에 저장된 명제와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하는 심리 상태이다. 이 입장에서는 어떤 명제가 한 사람의 기억 장치 내에 저장될 수 있으며, 그러한 명제에 대해 그 사람은 믿음, 욕구, 두려움 등의 여러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을 명제적 태도propositional attitude라고 하고 여기에 믿음이 속한다. 따라서 믿음이란 인식 주관, 명제,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련 방식이라는 세 요소로 이루어지는 심리 상태이다.
인지과학에서는 믿음을 이루는 명제가 의식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따라 믿음을 의식적 믿음과 무의식적 믿음으로 구분한다. 명제가 의식에 떠올라 있는 경우 그러한 믿음을 의식적 믿음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무의식적 믿음이라 한다.
믿음은 현재의 나의 인식적 행위에 인과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활성화된 믿음activated belief과 활성화되지 않은 믿음unactivated belief으로 나뉜다. 기하학의 정리를 증명할 때, 이 증명은 공리로부터의 추론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공리에 대한 믿음은 현재의 나의 인식적 행위에 인과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활성화된 믿음이다. 반면 같은 상황에서 '어머니가 자상하다'는 믿음은 활성화되지 않은 믿음이다.
이때 모든 의식적 믿음은 활성화된 믿음이다. 왜냐하면 믿고 있는 명제가 의식에 떠오르기 위해서는 그 명제를 의식에 떠올리는 인식적 행위가 일어나야 하고, 그 믿음은 그러한 인식적 행위에 인과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반면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명제가 의식에 떠오르지 않은 상태로 나의 인식적 행위에 인과적 영향을 미치는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면서 운전이라는 인식적 행위를 하는 경우, 주변 환경에 대한 무의식적 믿음이 운전에 인과적 영향을 미친다.
또 믿음은 그를 이루는 명제가 기억 장치에 새겨져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나의 믿음은 내 기억 장치에 그를 이루는 명제가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반면 '케냐의 야생 코끼리가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제를 보라. 이 명제는 내 기억에 저장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내가 믿는 명제이다.
기억 장치에 저장되어 있지 않는 명제는 내가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에 기인하는가? 이에 대한 가장 쉬운 답변은, 전자의 명제는 나의 인식 체계에 새겨진 지식들로부터 쉽게 추론이 가능하지만, 후자의 명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단, 얼마나 쉽게 추론이 되어야 그 명제를 믿을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정의되어 있지 않고, 그것이 가능한지도 미지수이다.
진리 조건
믿음 조건에서 믿음의 유형을 살펴본 것처럼, 여기서는 어떤 명제가 진리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진리의 본성에 대한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상응론, 확증 이론, 그리고 실용론이 있다.
진리 상응론은 P라는 믿음은 P라는 사실과 대응할 때 참이라고 주장한다. 확증 이론은 P라는 믿음은 그 믿음이 이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이어서 수용가능할 때 참이라고 주장한다.[1] 다른 믿음들과 이상적으로 정합적인가에 의하여 P의 진리치가 결정되므로, 확증 이론을 진리에 대한 정합론이라고도 한다. 실용론은 P라는 믿음은 그 믿음이 결과적으로 유용할 때 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이론은 모두 비판에 직면한다. 진리 상응론의 주장대로 명제와 사실의 대응 여부가 진리의 정의가 되기 위해서는 사실이란 무엇인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 체계와 독립적인 사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애초에 그 자체로서 명제적 내용을 지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확증 이론도, 데카르트의 가정대로 전능한 악령이 우리를 기만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이상적으로 합리적인 믿음도 거짓일 수 있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또한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믿음이 참인 경우와, 실용적이지만 거짓인 믿음이 있다는 점에서 실용론도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믿음 조건과 진리 조건은 인식론의 주요 주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간략히만 살펴보았고, 이것이 추후의 논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다.
