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 읽다가 질문이 생겼습니다

안녕하세요. 홀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서를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 이렇게 질문을 올립니다. 혼자서 읽다 보니 기초적인 부분에서도 계속 막히게 되네요ㅠ 답변 달아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홀게이트의 『헤겔의 『정신현상학』 입문』 2장 2절 의식의 경험 부분을 읽는데 설명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지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대상 자체도 지에 대해 변경된다. 왜냐하면 앞서 존재했던 지는 본질적으로 대상에 대한 지였기 때문이다. 지가 변하면서, 대상도 변한다. 왜냐하면 대상은 본질적으로 이 지에 속했기 때문이다.”(홀게이트, 본문, 42쪽.)

헤겔의 이 주장을 홀게이트는 다음과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의식이 대상과 동렬에 있도록 자신의 지를 되돌려야 할 것 같다는 의미의 변경이 아니라, 이를 통해 지가 먼저 대상에 관한 최초의 개념과 달라지게 되는 바의 변경을 가리킨다. (……) 헤겔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 나는 대상을 X로 간주한다. 2) 나는 대상이 Y임을 알게 된다. 3) 따라서 나의 지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4) 그러므로 나는 나의 지가 대상과 일치하도록 나의 지를 변경해야 하는 것처럼, 나는 그 대상을 X로 인식한 것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5) 하지만 나는 대상에 관한 그와 같은 최초의 견해로 되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자리 잡은 나의 지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대상 자체가 나의 눈에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대상은 단순히 X가 아닌 Y로 입증되었다. 6) 대상에 대한 이러한 변경은 돌이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상에 대해 갖게 된 지는 대상에 대한 틀린 지(知)가 아니라 참다운 지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43쪽.)

그리고 나서 홀게이트는 이러한 참다운 인식의 과정을 ‘일상에서의 자기 교정’과 비교합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이 다람쥐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작은 고양이임을 발견한다. 그 경우, 우리의 이해는 변경되는데, 우리는 하나의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교체하게 때문이다. 대상이 고양이라는 우리의 자각은 그것이 다람쥐라는 최초의 생각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니다. 반면 『정신현상학』에서 기술된 과정은 다르다. 하나의 대상이 다른 대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최초에 받아들인 대상이 저 홀로 최초에 받아들인 것과 다른 것으로 인식되게 된 것이다. 대상은 최초에 X로 간주된다. 엄밀히 말해 X로 인식된다고 할 때, 그것은 X(혹은 단순히 X)가 아니라, Y로 입증된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기술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변증법적인 요소이다. 대상은 단순히 그것이라는 것에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으로 드러난다.”(같은 책, 44쪽)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대상에 대한 앎, 지를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그리고 ‘의식’의 관점에서 ‘인식’이란, 우리 의식 바깥의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과 이 ‘대상에 대한 앎(개념)’을 맞추어보는(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까요?

  2. 저는 홀게이트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이해했습니다. 예컨대 제가 어떤 ‘대상’을 보고 ‘저 대상은 X다’라는 ‘개념’을 가졌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을 자세히 살펴보니 X가 아니라 Y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때 ‘변경’은 Y라는 대상에 맞추어 새로운 개념(‘저 대상은 Y다’)을 불러오는 게 아니라, Y를 인식하는 순간 최초의 판단(‘저 대상은 X다’)이 자동적으로 올바른 판단(‘저 대상은 Y다’)으로 바뀌는 것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나의 개념은 저 대상(X로 보였던 Y)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짧은 식견에서 홀게이트와 헤겔이 강조하는 바는 다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 과정(대상과 개념의 대조)은, 퍼즐맞추기 놀이를 할 때 퍼즐 조각(개념)과 퍼즐판의 빈 칸(대상)을 맞춰보듯이 따로 존재하는 두 대상을 맞추어보는 과정이 아닙니다. 개념과 대상은 처음부터 하나였기에 이러한 변경은 자동으로 일어납니다(여기에 대한 적절한 비유를 들지 못하겠네요.) 그리고 참다운 인식(X가 사실은 Y임을 깨달음)에 도달하면 이전의 상태로는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마치 착시현상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던 그림의 진실을 깨닫자마자 다시는 최초의 그 착시상태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것과 유사합니다.

