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덕, 『표상의 언어에서 추론의 언어로』, 제3장 요약

제3장 프레게의 뜻 이론

제2장에서 보았듯이, 의미지칭이론은 적용 대상을 확정기술구에 한정할 때마저도 다음 네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i)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

(ii) 부정존재진술의 문제

(iii) 동일성에 관한 프레게의 퍼즐

(iv) 대체실패의 문제

프레게의 뜻 이론

프레게는 의미지칭이론을 거부하고, 뜻 이론을 내세워 위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의 논문 「뜻과 지칭체에 관하여」에서는 뜻sense와 지칭체reference를 구분한다. 예시를 통해 살펴보자. (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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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삼각형의 무게 중심

선분 AM을 a라고, 점 B에서 선분 AC의 중점까지를 연결하는 선분을 b라고, 점 C에서 선분 AB의 중점까지를 연결하는 선분을 c라고 하자. 이때 'a와 b의 교차점'은 'b와 c의 교차점'과 같은 대상, 즉 G를 지칭체로 가진다. 이때 우리는 각 확정기술구의 뜻을 파악한 뒤, 그것의 지칭체를 파악하는 것 같다. 즉 뜻은 지칭체가 우리에게 제시되는 한 방식a mode of presentation of the referent이자 우리가 그 표현을 이해할 때 파악하는 것entity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프레게에게 한 표현의 의미는 그 표현의 뜻이고, 뜻은 그 표현의 지칭체가 우리에게 제시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뜻이란 존재론적으로 어떤 종류에 속하는가? 뜻은 물리적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뜻은 시공간 속에 위치하는 구체적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제시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뜻은 심적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다. 뜻이 사적인 심적 영역에 속한다고 할 경우, 한 단어의 뜻이 사람마다 달라지므로 어떻게 의사소통이 성공적으로 일어나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뜻은 어디에 속하는가? 프레게는 뜻이 속하는 제3의 영역the third realm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프레게는 문장도 뜻과 지칭체를 가진다고 한다. 문장의 뜻은 문장의 명제적 내용(혹은 생각thought, Gedanke)이고, 그것의 지칭체는 문장의 진리치이다. 나아가 문장의 뜻은 문장의 구성요소들의 뜻들에 의해 결정되고, 문장의 진리치는 문장의 구성요소들의 지칭체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문장은 이름과 이름을 제외한 술어로 구성된다. 이름은 대상을 지칭하고, 술어는 개념concept을 지칭한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이다'를 보라. 문장의 지칭체는 참the True이고, 이름인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를 지칭하고 술어인 'x는 철학자이다'는 철학자의 개념을 지칭한다.

이때 프레게의 개념이란 플라톤주의의 보편자와 다르다. 개념은 대상과 범주적으로 구분된다. 개념이란, 대상이 논항argument으로 주어지면 진리치를 값value으로 산출하는 함수function이다. 그러므로 대상은 더 필요한 부분이 없다는 점에서 완전한complete 반면, 개념은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incomplete 것이다. 이와 달리 플라톤주의의 보편자는 완전하다.

또한 프레게는 개념 안에서도 일차개념first-level concept과 이차개념second-level concept을 구분한다. 일차개념은 개별적 대상을 논항으로 취하는 함수인 반면, 이차개념은 일차개념을 논항으로 취하는 함수이다. 예를 들어 'x는 개이다'는 일차개념을 지칭하지만, '(∃x)'는 이차개념을 지칭한다. '(∃x)(x는 개이다)'는 'x는 개이다'라는 술어가 지칭하는 일차개념의 사례가 있음has an instance을 표현한다. 이때 일차개념의 논항으로 취해져 참을 산출하는 대상을 그 일차개념에 속falling under한다고 하고, 이차개념의 논항으로 취해져 참을 산출하는 일차개념을 그 이차개념에 포섭falling within된다고 한다.

