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파르메니데스 일자론에 대한 이해 혼란

현재 지젝의 <헤겔 레스토랑> 1장을 <"일자가 있다"의 해석에 관하여:라캉의 파르메니데스 읽기>과 함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라캉이 전제하고 있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개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단 파르메니데스의 일자 관련 논의를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세계의 본질적인 것으로 질적 변화와 생성이 없는 부동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들은 사실 생성하고 있습니다. 생성이란 있었던 것이 사라지거나 없었던 것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은 비존재가 존재하여 사물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적이기에 파르메니데스는 현실 세계를 가상으로, 부동의 존재를 진실로 두고 있습니다.

"일자는 부분도 전체도 없고, 처음, 끝, 중간도 없으며, 형태도 없고, 움직이거나 정지하지도 않는다. 안에 있다는 것은 안을 에워싸는 밖을 가정하는데, 전적으로 하나인 일자는 이런 구분이나 분할이 불가능하므로 다른 것 안에서뿐 아니라 자신 안에도 없다. 일자는 자신 및 다른 것과 같거나 다르지도 않고, 젊거나 늙지도 않으며, 동등하거나 부등하지도 않고, 작거나 크지도 않다. 이런 비교를 위해서는 일자가 분열되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일자는 to be이라는 어떤 술어로도 정의될 수 없다. 그래서 일자는 결코 존재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논증의 결과는 일자는 심지어 일자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존재(being)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일자는 일자가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부동으로서의 일자 개념이 이 지점에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 '존재가 아닌 무엇'이라고 언급됩니다.파르메니데스 본인이 말한 대로 비존재는 존재할 수 없기에, 부동의 일자는 사물에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일자는 그저 비존재가 되어버리고 사물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경우 부동의 일자가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는, '생성이 존재한다는 가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모순에 빠집니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앞서 말했던 비존재와 존재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이분법을 부정해야 합니다. 라캉은 비존재를 배제하는 존재나 그 반대가 아니라 '참여로서의 일자'라는 개념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라캉은 이것을 (상징계에 존재하는)일자가 아니라 (실재로서의)일자라는 개념으로의 이동이라고 말합니다. 유일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에 참여하는 일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자는 본인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를 침식하는 무언가입니다. 그런데 존재는 일자(비존재)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존재의 기원은 일자(비존재)의 대상없는 침식작용이라는 기이한 결론이 납니다. 지젝은 이것을 헤겔의, 부정/부정의 부정이 서로 맴도는 기원에 대한 설명과 동일시합니다. 일자는 결여된 일자, 더 나아가 대상이 없는 결여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앞서 "일자는 부분도..."로 시작하는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동의 존재라는 특성에서 저 설명이 도출되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추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2. "일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일자가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일자와 다른 것인지 궁금합니다.

  3. 앞선 제 이해가 맞는 것인지, 틀렸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듣고 수정하고 싶습니다.

2개의 좋아요

(1)

우선 파르메니데스 전공자도 아니고, 라캉 전공자는 물론 지젝 전공자도 아니라는 점을 언급하고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2)

아주 쉽게 생각하자면, 존재하는 것이 이 "일자" 밖에 없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자(oneness)는 말 그대로 "유일한 것", "홀로 있는 것", "하나만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붙은 명칭이니깐요.

이해가 쉽도록, 구체적인 사물을 예시로 들어봅시다. (따라서 이는 어디까지나 이해를 위한 근사치이지, 이게 실제 일자의 예시라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이 세상이 하나의 둥그런 돌이라 생각해봅시다. 안이 꽉 차 있는 둥그런 돌이요. 제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노트북도, 저라는 사람도 그냥 이 둥그런 돌에 그려진 그림 같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둥그런 돌, 일자에는 부분도 전체도 없을 겁니다. 그런게 왜 있나요. 존재하는 건 이 "단일하고 유일한" 둥그런 돌 밖에 없는데.

처음 - 끝 - 중간은 시간적 처음 - 끝 - 중간을 말할 겁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이 일자가 "변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시간적 변화의 어느 시점을 가리키는 처음/끝/중간도 없겠죠.
위치의 변화는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편합니다. 이 둥그런 돌이 어느 공간에 놓여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공간을 가정하면, 이 공간도 존재해야하고, 그러면 일자 - 공간 둘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는 일자의 정의와 모순되죠.) 그렇다면 이 둥그런 돌이 공간 그 자체죠. 공간 그 자체가 변할 수 있나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움직임/정지라는 것도, 공간적 안/팎이라는 구분도 모두 불가능하죠.

(3)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해석은 제가 전혀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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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1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혼란을 겪었던 이유는, 이런 일자에 대한 개념이 라캉 등에게 중요한 문제로 언급되는 이유가 잘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자가 감각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상상력을 요구하는 형이상학적 존재라면 그것이 왜 라캉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일자가 없고 여러 개의 요소가 존재한다고 두면 안 되는 것인가? 왜 그들은 굳이 모든 것을 통일할 원리인 일자를 요청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일자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지젝은 "일자가 없다면 심지어 단지 없음의 공백만 남길 뿐 일자성의 기만적 가상조차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았습니다. 일자의 개념이 요구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형이상학적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지탱하는 중핵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문에 라캉-지젝이 말하는 일자는 기본적인 개념과는 다른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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