인식정당성 조건
인식정당성 조건은 인식론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상세한 논의는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본 절에서는 인식정당성 개념과 관련하여 모든 인식론자들이 기본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사항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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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정당성은 서술적 개념이 아니라, 평가적 개념이다. 한 믿음이 인식적으로 정당하다고 하는 것은 그 믿음이 적절한지/부적절한지, 옳은지/그른지, 바람직한지/바람직하지 않은지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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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정당성이 평가적 개념이라면, 그것은 어떤 기준에 의해 평가하는 개념인가? 그 기준은 진리와 연관되어 있다. 영수가 중병을 앓고 있을 때, 그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고 영수가 믿고 그 믿음이 영수의 치유에 도움을 준다면 그 믿음은 유용성의 관점에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식적으로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 믿음이 유용성의 기준에서 바람직하다는 근거는 있을지라도, 그 믿음이 참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평가를 진리 연관적 평가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식적 목표를 진리의 획득이라 하고, 인식정당성의 평가 기준은 어떤 명제를 믿는 것이 그 근거에 비추어볼 때 인식적 목표에 기여하는지의 여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진리의 획득이란, 단순히 참의 획득의 극대화가 아니다. 참의 극대화를 위한다면 모든 것들을 믿으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따라서 인식적 목표는 참의 극대화와 거짓의 극소화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목표는 복수의 믿음에 대해 참의 수를 극대화하고 거짓의 수를 극소화하는 것과 관련하여 정의되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개별적 믿음에 대해 그것이 참이면 믿고, 거짓이면 믿지 않는 것으로 확장할 수 없다. 두 목표가 상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실제로 똑똑하지 못한데(또 똑똑하지 못하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충분한데), 내가 똑똑하다고 믿는 것이 내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도록 부추겨 더 많은 참된 믿음과 더 적은 거짓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나는 똑똑하다'라는 믿음은 개별적 믿음에 적용되는 목표에 한해서는 인식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 그 믿음을 이루는 명제가 참이 아니라는 근거가 충분하기 때문에, 참을 믿고 거짓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 명제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집합에 대해 적용되는 목표에 한해서는 인식적으로 정당하다. 그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인 믿음의 극대화와 거짓인 믿음의 극소화에 기여한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식적 목표를 정의할 때, 개별적 믿음의 차원과 믿음의 집합의 차원을 적절히 조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적절히 조화시킬 것인지는 해결되지 않은 중요한 물음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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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은 거짓일 수 있으며, 이것을 인식정당성의 오류가능성fallibility of epistemic justification이라 한다. 예컨대, 지각적 믿음들은 그 믿음에 관한 감각적 경험의 존재에 의해 정당하게 되지만, 실제로 그 믿음은 거짓일 수 있다. 또한 폐암에 대하여 권위와 실력이 있는 의사가, 실수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서, 환자를 진료하여 이 환자가 폐암이라고 진단했다고 하자. 환자가 폐암이라는 믿음은 인식적으로 정당하지만, 거짓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포퍼가 지적했듯, 과학 이론은 본성 상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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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근거에는 두 유형이 있다. 한 믿음의 근거가 그 믿음의 참을 보장할 때, 그 근거를 확정적 이유conclusive reason라고 한다. 반면, 한 믿음의 근거가 그 믿음의 참을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참일 개연성을 높여줄 때, 그 근거를 비확정적 이유inconclusive reason라고 한다. 각각의 근거과 그가 지지하는 믿음은 연역 추론과 귀납 추론의 구조를 갖는다.
확정적 이유만이 그가 지지하는 믿음을 인식적으로 정당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근거가 그가 지지하는 믿음의 참을 보장한다는 것은, 그 근거에 이미 믿음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확정적 이유만이 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의 근거가 된다면, 우리는 인식적으로 정당한 방식으로 지식을 확장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비확정적인 이유도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비확정적인 이유를 통해 정당하게 되는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근거의 본성 상 그 믿음은 참이 보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식적으로 정당한 믿음은 거짓일 수 있으며, 이것이 인식정당성의 오류가능성을 초래한다.
- 믿음은 그 믿음을 참이게 하는 데 기여하는 긍정적 근거만으로 정당하게 되지 않는다. 그 믿음이 거짓임을 보이는 추가적인 근거가 있다면 그 믿음은 정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부정적 근거를 반대 증거counter-evidence라고도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정당성의 결정은 긍정적 근거과 부정적 근거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인식정당성의 결정은 긍정적 근거의 총량과 부정적 근거의 총량의 단순 가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정적 근거는 인식정당성에 획일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고, 긍정적 근거와 부정적 근거가 입체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인식정당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입체적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한 근거가 인식정당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을 살펴보자.