뜻 이론의 적용

  1.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

(1) 현재의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

위 문장의 주어 '현재의 프랑스 왕'은 뜻이 있기 때문에 (1)은 유의미하다. 그러나 주어의 지칭체가 없기 때문에 전체 문장의 지칭체도 없다. 따라서 (1)은 참이라고, 혹은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다.

  1. 부정존재진술의 문제

(2) 현재의 프랑스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

(1)과 같이 (2)의 주어는 뜻이 있으므로 (2)는 유의미하다. 그런데 주어의 지칭체가 없는데 어떻게 (2)가 참이 될 수 있는가?

프레게는 존재에 관한 의미론적 상승이론a semantic ascent theory of existence을 통해 (2)를 설명한다. (2)는 '~(∃x)(x는 현재의 프랑스 왕이다.)'로 나타낼 수 있고, 이는 'x는 현재의 프랑스 왕이다'가 지칭하는 일차개념이 '사례가 있다'가 지칭하는 이차개념에 포섭되지 않음을 표현한다. 실제로 이 일차개념의 사례가 없기 때문에 (2)는 참이다.

  1. 동일성에 관한 프레게의 퍼즐

(3) 샛별은 샛별이다.

(4)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

'샛별'과 '개밥바라기'의 지칭체는 동일하므로 (4)는 참이다. 그러나 두 표현의 뜻이 서로 다르다. (3)과 달리 (4)는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두 표현의 지칭체가 동일함을 알려주고 있으므로 정보적이다.

  1. 대체실패의 문제

(5) 철수는 샛별이 샛별이라고 믿는다.

(6) 철수는 샛별이 개밥바라기라고 믿는다.

대체원리(한 문장 내의 이름을 공지칭어로 대체해도 전체 문장의 진리치는 유지된다)와 (5)와 (6)은 직관적으로 다른 진리치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모순 없이 양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5)와 (6)의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공지칭어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프레게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직접적 맥락에서 이름의 뜻은 그것의 직접적 지칭체를 결정하고, 간접적 맥락에서 이름의 뜻은 그것의 간접적 지칭체를 결정한다. 여기서 간접적 지칭체란 그 이름의 일상적 뜻이다.

(7) 서울은 인구가 많다.

(8) '서울'은 이음절어이다.

'서울'이라는 이름은 (7)에서는 사용된 반면, (8)에서는 언급되었다. 즉 문장 내에서 이름이 인용되는 경우에 인용된 이름은 그 이름 자체를 지칭한다. 프레게에 의하면 이와 같은 지칭체의 변환reference shift이 이름의 인용에만 국한되지 않고, 간접적 맥락에도 발생한다. 간접적 맥락에는 다음의 두 경우가 포함된다. 하나는 명제태도 보고들propositional attitude reports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화법 보고들indirect speech reports이다.

프레게에게 (5)와 (6)은 명제태도 보고들로, 간접적 맥락에 속한다. 그러므로 (5)와 (6)에서 '샛별'과 '개밥바라기'의 지칭체의 변환이 일어나서 각각은 각각의 일상적 뜻을 지칭하게 된다. 따라서 둘은 공지칭어가 아니므로, '샛별'을 '개밥바라기'로 대체하더라도 그 문장의 진리치는 변할 수 있다.

뜻 이론의 문제점

  1. 뜻의 존재론적 위상

앞서 밝혔듯이, 뜻은 물리적 영역도, 심적 영역도 아닌 제3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3의 영역이란 대체 형이상학적 우주 속 어디에 있는가? 나아가, 뜻이란 구체적 대상이 아닌 추상적 대상인데, 이러한 뜻이 콰인의 존재론적 허용가능성 기준(No entity without identity)을 충족하는지 분명치 않다. 따라서 프레게의 뜻 이론은 존재론적 위상이 분명치 않은 것들에 대해 존재론적 커미트먼트ontological commitment를 요구한다.