  3. 이런 식의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개념’과 ‘대상’ 모두 사실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4. 만약 2, 3번이 맞다면, 의아한 점이 생깁니다. 철학자의 관점이 아닌, 의식의 관점에서 볼 때 ‘대상’은 의식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입니다. 그런데 헤겔은 의식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의식이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지 내재적으로 보여주겠다고 말했는데, 막상 여기서는 철학자의 관점, 그러니까 ‘대상’을 우리 의식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이미 우리 의식 안에 존재하는 무언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요?

너무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한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철학 문외한의 질문이라고 생각하시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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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훈승 선생님의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 나타난 ‘즉자’, ‘참’ 그리고 ‘의식의 경험’에 대한 헤겔의 견해>라는 논문을 읽다 보니 제 의문에 대한 답변이 상세하게 적혀 있네요. 결국 헤겔이 <정신현상학> 전체에서 보여주고 하는 바는,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즉자'가 실은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식을 확인/검사하는 과정은 겉보기엔 바깥의 즉자와 우리의 앎을 맞대어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 의식 내부의 즉자와 우리의 앎을 비교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 속에서 인식의 대상(척도)도 '이것'에서 '물'로, '물'에서 '힘/법칙'으로 변합니다.

아직 완전히 이해된 건 아니지만 일단 끝까지 읽어 보면 더 말끔하게 이해될 것 같습니다.

어쩌다보니 모양새가 자문자답하는 웃긴 꼴이 되었네요. 혹시라도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거나, 덧붙여주실 만한 내용이 있으면 코멘트해주십시오. 많은 도움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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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단락이 @xylitol 님이 갖고 계시는 의문을 많이 풀어드릴 것 같습니다:

One can have a more determinate grasp of this contradiction and the removal of the contradiction if, first of all, one is reminded of the abstract determinations of knowing and truth as they come before consciousness. That is, consciousness distinguishes something from itself while at the same time it relates itself to it. Or, as it is expressed: This something is some-thing for consciousness, and the determinate aspect of this relating, or of the being of something for a consciousness, is knowing. However, we distinguish this being-for-another from being-in-itself. That which is related to knowing is just as much distinguished from knowing and is posited as being also external to this relation. The aspect of this in-itself is called truth. Just what might genuinely be there in these determinations is of no further concern for us here, as our object is knowing as it appears, and hence its determinations are also at first taken up as they immediately present themselves, and thus the way that they have been grasped may well be the way that they present themselves (§82, my emphasis).

  1. 여기서 보다시피, 이라는 것은 현대 철학에서 이해하는 앎과 다릅니다. 현대철학에서는 정당화되고 참인 믿음과 같은 것을 앎이라고 하지만, 위 단락에서 보면 헤겔에게 앎이란 훨씬 덜 제한적입니다. 의식이 물체에 갖는 관계의 규정적 면모니깐요. <정신현상학>에서의 개념과 인지에 대해서는 저도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 자체로도 획일화된 해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이 부분은 @xylitol 님의 해석의 여지가 있는 부분 같습니다.

2번부터 4번까지는 저도 한 번 의문을 가졌던 질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제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헤겔은 의식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의식이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지 내저적으로 부여주겠다고 말했

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정신현상학>은 그 반대의 목표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즉,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어떤 한계에도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반박을 하는 책이 <정신현상학>이거든요. <정신현상학>을 읽은 이후에만 존재와 생각이 통일을 이룬다는 가정 하에 <대논리학>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존재와 생각의 통일이란 생각 방식이 존재 방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 방식들은 존재 방식이고, 존재 방식 중에는 우리가 모르는 존재방식도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헤겔은 우리가 존재 방식을 모르는 초월적인 존재같은 것들을 부정하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헤겔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회의적 편견들은 없앤다는 취지를 갖고 <정신현상학>을 전개시키고, 그렇기 때문에 의식의 한계를 없앤다는 것이 <정신현상학>의 취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회의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보겠습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어떤 존재들이 우리의 인지 밖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지가 그 무언가를 왜곡시킨다고 하죠 (§73). 그리고 헤겔은 이에 이렇게 말합니다:

Meanwhile, if the concern about falling into error sets up a mistrust of science, which itself, untroubled by such scruples, simply sets itself to work and actually cognizes, it is still difficult to see why on the contrary a mistrust of this mistrust should not be set up and why one should not be concerned that this fear of erring is already the error itself. In fact, this fear presupposes something, and in fact presupposes a great deal, as truth, and it bases its scruples and its conclusions on what itself ought to be tested in advance as to whether or not it is the truth. This fear presupposes represen- tations of cognizing as an instrument and as a medium, and it also presup- poses a difference between our own selves and this cognition; but above all it presupposes that the absolute stands on one side and that cognition stands on the other for itself, and separated from the absolute, though cognition is nevertheless something real; that is, it presupposes that cognition, which, by being outside of the absolute, is indeed also outside of the truth, is nevertheless truthful; an assumption through which that which calls itself the fear of error gives itself away to be known rather as the fear of truth (§74).

즉, 회의주의가 하고 있는 전제는 절대자가 우리 인지 밖에 있다라는 것이고, 그 전제에 의문을 품는 것이 <정신현상학>의 시발점입니다. 회의주의의 전제 자체에 의문을 갖는 것이지요. 이것을 염두에 두고 4번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헤겔은 절대자가 우리의 인지 밖에 있다는 전제에 물음을 갖는 것입니다. 즉, 절대자가 우리의 인지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그 말인 즉슨, 우리가 우리의 인지 밖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 <정신현상학>을 전개시키면서, 사실은 우리의 인지 밖에 있지 않았다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혹은 답글에서도 말씀하셨듯이,

와 같이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훌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은 괜찮은 책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훌게이트가 글을 아주 쉽게 쓰진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헤겔의 원문을 읽고, 그것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을 하고 읽었을 때 비로소 훌게이트의 글이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훌게이트 책에 너무 의존을 하기보단, <정신현상학> 원문을 위주로 읽으면서, 충분히 생각을 해봤다 싶으면 훌게이트를 읽으면서 원전과 비교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훌게이트 입문서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철학에도 포함되는 것이겠습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는 X를 하기 위해서 Y의 기본 지식이 필요한데, Y의 원전을 읽게 되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기 때문에 Y의 입문서를 읽는 경우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원전 위주로 가는 것이 바랍직하다고 생각돼네요).

+) 또, 훌게이트가 좋으시다면, Houlgate - Thought and Being in Kant and Hegel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2-4번에서 가지셨던 의문을 <정신현상학 입문>보다 더 자세히, 그리고 잘 풀어냈다고 생각합니다.

+) 자문자답하는 게 어떻게 보면 웃길 수 있겠다만, 철학 공부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 대부분이 자문자답은 물론이고, 자신의 예전 주장 비판 등을 수시로 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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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대로 이해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 합니다. 관련한 유의미한 서술이 정신현상학 서론(Introduction) 12번째 문단에 나옵니다.

If we designate knowing [앎; 지] as the concept [개념], but designate the essence, or the true, as what is or the object, then the examining consists in seeing whether the concept corresponds to the object. However, if we designate the essence, or the in-itself of the object, as the concept, and in contrast understand by object the concept insofar as it is object, or insofar as it is for an other, then the examining consists in our seeing whether the object corresponds to its concept. One clearly sees that both are the same, but what is essential throughout the whole investigation is to hold fast to this, that both of these moments, concept and object, being- for-an-other and being-in-itself, themselves fall within the knowing that we are investigating, and that we thus do not need to bring standards with us and in the investigation to apply our ideas and thoughts. By leaving these aside, we succeed in considering the matter at issue as it is in and for itself. (Pinkard 번역 56쪽).

"인식"이라는 말은 좀 애매한데, 정신현상학에서의 맥락에서는 "인식" (erkennen;cognize)보다는 "무엇을 참으로 여김" (für-wahr-halten; take something to be true) 이라는 느낌이 더 맞을 겁니다. 왜냐하면 X를 참으로 여겼는데 알고보니 X가 아니라 Y였고, Y를 새로운 참으로 여겼는데 알고보니 Y가 아니라 Z였고 ... 이런 상황이 반복되거든요. 따라서 인식 이라는 표현보다는, 이전 형태의 fürwahrhalten과 새로운 형태의 fürwahrhalten 이런 식으로 보통 많이 씁니다.

어떤 고양이를 보고 우리가 판단을 내린다고 합시다.