한 믿음의 인식정당성을 말소하는 부정적 근거를 격파자defeater라 부른다. 상술했듯 격파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논박적 격파자rebutting defeater이고, 다른 하나는 밑동 자르는 격파자undercutting defeater이다. 논박적 격파자란 문제의 믿음을 직접 공격하여 그 정당성을 격파하는 격파자를 말한다. 밑동 자르는 격파자란 문제의 믿음을 직접 공격하지 않고, 그 믿음의 긍정적 근거와 그 믿음 사이의 지지 관계를 공격함으로써 인식정당성을 손상시키는 격파자를 말한다.
그림2.1. 근거들의 입체적 상호작용
이제 상이한 근거들이 어떻게 입체적으로 상호작용하여 한 믿음의 인식정당성을 결정하는지 알아보자(그림2.1.). 믿음 P는 t1의 시점에서 PG라는 긍정적 근거에 의하여 정당하게 된다. 이후 t2의 시점에선 D라는 격파자에 의하여 정당성이 소멸된다. 그런데 t3에서 격파자 D는 D'라는 또 다른 격파자에 의하여 격파된다. 그러므로 D는 효력을 상실하여 믿음 P의 정당성이 회복된다. 이러한 과정은 계속해서 나타날 수 있으며, 만약 PG도 믿음이라면, PG에 대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입체적이다.
이러한 근거들의 입체 구조를 탐구하는 분야를 인식 논리epistemic logic라고 하며, 이것은 확률론과 과학철학의 확증 이론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게티어 문제
지식을 인식적으로 정당한 참인 믿음이라고 정의한 전통적 정의는 게티어에 의하여 문제에 직면한다. 게티어는 인식적으로 정당한 참인 믿음이지만 지식이라고 볼 수 없는 두 가지 예시를 제시한다. 즉 믿음 조건, 진리 조건, 인식정당성 조건 각각은 지식의 필요조건일지라도, 이들 조건의 결합이 지식의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두 예시 중 첫째를 윤색해서 제시한다. 아래가 바로 그 예시이다.
"한 회사에서는 한 사람을 과장으로 진급시키기로 되어 있다. 영수와 철호는 이 회사에서 일하는 사원들로서 이 과장직을 놓고 경합하고 있다. 영수는 그 회사의 사장이 철호가 진급할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된다. 그리고 철호의 주머니를 자세히 뒤져보고는 그 속에 열 개의 동전이 있음을 확인한다. 그 결과, 영수는 다음의 명제를 믿는다: (A) 철호가 진급할 것이다. (B) 철호의 주머니에는 열 개의 동전이 있다. 영수는 이제 이 두 믿음들을 전제로 하여 다음의 명제를 믿는다: (C) 진급할 사람은 그의 주머니에 열 개의 동전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상 진급하는 사람은 철호가 아니라, 영수 자신이다. 사장은 진급할 사람에 관한 정보를 비밀로 하기 위하여 거짓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그리고 영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주머니에 열 개의 동전을 갖고 있다."
영수가 (A)와 (B)를 믿음은 적절한 근거에 토대하였으므로 인식적으로 정당하다. (A)와 (B)로부터 (C)로의 추론도 타당하므로 (C)에 대한 믿음 또한 인식적으로 정당하다. 그리고 (C)는 참이다. 실제로는 영수가 진급하고, 그의 주머니에 10개의 동전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수가 (C)를 믿음은 인식적으로 정당한 참인 믿음이다. 그러나 영수는 (C)를 안다고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게티어 문제의 해결책들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식을 다시 정의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지식의 전통적 정의에서 누락되어 있는 조건을 찾으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만, 그 조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를 어떻게 지식의 정의에 포섭할지에서 차이를 보였다. 어떤 이들은 기존의 인식정당성 조건이 너무 약하므로 이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이들은 기존의 인식정당성 조건을 타당하다고 인정하고는 지식에 별도의 필요조건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장들에서 살펴보겠지만, 인식정당성 개념이 상당히 애매하기 때문에 둘 중 어느 주장이 옳은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편의상 후자의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본 절에서는 세 가지 해결책들을 살펴볼 것인데, 선정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들이 가장 잘 알려진 게티어 문제의 해결책이기 때문이고, (2)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지식에 대한 새로운 분석이나 관점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 거짓 전제의 배제
게티어 문제에서 눈에 띄는 점은 영수의 믿음 (C)가 거짓 전제인 (A)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몇 인식론자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 의해 영수의 믿음 (C)은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다음을 지식의 추가적 필요조건으로 제시한다: (E) S의 믿음 P를 정당하게 하는 전제들 내에 어떠한 거짓도 포함되지 않을 때에만, S는 P를 안다.