또한 뜻과 마찬가지로, 개념은 물리적 영역에도, 심적 영역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제3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뜻과 개념은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데, 어떻게 이들이 제3의 영역에 함께 속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문은 이차개념에도 마찬가지로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게 된다.

  1. 동의어와 관련된 문제

(9) 철수는 아버지의 육촌 형제가 아버지의 육촌 형제라고 믿는다.

(10) 철수는 아버지의 육촌 형제가 재당숙이라고 믿는다.

대체실패의 문제를 떠올려보라. (9)와 (10)의 '아버지의 육촌 형제'와 '재당숙'은 간접적 맥락에 있으므로 둘은 각각의 일상적 뜻을 지칭할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육촌 형제'와 '재당숙'은 동의어로, 같은 뜻을 가진다. 따라서 (9)와 (10)에서 두 표현은 공지칭어이므로 대체원리에 따라 (9)와 (10)의 진리치는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직관에 반한다. '철수'가 '재당숙'의 말뜻을 몰라 (9)는 참인 반면, (10)은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프레게의 이론을 고수하면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아버지의 육촌 형제'와 '재당숙'은 동의어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즉 대체실패가 발생할 때마다 그러한 표현들을 동의어가 아닌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우리 언어에 실제로 동의어가 없음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동의어라고 여기는 임의의 두 표현에 대해, 그 둘이 동의어임을 모르는 사람을 가정할 수 있고, 그렇다면 (9)와 (10)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체실패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함축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1. 간접적 뜻과 관련된 문제

(4)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

(6) 철수는 샛별이 개밥바라기라고 믿는다.

(11) 영수는 철수가 샛별이 개밥바라기라고 믿는다는 것을 믿는다.

프레게에 의하면, 간접적 맥락에서 한 표현의 (간접적) 뜻은 그것의 간접적 지칭체, 즉 일상적 뜻이 제시되는 한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 일상적 뜻이 제시되는 한 방식이란 게 무엇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중첩된 믿음 문장에 있다. (6)에서의 '샛별'의 지칭체가 '샛별'의 일상적 뜻이고, '샛별'의 뜻은 이 일상적 뜻이 제시되는 한 방식이라면, (11)에서의 '샛별'의 지칭체와 뜻은 대체 무엇인가? (11)의 '샛별'의 지칭체는 (6)의 '샛별'의 뜻이고, (11)의 '샛별'의 뜻은 (6)의 '샛별'의 뜻이 제시되는 한 방식이라고 뜻 이론은 답할 것이다. 그런데 원리상 무한히 중첩된 믿음문장들을 만들 수 있고, 원리상 무한히 많은 뜻들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뜻들은 각각 의미론적으로 원초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유한한 수의 원초적 표현들을 가진 언어만을 배울 수 있다.[[1]] 따라서 직접적 맥락과 간접적 맥락에서의 뜻을 구분하는 것은 언어의 학습가능성에 위배된다.

위의 문제에 의해 더밋은 한 표현이 직접적 맥락에 있든 간접적 맥락에 있든 그 표현의 뜻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것을 제안한다. 다만 이 제안에도 문제가 있다. 이 제안에 의하면 (6)의 '샛별'의 지칭체는 그것의 일상적 뜻이고, '샛별'의 뜻도 그것의 일상적 뜻이다. 그런데 한 표현의 뜻과 지칭체는 범주적으로 다르다. 한 지칭체가 제시되는 방식과 그 지칭체 자체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2]] 간접적 맥락이라고 해서 도대체 어떻게 동일한 것이 한 표현의 뜻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그 표현의 지칭체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애초에 뜻이 어떻게 지칭체가 될 수 있는가?[[3]]

위의 물음이 적절히 답해지지 않는 경우, 대체실패의 문제에 대한 프레게의 답변은 임기응변적ad hoc일 뿐이다.

  1. 간접적 맥락 속에서의 동일성의 의미

(6) 철수는 샛별이 개밥바라기라고 믿는다.