  1. X 는 다람쥐이다.
  2. X 는 고양이이다.

처음에 우리는 해당 대상의 몸놀림만 대충 보고 1)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즉 "X는 다람쥐이다"를 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다람쥐가 아니라 고양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2)의 새로운 앎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의 어법에 따르면, 우리는 보통 동일한 대상 X에 대해서 "다람쥐"라는 규정을 "고양이"라는 규정으로 대체/수정하였으므로, 대상은 그대로이고 우리의 앎만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헤겔은 이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헤겔에 따르면 앎이란 기본적으로 대상에 대한 앎 입니다. 따라서 앎이 바뀐다는 것은 대상도 바뀐다는 것입니다. 즉 1)과 2)는 사실 3)과 4)의 꼴이라고 봐야 합니다.

  1. X 는 다람쥐이다.
  2. Y (=X였던 것) 은 고양이이다.

일견 반직관적으로 보이는 이것은 다음처럼 설명할 수 있습니다. 3)의 앎을 가질 때에는 해당 대상의 몸놀림만을 보고 앎을 가졌습니다. 즉 대상의 몸놀림이 다람쥐처럼 보이니 "X는 다람쥐이다"를 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몸놀림 뿐만 아니라 생김새, 행동 등을 면밀히 살펴보니 해당 대상이 다람쥐가 아니라 고양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즉 3)의 앎을 촉발한 대상은 몸놀림만을 앎의 척도로 삼은 대상=X 이고, 4)의 앎을 촉발한 대상은 몸놀림 뿐만 아니라 생김새, 행동 등을 포괄적으로 앎의 척도로 삼은 대상=Y입니다. 이것이 말씀하신

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3)의 앎이 그저 틀린 앎이 아니라, 일부 측면에서는 참이지만 더 많은 측면을 고려한다면 불완전한 앎이라고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앎에 도달할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현상학의 과정을 한마디로 퉁친다면 말씀하신대로, 의식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였던 대상이 사실은 의식 (정확히는 사유 혹은 정신) 내부의 무언가이다 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변화하는 것은 비단 앎과 대상 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한 앎을 수행하는) 의식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하는 의식의 형태를 보면서 철학자의 관점 역시 학습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자"는 모든 진리를 이미 처음에 알고 있는 그러한 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현상학의 과정을 거치면서 학습하게 되는 우리 독자들 (그리고 그 저자인 헤겔 포함)을 말합니다. 의식의 성장과 철학자의 성장은 같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각 챕터마다 새로운 형태의 의식을 정립하는 것이 철학자의 역할입니다. 4번과 관련해서 서술한 내용은 학자들마다 견해의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훌게이트 역시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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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서론"에서 지와 개념을 동일시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지와 개념은 다르고, <정신현상학>의 결과로써만 둘이 동일시된다고 생각합니다. 인용하신 부분을 보도록 하죠

여기서 헤겔은 지와 개념을 동일시 둔다기보단, 만약에 지와 개념을 동일시 둔다면 개념이 객체와 같아진다고 말합니다. 전 여기서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결과로써 지와 개념이 같아진다고 말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시작할 때에는 지와 개념이 같지 않고, 결과로써 지와 개념이 같아진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자의식"에서 헤겔은

However, what has now emerged is something which did not happen in these previous relationships, namely, a certainty that is equal to its truth, for certainty is, to itself, its object, and consciousness is, to itself, the true. To be sure, there is also therein an otherness, but conscious- ness draws a distinction which for it is at the same time no distinction. If we call the movement of knowing concept, but call the object, knowing as motionless unity, or as the I, then we see that the object corresponds to the concept, not only for us but for knowing itself (§166, my emphasis).

이라고 말합니다. 전 이 단락에서 헤겔이 "의식"의 결과물로써 개념이 객체와 상응한다고 말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와 개념은 <정신현상학>의 결과 중 하나로써 같아지는 것이죠. 하지만 @Herb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시작부터 지와 개념을 동일시 두고 읽으면 이런 부분을 이해할 방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 다른 문헌적 근거를 찾았습니다. "오성"에서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is unconditioned universal, which is henceforth the true object of consciousness, is still an object of consciousness; consciousness has not yet grasped its concept as concept. Both are essentially to be distinguished from each other (§132).