(E)는 게티어 문제에 대한 꽤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시한다. 영수의 믿음 (C)의 전제들 중 (A)가 거짓이므로, 영수는 (C)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A)가 참이었다고 가정한다면 (E) 조건을 만족하게 되어 영수는 (C)를 안다고 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직관적으로 옳다.
그러나 조건 (E)는 지나치게 강력하여 명백히 지식인 경우조차 지식이 아닌 것으로 분류하는 부작용을 갖는다. 다음의 예를 보라:
"명호는 다음의 네 전제들을 믿는다.
(1) 순자는 명호의 사무실에서 일한다.
(2) 순자가 어제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다.
(3) 옥숙이는 명호의 사무실에서 일한다.
(4) 옥숙이는 어제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다.
순자와 옥숙이는 모두 명호의 오랜 사무실 동료들이며, 이들이 모두 명호에게 어제 대공원에 놀러갔었다고 말한다. 명호는 이들의 말을 의심할 아무 이유도 없다. 이제 명호는 이들을 전제로 하여 다음의 결론에 도달한다.
(5) 나의 사무실에서 최소한 한 사람이 어제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갔다.
그러나 순자는 어린이 대공원에 사실 놀러 갔지만, 옥숙이는 명호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E)에 의하면, 명호의 믿음 (5)는 지식이 아니다. 믿음 (5)의 전제들 중 (4)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호가 (5)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1)과 (2)가 참인 것만으로도 (5)의 참이 보장되므로, (4)가 거짓인지의 여부가 명호의 믿음 (5)가 지식이 되지 못하도록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E)는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 (E*) S의 믿음 P가 거짓 전제에 의존하지 않고서 정당하게 될 수 있는 한에서만, S는 P를 안다. (E*)는 하만G. Harman의 '한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하여는 거짓 전제를 본질적으로 포함하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 거짓 전제를 본질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 전제에 의존하지 않고서 정당하게 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시 (E*)에 따라 명호의 예시를 분석해보자. {(1), (2)}과 {(3), (4)} 각각은 명호의 믿음 (5)를 정당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전제들의 집합이다. 이때 {(3), (4)}는 거짓 전제인 (4)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5)를 정당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1), (2)}는 거짓 전제를 포함하지 않으면서 (5)를 정당하게 하는 데 충분하므로, (E*)에 의해 명호는 (5)를 안다. (E*)는 영수에게도 성공적으로 적용된다. 영수의 믿음 (C)는 거짓 전제 (A)에 본질적으로 의존하므로, 즉 거짓 전제 (A)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C)가 정당하게 되지 못하므로, (E*)에 위배되어 영수의 믿음 (C)는 지식이 아니다.
그러나 (E*)도 여전히 한계를 갖는다. 다음 예를 보라:
"진구의 앞에 화병이 하나 놓여 있다. 이 화병과 진구 사이에 레이저 사진이 끼어 들어와 진구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이 사진은 화병의 사진이어서 레이저 광선이 그것을 비출 때 진구에게는 실제의 화병처럼 보인다.
더욱이 진구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레이저 광선이 작동하고 있다고 믿을 만한 아무런 이유도 갖고 있지 않다. 이제, 이러한 레이저의 작동에 의하여 주어진 감각 경험을 통하여 진구는 자신 앞에 화병이 있다고 믿는다."