프레게에 의하면 (6)에서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서로 다른 각각의 일상적 뜻을 지칭할 것이다. 그러나 철수가 믿는 내용은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동일한 것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즉 프레게의 견해를 따를 경우 간접적 맥락에 포함된 동일성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1. 간접적 맥락 속에 있는 이름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

프레게에 의하면 이름과 확정기술구는 모두 뜻을 가지고, 이름의 뜻은 확정기술구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고 한다.

(12) 철수는 그가 철수가 아니라고 믿도록 영희를 속였다. (Chulsoo fooled Younghee into believing that he wasn't Chulsoo.)

이름의 뜻은 확정기술구로 표현될 수 있으므로, (12)'의 '철수'의 일상적 뜻이 '옆집에 사는 안과의사'라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12)의 '그'he는 앞에 나오는 '철수'의 대용어anaphor이기 때문에 '철수'로 대체될 수 있다.[[4]][[5]] 그러므로 프레게에 의하면 (12)는 영희가 '옆집에 사는 안과의사는 옆집에 사는 안과의사가 아니다'라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고하는 꼴이다.

(13) 사담 후세인은 생포되었지만,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가 생포되리라고 믿었다.

(13)의 대명사 '그'는 '사담 후세인'의 대용어이므로, 둘은 동일한 대상을 지칭할 것이다. 그러나 프레게의 분석에 따르면 '사담 후세인'은 사담 후세인을 지칭하지만, '그'는 간접적 맥락에 있으므로 '사담 후세인'의 일상적 뜻을 지칭한다.

따라서 프레게의 이론으로는 (12)와 (13)과 같은 문장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1. 지칭체가 없는 이름들에 관한 퍼즐

프레게에 의하면, 한 이름의 뜻은 그 이름의 지칭체가 제시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지칭체가 없는 이름들empty names은 지칭체가 없으므로 그것이 제시되는 방식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지칭체가 없는 이름들의 뜻이란 무엇인가?

프레게에 의하면 지칭체를 결여한 이름에는 임의의, 예를 들어 자연수 0과 같은, 지칭체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에는 문제가 있다. '셜록 홈즈'의 지칭체를 자연수 0이라고 할 경우 '셜록 홈즈'의 뜻은 자연수 0이 제시되는 한 방식이 되고, 이것은 매우 반직관적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6]] 프레게에 의하면 이름의 뜻은 확정기술구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한 확정기술구의 뜻은 그것의 지칭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와 독립적이다. 동일한 뜻을 지닌 확정기술구가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지칭체를 가질 수도 있고, 심지어는 지칭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이름은 그것의 지칭체가 있는지, 있다면 지칭체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생각의 내용이 내적인 요인들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는 의미론적 내재주의에 기반한다.

그런데 의미론적 내재주의에는 결함이 있다. 그 결함이란, 주체가 파악하는 어떤 이름의 뜻이 그 이름의 지칭체를 결정하는 데 불충분한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길수가 '나는 영희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고 치자. 이때 길수는 '영희'의 뜻을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예쁜 처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영희와 완전히 동일하게 생긴 일란성 쌍둥이 영자가 있다. 이럴 경우 길수가 파악하는 '영희'의 뜻은 지칭체를 결정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내적인 요인만으로 지칭체를 결정할 수 없다.

심지어 이름의 뜻은 그것의 지칭체가 존재하는지의 여부와 독립적이라는 주장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허구의 이름fictional name은 실제 이름과 달리 애초에 지칭의도가 없다. 예컨대 '셜록 홈즈'의 뜻을 이해할 경우 그것의 지칭체가 존재하지 않음이 따라나온다.

