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식의 여러 유형들
그림 1. 지식의 유형
인식론에서 다루는 지식은 어떤 유형의 지식인가? 먼저 지식의 여러 유형을 살펴보자.
(1)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안다.
(2) 나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안다.
(3) 나는 철호를 안다.
(4) 영수는 여자를 안다.
(1)은 '나'가 어떤 능력이 있음을 말한다. 이런 지식을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라고 한다. 절차적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그 지식에 대한 정보를 떠올릴 필요도 없고, 그런다고 해서 절차적 지식을 갖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이 절차적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행위 혹은 인식 체계가 절차를 수행하기에 적절하도록 조직되어hard-wired 있으면 된다.
반면, (2)와 같은 지식은 어떤 정보가 마음 속에 떠올라야 한다. 마음 속에 떠오름을 표상이라고 하며, 이런 지식을 표상적 지식이라고 한다.
(3)의 '안다'는 특정인에 대한 친숙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런 친숙함은 표상적 지식과 절차적 지식으로 환원될 수 있다. '철호를 안다'는 것은 '철호'를 표상할 수 있으며 동시에 '철호'와 '철호'가 아닌 사람을 구분할 능력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와 같은 문장은 '영수'가 여자와 신체적 경험을 가졌음을 의미할 수 있다. 이 경우의 '안다'는 체험적 지식이라고 한다. 체험적 지식은 표상적 지식과 절차적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체험적 지식은 정보의 표상이나, 절차를 수행할 능력과는 상관없이 체험의 여부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다른 유형의 지식이 있을 수 있겠으나 여기까지만 알아보도록 하자. 전통적으로 인식론에서 관심하는 것은 표상적 지식이며 본서에서도 표상적 지식에 논의를 한정한다.
표상적 지식은 흔히 경험적 지식empirical knowledge과 선험적 지식a priori knowledge으로 나뉜다. 경험적 지식은 경험에 의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지각(시각, 촉각, 청각 등)에 의하여 얻어지는 지식을 지각적 지식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의 법칙들은 지각적 지식이 아닌 경험적 지식이다. 그러한 법칙들의 내용은 지각에 주어지는 것을 넘어서지만, 부분적으로는 감각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경험적 지식을 다른 표현으로 후험적 지식a posteriori knowledge이라고 부른다.
경험적 지식은 경험에 의존하여 얻어지는 반면, 수학이나 논리학의 지식들은 경험에 독립적이다. 이러한 지식들은 이성에 의하여 산출된다고 생각하여 이성적 지식이라고 부른다. 이성적 지식은 선험적 지식a priori knowledge이나 초월적 지식transcendental knowledge이라고도 부른다.
경험적 지식과 이성적 지식을 후험적 지식과 선험적 지식으로 부르는 것은 양자간의 우선성을 내포한다. 선험적 지식이 후험적 지식에 우선하고 그것의 근거 역할을 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면 양자를 경험적 지식과 초월적 지식으로 부르는 것은 우선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초월적이란 단순히 경험과 독립적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경험적 지식과 이성적 지식의 구분은 철학의 전통적인 존재론적 이분법에 기인한다. 세계는 가변적 측면과 불변적 측면이 있으며, 각각이 경험과 이성을 통해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이 선험적 지식을 어떻게 산출하는지에는 의문이 남는다. 한 판단이 지식이 될 수 있는가는 그 판단의 과정에 의존하는데, 선험적 판단은 그 판단의 배경을 이루는 인지 과정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과연 지식이 될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논의하기 어렵다. 나아가 선험적 지식이 가능한지조차 논의하기 어렵다.
표상적 지식 중에는 도덕적 지식도 있다. 비인지주의non-cognitivism 또는 정의주의emotivism에 따르면, 도덕적 언명은 단지 주관적인 정서의 표현에 불과하다. 이럴 경우, 도덕적 판단은 세계에 관한 정보로서의 지식이 될 수 없다. 반면 직관주의intuitionism에 따르면, 도덕적 지식은 도덕적 직관에 의하여 파악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선험적 지식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직관의 판단 과정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나아가 도덕적 직관은 이성적 능력인 동시에 도덕에만 적용되는 특수한 능력일 텐데, 이러한 능력의 존재 자체가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위에서 보았듯 선험적 지식과 도덕적 지식은 인지 과정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것이 과연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지를 논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본서에서는 논의를 경험적 지식에 제한한다. 그리고 경험적 지식에도 명제적 지식과 비명제적 지식(시각 자료 그 자체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명제적 지식에 초점을 맞춘다.
[[1]]선험적 지식과 도덕적 지식은, 그것이 가능하다면, 명제적 지식일 것이라고 김기현은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