'자신 앞에 화병이 있다'라는 진구의 믿음은 인식적으로 정당하며, 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E*)의 조건을 충족하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진구의 믿음은 지각적 믿음이 그러하듯이 감각 경험 자체가 믿음의 근거이다. 감각 경험은 참 또는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진구의 믿음은 어떠한 거짓 전제도 갖지 않는다. 이상의 분석에 의하면 진구의 믿음은 지식이다. 그러나 진구가 자신 앞에 화병이 있음을 알지 못함은 자명하다.
그러나 거짓 전제의 배제를 고집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응수할 것이다: 단순한 지각적 믿음에도 무의식적인 믿음이 전제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무의식적인 믿음이란 '주어진 감각 경험이 실제 대상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이다. 감각 경험만으로 지각적 믿음을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위의 무의식적인 믿음에 의해 매개적으로 추론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전제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감각경험으로부터 지각적 믿음을 추론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이 주장의 배경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신의 지각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시오. 그 과정에 무슨 감각 경험과 믿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매개적 믿음이 포함되어 있소?"라며 반박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내성에 파악되지 않는다고 하여 그러한 매개적 믿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은 우리의 내성의 힘을 과신한 결과이며, 이는 과학적 근거가 희박하다. 현대 인지과학은 내성에 파악되지 않는 많은 믿음들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진구의 '자신 앞에 화병이 있다'라는 믿음을 P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믿음 P는 정당하고 참이지만 지식이 아니다.
(2) 내성적 판단에 따르면, 믿음 P로의 추론은 거짓 전제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3) 한 믿음이 정당하고 참이며 그를 위한 추론이 거짓 전제를 포함하지 않으면 그리고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그 믿음은 지식이다.
(E*)의 비판자들은 (1)과 (2)에 의거하여 (3)을 부정한다. 그러나 하만은 내성의 신뢰성을 비판하면서, (2) 대신 (3)을 먼저 받아들여야 함을 주장한다. 내성은 무의식적인 믿음을 파악하기에 충분치 못하다. 따라서 (2)를 통해 (3)을 부정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고, 오히려 (3)을 무의식적인 믿음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론적 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하만의 주장은 반증불가능하다는 약점이 있다.
이상의 논의에 의하면, 내성에 근거한 직관적 판단을 무시할 수도 없으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2)와 (3) 중 어느 것을 우선하여 받아들일지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인지 과정에 대한 더 많은 과학적, 철학적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 사실과 믿음 사이의 인과
골드만A. Goldman은 지식에 대한 인과론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이론을 통하여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한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그를 참이게 하는 사실과 적절한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지식에 대한 인과론은 앞서 제시된 여러 예시들을 잘 설명한다. 진구의 믿음 '자신 앞에 화병이 있다'는, 이 믿음을 참이게 하는 사실인 실제 화병의 존재와 어떤 인과적 관계도 없다. 따라서 진구의 믿음은 지식이 되지 못한다. 반면 진구가 그 앞에 존재하는 실제 화병을 지각하여, 즉 그 사실에 의하여 자신 앞에 화병이 있음을 믿었더라면 그것은 지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래의 사건에 대한 지식은 미래의 사건이 그 지식에 인과적 영향을 미칠 수 없으므로, 지금까지의 설명에 의한다면 미래의 사건에 대한 지식은 지식이 될 수 없다. 골드만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식을 이루기에 필요한 인과적 연쇄를 사실에서 믿음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인과 관계에 제한하지 않고, 그 이외의 여러 유형들을 제시한다.[2]
그러나 인과적 연쇄의 틀을 통하여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두 가지 난점에 직면한다.