  1. 맥락 의존적 표현들에 관한 문제

맥락 의존적 표현이란 표현의 화자와 표현의 시공간적 배경에 따라 그 표현이 포함된 문장의 진리치가 바뀌는 표현을 말한다. '오늘'today이나 '나'I가 바로 그러한 표현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 a가 큰 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가정하자. 이때 a가 '나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때, '나'의 지칭체는 a이다. 그런데 '나'의 뜻은 무엇인가? 이 문장은 분명 유의미하므로 '나'에는 뜻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프레게에 의하면 한 이름의 뜻은 확정기술구로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뜻도 확정기술구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a는 기억상실증에 걸렸으므로 맥락에 의존하지 않는 확정기술구로 '나'의 뜻을 표현할 수 없다.

또한 프레게는 단어와 문장의 뜻이 맥락과 무관하게 그것의 지칭체를 결정하는 것으로 간주하므로, 맥락 의존적 표현의 경우에는 지칭체의 결정이 맥락에 의존함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외적 맥락이 지칭체의 결정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론적 내재주의는 설득력이 떨어진다.[[7]]

  1. 문장의 뜻과 지칭체

이름이 뜻과 지칭체를 갖는 것처럼 문장도 뜻과 지칭체를 갖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첫째로, 이름이 지칭체를 지칭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문장이 진리치를 지칭한다고 보기 어렵다. 이름의 지칭체는 특정한 대상인 반면, 진리치는 특정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름은 지칭체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문장은 진리치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은 어떤 사실을 주장하거나, 가정하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된다.


[[1]] 우리가 정말로 유한한 수의 원초적 표현들을 가진 언어만을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2]] 하나의 표현의 뜻과 지칭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 주장은 어떤 것이 자기 자신을 제시하는 한 방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될 수 있을 것 같게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3]] 간접적 맥락에서 한 표현의 뜻과 지칭체가 모두 그 표현의 일상적 뜻이라는 주장은 다른 측면에서도 이상하다. 간접적 뜻은 직접적 맥락에서의 뜻과 동일하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지칭체를 제시하고 있으므로 그 차이의 원인은 맥락이 직접적이냐 혹은 간접적이냐에 의존한다. 그런데 간접적 맥락이라는 점이 어떻게 같은 뜻이, 즉 지칭체가 제시되는 같은 방식이, 서로 다른 지칭체를 제시하도록 하는지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도 직접적/간접적 맥락이라는 구분은 임기응변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4]] 사실 언어학적으로 (12)와 (13)의 '그'는 대용어가 아니라 대명사이다. 대용어는 그가 속한 문장 내의 다른 명사구로부터만 의미를 받아올 수 있지만, 대명사는 꼭 그 문장 내의 단어로부터 의미를 받아올 필요가 없다. (12)의 '그'는, 실제로 철수를 지칭하더라도, 철수가 아닌 다른 사람을 지칭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명사이다. (13)의 '그'도 마찬가지이다. "Anaphor: An NP that obligatorily gets its meaning from another NP in the sentence. [...] Pronoun: An NP that may (but need not) get its meaning from another word in the sentence." (Carnie, Syntax, Wiley-Blackwell, 2012. 148-149p)

[[5]] 통사론적으로 영어의 anaphor는 그것이 의미를 받아온 다른 명사구로 대체될 수 없다. 예컨대 "Heidi bopped herself"는 문법적이지만, "Heidi bopped Heidi"는 비문이다. 그러나 대용어의 대체가 통사론적으로는 비문법적일지라도 그 의미는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 비판의 논리는 유효하다.

[[6]] 이 부분의 비판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더 문제인 점은 정확히 어떤 부분이 납득되지 않는지도 집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약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공부를 더 하고 나면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7]] 그런데, 어떤 사람 k가 실제로 3월 16일임에도 불구하고 3월 17일로 알고 '오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하자. 이럴 경우에는 실제로 그 발화가 언제 일어났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발화가 일어났다고 생각된 시점이 중요한 것 아닌가? 맥락 의존적 표현이 정말로 외적 요인에 의존하는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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