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구조주의와 아도르노 철학의 관련성?

안녕하세요. 이러한 질문? 단상?이 하나의 꼭지를 구성할만큼의 깊이가 있는 성찰인지 저로서도 좀 의문스럽습니다. 해서,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입장에서 글을 남겨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이 헤겔 변증법에서 주장하는 하나의 완결된 '체계성' 내지 '총체성'을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이러한 부정변증법을 통해서 아도르노가 그간의 서양 철학이 구성해오던 주체 중심의 철학을 객체 중심의 철학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가 포스트구조주의의 견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프레드릭 제임슨의 <<후기 마르크스주의>>라는 책을 읽으면서 제임슨이 아도르노 철학에 대한 이러한 독해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의외였습니다. (아직 책을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제임슨의 논의가 정확히 어떠한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는 잘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이와 관련한 코멘트를 남겨주시거나, 읽어볼만한 자료를 제공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관점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시거나 <<후기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조망해주셔도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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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현재까지 피상적으로 이해한 바로는....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의 이념은 주체 중심의 사유에서 객체 중심의 사유로의 전환을 꾀하는 것이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매개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일한 자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포스트구조주의의 관점과는 거리가 있다...? 라는게 제임슨의 주장이 아닌가 싶네요. 그러면서 제임슨은 "그렇다면 아도르노 철학에서 주체 중심의 사유는 어떻게 객체 중심의 사유로 전환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전환과 주체 / 객체의 매개성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부분을 논의의 중심점으로 취하고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여기까지 오고나서 또 떠오르는 의문은, 과연 아도르노가 (포스트구조주의의 입장과는 대비되게) '단일한 자아'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는가? 라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 비판의 주된 골자를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전체성' 내지 '총체성'으로 인해서 대중들의 주체적인 사유가 상실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경우 '아도르노는 문화 산업의 소비자들에게 자아성이라는 것이 부재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독해해도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은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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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서 언급하신 포스트구조주의가 구체적으로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라캉이나 데리다 등을 말하는 것 같네요. 아도르노의 주체 개념은 이들의 관점과 다릅니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주체는 존재하지만, 경험 세계와 무관하게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주체는 없습니다. 예컨대 칸트가 말한 '초월적 자아',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주체는 오직 다른 주체들 및 객체들과 매개된 상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그 속에 사는 인간 주체들도 계속 변화합니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변치 않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주체는 자신을 특정 이미지와 역할에 고정시킨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게 심해지면 권위주의적 성격이 되죠. 문화산업은 그 소비자들을 획일적이고 수동적이고 미숙한 주체로 만듭니다. 따라서 '자아성'이 없다기보다는 '자발성'이나 '자율성'이 없다고 봐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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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부분에 대체로 동의합니다만 그렇다면 아도르노는 '자율적이지 않은 자아'의 존재를 인정해야한다는 (혹은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획일성이나 총체성, 속칭 '관리되는 사회'의 영향에 의해서 대중들이 자율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이행되는 현상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자율적이지 않은 자아'의 존재 또한 부정되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재미있는 주제같아요. 양쪽을 제가 깊게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제 생각을 옮겨보면 이래요.

아도르노는 분명 주체 중심의 철학을 비판하고,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는 "비개념적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 추상화 메커니즘에서 떨어져나간 것"을 포착하는 것을 철학의 임무라고 제시하죠(부정변증법, 서문, §철학의 관심). 이런 점에서는 말씀하신대로 '객체 중심의 철학'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주체의 중요성을 피력하죠. 비록 철학의 사변이 개념화 혹은 동일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포기하고 반계몽주의의 길을 걸을 수는 없듯이말이죠. 아도르노가 하이데거를 비판하는 핵심이 바로 이 부분이죠. 하이데거는 주체 중심의 철학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만하나, 극단적으로 나아가서 주체에게 어떤 주체적인 자리도 마련하지 않아버렸다는거죠(부정변증법, 존재론적 욕구, §주체의 무기력화; §존재론적 객관주의). 만일 아도르노가 주체에게 별로 큰 무게를 두지 않았더라면, 체계 영합적인 주체를 비난하며 '인식 대상과 주체의 친화' 같은 것을 생각하지도 않았겠죠. 한마디로 그는 여전히 주체 중심의 철학을 추구하지는 않아도, 주체에게 많은 자리를 허락하고 있는셈이죠.

그래서 아도르노는 (1)독단적인 주체 중심 철학을 탈피하고 (2)주체가 사회와 매개되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3)체계의 힘에서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를 탐구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요소를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냐가 논의의 쟁점이 될것 같습니다. 물론 먼저 포스트모던에 대한 정의와 범위와 그들이 말하는 주체의 죽음의 의미를 확정해야하는데, 이 또한 너무 복잡한 문제지요. 그래서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푸코만 끌고 와서 생각해보면, 푸코는 세 요소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아도르노와 푸코는 유사해보여요. 다만 그 체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의 측면에서 보면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

푸코는 규율 권력에 의해 수동적으로 규정(복종화)된 주체가 아닌 다른 주체를 만드는 것을 '윤리적 주체화'라고 말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시선'과 '타자의 개입'이 요구되요. 쉽게 말하면 자신의 행위를 점검하는 나와 이미 윤리적 주체화를 어느정도 이뤄서 나의 행위 점검을 도와주는 스승이 새로운 주체 탄생의 필요조건이죠(주체의 해석학).

아도르노도 체계에 의해 포섭된 주체가 아닌 다른 주체를 만들기 위해, '인식 수단에 대한 반성' 이라던가 '변증법에 따른 철학적 자기 반성 작업'을 주장하며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시선'을 말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푸코의 '타자의 개입'과 같은 요소가 아도르노에게 있나 싶어요. 어쩌면 아도르노의 미학 파트가 그 요소를 대신한다는 생각도 들긴하는데, 제가 그쪽까지는 잘 몰라서..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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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해주신 것을 천천히 읽다보니, 결국 아도르노가 이와 같은 '인식 수단에 대한 반성'이나 '철학적 자기 반성 작업'을 어떻게 실현하고자 했는지가 관건인 것 같군요. 포스트 구조주의에서는 그런 실현 방법의 일환으로 '주체라는 관념 자체'를 부정한 반면 아도르노에게 있어서는 항상 매개성이라는 관념이 강조되므로 주체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여전히 무언가 많은 의문점이 남는 주제라고 생각되네요.

(제가 철학사적인 맥락을 잘 몰라서 조금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예를 들자면 "과연 아도르노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을 수 있는가?" 등등... (무언가 더 많은 상상력이 자극되지만 머릿 속에서만 맴돌다가 없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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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구조주의자나 포스트구조주의자 모두 실체로서의 주체, 최종심급으로서의 주체, 단일한 주체 따위를 부정한 것이지 주체 개념 전체를 버렸다고 생각들진 않아요. 주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없다면 제가 예시로 든 후기 푸코의 작업 자체가 성립하질 않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포스트구조주의와 아도르노 사이에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은 대륙의 현대 철학자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점이 아닌가 싶기도해요. 그래서 포스트구조주의 제반 작업의 공로는 역시나 아도르노보다 이전의 사상가들인 니체와 프로이트 등에 돌려야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포스트모던과 아도르노 모두 니체에게 빚지고 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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