그림 2.2. 믿음에 도달하는 과정에 논리적 추론이 포함된 경우
첫째, 믿음에 도달하는 과정에 논리적 추론이 포함될 경우, 사실과 믿음 사이에 자연스러운 인과 관계를 설정하기가 곤란하다. 믿음에 도달하는 과정에 포함된 논리적 추론이 귀납적 추론이든 연역적 추론이든 상황은 동일하다. 그림 2.2.를 보면, 믿음 A는 믿음 1, 2, 3을 원인으로 하여 성립한다. 그리고 믿음 1, 2, 3 각각은 사실 1, 2, 3을 원인으로 하여 성립한다. 그런데 인과론에 의하면, 믿음 A가 지식이기 위해선 믿음 A을 참이게 하는 사실 A와 인과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이때 사실 A를 인과의 연쇄 속에 배치한다면, 사실 1, 2, 3의 원인의 자리에 놓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실 A와 사실 1, 2, 3 사이에 인과 관계가 존재하는지 매우 불분명하다. 귀납적 추론의 경우, 사실 1, 2, 3은 일반적 사실 A에 대한 개별 사실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 사실, 예컨대, '모든 개는 포유류이다'가 '우리집 강아지는 포유류이다'라는 개별 사실의 원인이 될 수는 없어 보인다. 연역적 추론의 경우, 사실 1, 2, 3은, 예컨대, P, Q, R이고, 사실 A는 (P&Q&R)이라고 하자. 이때 P, Q, R과 (P&Q&R) 사이의 인과 관계가 불분명하다. 따라서 포함된 논리적 추론이 연역적이든 귀납적이든 사실과 믿음 사이에 인과 관계를 설정하기가 곤란하다.
둘째 문제는 골드만 자신이 제시한 예에 의해 드러난다.
"명희는 그녀에게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보이는 시골길을 운전하여 지나가고 있었다. 날씨가 화창한 가을날이었고, 그녀의 시력도 이상적이었다. 주변에 교통량이 거의 없어 명희는 주변의 사물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볼 여유가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수많은 건축물들이 기와집으로 보였는데, 시야에 뚜렷이 나타난 한 건축물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명희는 저것은 기와집이다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은 명희가 지목한 건축물만이 실제로 기와집이고, 나머지 모든 건축물들은 누가 보아도 기와집으로 착각하게끔 정교하게 조작된 가짜 건물들이었다."
명희의 믿음은 그녀의 선명한 지각적 증거에 의하여 인식적으로 정당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 건축물은 기와집이므로 참인 믿음이다. 또한 명희의 믿음을 참이게끔 만드는 사실이 그녀의 믿음의 원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과론에 의하여 명희의 믿음은 지식이지만, 직관적으로 명희가 그 집이 기와집임을 알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 격파불가능성
게티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인식론자들은 지식의 전통적 정의에 격파불가능성 조건을 추가할 것을 주장한다. 즉 한 믿음은 그것이 참이고, 인식적으로 정당하면서, 그에 대한 잠재적 격파자가 없을 때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잠재적 격파자란 무엇인가?
먼저 잠재적 격파자는 앞서 소개한 격파자와 다르다. 앞서 소개한 (현실적) 격파자란 인식 주관에게 파악된 상태로, 그의 믿음의 인식정당성을 격파하는 것이다. 반면 잠재적 격파자는 인식 주관에게 파악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지만, 만약 인식 주관이 그것을 파악한다면 그의 믿음의 인식정당성을 격파하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이상의 예시들을 잘 설명한다. 영수의 경우에는 철호가 진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진구의 경우에는 그의 감각 경험이 실제 화병에 의한 것이 아니라 레이저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각각의 잠재적 격파자가 된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잠재적 격파자가 있으므로 지식이 아니다.[3]
이 이론의 한 특징은 전통적 정의 중 진리 조건을 별도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한 믿음을 이루는 명제 P가 거짓일 경우, "P가 아니다"가 참이다. 그리고 "P가 아니다"는, 지금 나는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파악한다고 가정하면 나의 믿음의 인식정당성을 격파할 것이다. 그러므로 "P가 아니다"는 잠재적 격파자이며, 격파불가능성 조건에 의하여 그 믿음은 지식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모든 거짓인 믿음은 잠재적 격파자를 갖는다. 그러므로 잠재적 격파자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은 진리 조건을 함축한다. 이렇게 격파불가능성 이론은 한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 왜 참이어야 하는지 설명한다는 점에서 장점을 갖는다.