여기서 의식은 객체를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객체와 개념은 분리돼야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정신현상학>이 전개되면서 지와 개념을 동일시하게 된다가 더 맞는 결론인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서론"에서는 지와 개념을 동일시 두면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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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엄밀하게 말하면 대상/개념/지 는 서로 구별되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인용한 문단에 그대로 나와 있죠

개념과 대상이 지의 두 계기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씀하신대로 개념=지 의 소박한 등호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1. 다만 질문자 님의 서술이 "크게 무리가 없을 듯 하다"라고 말한 이유는 해당 인용의 맥락에서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다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대상에 대해서 안다고 주장하는 것 [=대상에 대한 앎 = 개념]이 결국 우리가 파악하는 바의 대상 속에서 일치한다.

  2. 물론 2번에서 서술한 바가 개념/대상/지에 대한 "정의"에 해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해당 인용에서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념"과 "대상"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더라도 결국 (지의 두 계기인) 양자는 지 속에서 일치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일종의 소박실재론적인 진리대응론을 타겟하고 있는 셈이죠.
    따라서 지 속에서 대상과 개념이 합치하는 것이, 정신현상학의 결과에 이르러야 나타난다는 주장에 저는 회의적입니다. 정신현상학의 결과에서 나타나는 것은 대상과 개념이 합치하는 "절대적인" 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고, 서론에서 말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지란 대상과 개념을 두 계기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대상과 개념이 지 속에서 합쳐진다는 것이죠. 이것이 서론에서 밝혀지지 않는다면, 왜 정신현상학의 독자가 대상이 존재하는 실재의 측면을 바라보지 않고 계속 의식의 형태를 관찰하고 있어야 하는지가 불분명해집니다. 의식의 형태를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의식이 주장하는 지 속에서 대상과 개념이 나타나고 바로 여기에서 양자가 합치되는지 검증되기 때문이죠. 즉 @yhk9297 님이 말씀하신 결론의 맥락은 서론의 맥락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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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정신현상학>의 결과에 이르러야 지 속에서 대상과 개념이 합치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긴 합니다. 지와 개념이 합치하는 것이 결론으로써 나온다고 했죠. 하지만, 다시 보니 제 글에 워낙 오타도 많고 (객체와 개념을 바꿔쓰기도 했었네요.), 번역도 오락가락해서 @Herb 님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더 꼼꼼해져야죠 뭐...

지 속에서 대상과 개념이 합치한다는 것은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지와 개념이 같아지는 것, 혹은 의식이 물체에 관계짓는 것이 개념인 것이 "서론"에서 전제시 되면 안 된다, 이게 제 포인트였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지와 개념이 "서론"에서 동일시 되면 안 된다는 제 의견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쓰고 보니, 오해의 근원지를 알 것 같습니다. @xylitol 님은 두 가지 질문을 하셨는데, @Herb 님은 두 번째 질문에 답을 하신 것 같고, 전 그 답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 ("지를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쓰면서도 뭔가 이상했는데 이게 이유인 것 같습니다.

(아마) 오해에서 비롯됐지만, 이로써 "서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보고 배웠네요. 좋은 논의였던 것 같습니다.

+) 아, 아닌 것 같네요.

라고 말을 했네요. 그럼 전 <정신현상학>의 결과로써 개념이 객체와 같아져야한다고 말 해야되네요. 번복을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Herb 님과 동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와 개념의 통일, 혹은 지 속에서 개념이 객체가 합치한다는 것은 "서론"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라고 말했기 때문에 번복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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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원래 이해하신 바가 맞습니다 -.- "지를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에 대한 대답이었고 "크게 무리가 없을 듯 하다"라고 말한 이유를

여기에 썼던 것입니다.

제 핵심은 서론에서 논의되는 "지 속에서 개념이 객체가 합치한다"는 것이 "최종적인 합치"가 아니라 "원리적 합치"에 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적 합치로 말미암아, 독자 및 철학자는 대상과 실재의 측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의해 구성된 대상과 의식이 주장하는 앎만을 관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원리적" 합치이기 때문에 당연히 개념과 객체가 합치하지 않는 순간이 나타나고 바로 이 순간마다 변증법적 지양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죠.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순간이 바로 결론이 말하는 최종적인 합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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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저는 동의합니다. 특히 말씀하시는 합치가 원리적 합치라면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크게 무리가 없을 듯 하다"를 어떻게 보냐에 따라 다르겠네요. 지 속에서 대상과 개념이 일치하는 것과 지를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은 다르긴 하니깐요. 저 같은 경우는 지와 개념의 일치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제가 "자의식"을 해석하는데 지와 개념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서론"에서 지를 개념이라고 이해하는 것에 크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더 정확한 건 다음 설명을 봐라" 라는 의미에서 쓰신 말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길게 돌아왔지만, 결론은 난 것 같네요: 지/개념, 그리고 지 속에서의 대상과 개념의 합치는 최종적 합치가 아니고, 원리적 합치다. 이렇게 말하면 @Herb 님과 제가 반대하는 건 없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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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k9297 @Herb 두 분의 상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사실 제 입장에선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 제가 이해하기로 <정신현상학>은 그 반대의 목표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즉,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어떤 한계에도 부딪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에 반박을 하는 책이 <정신현상학>이거든요."

저의 표현이 적절치 않아 @yhk9297 님께 오해를 심어드린 것 같습니다.

"헤겔에게는 오직 하나의 대안만이, 즉 내재적인 접근만이 남는다. 철학은 자연적 의식의 확신들이 순전히 그들 자신에 의해 철학의 관점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 현상학은 의식이 그 자신의 확신들을 고수하고 그렇게 하는 것의 파괴적 결과를 경험함으로써 실제로 이러한 절망 상태를 자기 스스로 초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홀게이트, 같은 책, 27-28쪽.)

제가 '의식의 한계'를 언급했던 이유는 위 문장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자연적 의식의 절망'이라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만 실수를 저질렀네요.

@Herb 님의 고양이와 다람쥐 예시도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결국 3) 'X는 다람쥐다.'에서 4) 'Y(=였던 것)은 고양이다.'로 바뀌는 이유는, 판단의 기준(척도)인 'X'가 이미 처음부터 '앎'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자연적 의식의 관점이 아닌 현상학자(철학자)의 관점에서 내린 판단입니다. 자연적 의식에게 'X'는 여전히 외부의 즉자로 간주됩니다. 문제는 'X'가 외부의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식에 의해 파악된 즉자라면, 이 X에게 '타자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입니다. X가 '의식에 대해 존재하는 무언가'라면 'X'와 '앎'의 검토는 사실상 동어반복입니다. 자연적 의식의 관점에서 이 아포리아를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자연적 의식의 각 단계가 지닌 확신의 상실)을 통해 가능합니다. 예컨대 감각적 확신은 '이것'을 확신하고 있지만,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최초의 확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좌절 속에서 자연적 의식은 새로운 대상(앎)을 갖고 이전의 대상(앎)을 비진리로 선언함으로써 다음 의식 단계로 이행합니다. 최종 단계인 절대지에서는 앎과 X의 일치가 확신됩니다. 이 부분이 아마 두 분께서 이야기했던 "소박실재론적인 진리대응론"과 관련된 부분으로 보입니다.

두 분의 댓글과 https://forum.owlofsogang.com/t/topic/1493/4에 적힌 내용들을 보면서 나름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다만 전체적인 그림은 대충 그려지는데, 세세한 부분에서 헤겔의 논리전개를 따라가는 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네요. 정답지를 먼저 보고 문제를 푸는 기분이라고 하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여하튼 두 분의 도움 덕분에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런데 두 분의 댓글을 보니 상대의 글이나 댓글에 인용?링크?를 거시는데 혹시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2개의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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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영어를 읽을 수 있으시다면, Stewart - The Unity of Phenomenology of Spirit도 같이 읽으시는 것을 추천해드립니다. 제가 <정신현상학> 수업 들었을 때 교재였기도 했고, 제가 봤던 코멘터리 중에서는 가장 좋은 것 같더라고요 (앞서 말했듯이 훌게이트의 책을 아주 좋아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1차자료에 시간 제일 많이 쓰시는 것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런 2차자료랑 논의들은 가이드라고 생각하시고 못해도 1차자료: 2차자료/논의를 적어도 7:3 ~ 8:2 로 가져가시는 게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