게티어 문제의 교훈: 우연적 참의 배제
한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하여, 그 믿음은 참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참이 우연적이어서는 안 된다. 내가 대한민국의 인구수를, 예컨대 46,376,753명이라고 추측했고, 그 추측에 대한 근거는 없지만 실제로 대한민국 인구수가 46,376,753명이라고 하자. 이 경우 나는 대한민국 인구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나의 믿음은 우연적으로 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인식론의 저술들은 우연적 참을 배제하기 위해 인식정당성 조건을 도입했다. 한 믿음이 적절한 근거에 토대해 있고, 그 믿음이 실제로 참이라면 그것은 우연이 아닐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정당성은 우연적 참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다. 게티어 문제는 바로 이 점을 들춰낸다. 영수의 믿음 (C)는 인식적으로 정당하다. 그 믿음이 적절한 근거 (A)와 (B)에 토대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수의 믿음 (C)를 정당하게 하는 근거 (A)와 (B)는 거짓이며, 영수의 믿음이 실제로 참이 되게 하는 것은, 영수가 진급할 사람이다라는, 그리고 영수의 주머니에 열 개의 동전이 있다라는, 영수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사실들이므로 그 믿음의 참됨은 우연적이다.
인식적으로 정당한 참인 믿음이 우연적으로 참일 수 있음은 개별적 예시에서가 아니라 보편적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데카르트가 도입한 전능한 기만자를 떠올려보라. 이 기만자는 우리의 정신을 조작하여, 실제론 세계와 어떤 접촉도 하지 않음에도,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여러 믿음을 갖도록 한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덧붙이자: 이 전능한 기만자는 아주 자비로운 존재여서, 우리의 모든 믿음이 참이 되게끔 우리의 정신을 조작한다. 이러한 경우, 인식적으로 정당한 참인 믿음들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하여 참이다. 우리의 믿음은 세계와 직접 접촉하여 얻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전능한 기만자에 의해 조작된 믿음일 뿐이며, 하필이면 그 기만자가 자비로웠기에 그 믿음이 참인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게티어 문제는 인식정당성이 우연적 참을 배제하지 못함을 보인 사례들이고, 그렇다면 게티어 문제의 해결책들은 우연적 참을 배제하기 위한 시도들로 이해될 수 있다. 인식적으로 정당하지만 우연적으로 참인 믿음 중 어떤 경우는 그 믿음을 정당하게 하는 전제 중 거짓이 있는 경우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 전제를 배제하라는 조건은 우연적 참을 배제하기 위함이라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 전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식적으로 정당하지만 우연적으로 참인 믿음의 예시를 살펴보았다. 따라서 인과론은 사실과 믿음의 인과 관계를 통하여 우연적 참을 배제하고자 했다. 한 참인 믿음이 그를 참이게 만드는 사실에 인과적 영향을 받았을 경우, 그것은 우연적 참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에 직관과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희의 믿음은 거짓 전제를 포함하지도 않고, 그 믿음을 참이게 하는 사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인식적으로 정당한 참인 믿음이 우연적으로 참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명희의 믿음이 우연적으로 참인 이유는, 그녀가 실제로 기와집과 기와집이 아닌 건물을 충분히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명희가 주변의 건물들이 가짜 기와집이었음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자신이 기와집을 충분히 구별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그런 믿음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즉 한 믿음의 참이 우연적임을 밝히는 사실은 그 믿음의 잠재적 격파자가 된다. 반대로, 한 참인 믿음의 잠재적 격파자는 그 믿음의 참이 우연적임을 밝힌다. 왜냐하면 잠재적 격파자의 존재는 그 믿음이 참일 확률이 낮음을 시사하는데, 실제로 그 믿음이 참이라면 그것은 우연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잠재적 격파자의 배제는 우연적 참의 배제로 이해될 수 있다.
[1] 여기서 '이상적'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책에서도 별 설명 없이 넘어갔는데, 이 책에서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닌가보다.
[2] 본서에서는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지 않고, Goldman(1967)을 참조하라고 한다.
[3] 격파불가능성 조건이 너무 강력하여 지식임이 분명한 경우도 지식이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러한 반례를 찾기도 쉽지가 않다. 나중에 더 고민해서 반례를 찾든, 격파불가능성 조건을 옹호하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