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론주의 의미론에서

안녕하세요. 현대철학 문외한으로서 부끄러움을 뒤로 하고 추론주의 의미론에 대한 본격적인 논문을 읽어보려고 하는데, 제가 탐구 지표로 삼고 가고자 하는 궁금증이

언어-도입 규칙에서 예컨대 빨간 꽃을 보고 그로부터 '이건 빨갛네'하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추론이라고 할 수 있는지거든요.

추론이란 게 제 선입견으로는 명제와 명제와의 관계가 특정 방식으로 설정되는 것인데, 사물과 명제 간의 관계가 설정되는 건 보통 명명이라고 하지 않을까요?

여하튼 일단 거친 문제의식에서는 추론주의가 어떻게 사물과 언어 간의 관계를 해명할 수 있는 것인지가 궁금한데 이에 대해서도 발전적인 방향으로 읽을 거리를 추천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언어 사용의 객관성이 추론주의 틀 내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투명하게 와닿지가 않아서요. 말하자면 어떤 명제가 참되게 발화되었는지 판단하는 규준이 갖는 객관성이 어떻게 해명되는지 등이 얕은 지혜로는 어려운 문제가 될 것 같아서요..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있는지, 혹은 애초에 문제시되기는 하는지.. 궁금합니다.

몇 가지 답을 망상 수준에서 떠올려 볼 수는 있으나 실제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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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도입', '언어-언어', '언어-이탈' 이행 중에서 언어-이탈 이행을 먼저 떠올려 보시면 좀 더 직관적인 이해가 쉽지 않을까요? 일상의 윤리적 상황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일반적으로도 큰 문제 없이 동의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요.

가령,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주장에 찬동하고 있고, "철수는 어려운 사람이다."라는 주장에 찬동하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이루어지겠죠.

  1.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
  2. 철수는 어려운 사람이다.

  1. 철수를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추론적 결론을 내린 사람들은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철수를 실제로 도와주게 되잖아요.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주장들로부터 그에 뒤따르는 행위를 실제로 하게 되는 과정이 바로 '언어-이탈' 이행이죠.

'언어-도입' 이행도 비슷해요. 이건 지각에 일정한 정보가 주어어지는 상황에서, 그 정보로부터 우리가 추론적 귀결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거든요.

가령, 우리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내 눈은 사물의 색깔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와 "지금 나는 정상적 상황에 있다."라는 보조 가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보죠. 이 상태에서 내 눈앞에 사과가 빨간색을로 보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을 거예요.

  1. 정상적 상황이라면, 내 눈은 사물의 색깔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
  2. 지금 나는 정상적 상황에 있다.
  3. 지금 내 눈은 사과를 빨간색으로 지각한다.

  1. 사과의 색깔은 빨간색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과에 대한 시각적 지각으로부터 "사과의 색깔은 빨간색이다."라는 추론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언어-도입' 이행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제가 제시한 두 가지 예시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긴 해요. 좀 더 정확히 설명하려면 '의무론적(deontic)' 태도를 바탕으로 일어나는 점수기록 과정에 대한 고려가 들어가야 하거든요. 쉽게 말해, 추론이라는 것이 단순히 주체 혼자 수행하는 경직된 일방향적 사고 과정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 사이의 상호적 대화를 통해 벌어지는 역동적 소통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해요. 다만, 저 단순화된 예시로도 의문이 어느 정도는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내용을 가장 쉽게 풀어놓은 텍스트는 아마도 브랜덤의 Articulating Reasons일 거예요. 이 책의 83쪽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어요.

The thought is that there are two species of discursive commitment: the cognitive (or doxastic) and the practical. The latter are commitments to act. Acknowledgments of the first sort of commitment correspond to beliefs; acknowledgments of the second sort of commitment correspond to intentions. The first are takings-true, the second makings-true. Practical commitments are like doxastic commitments in being essentially inferentially articulated. They stand in inferential relations both among themselves (both means-end and incompatibility) and to doxastic commitments.

The second basic idea motivating the present account is that the noninferential relations between acknowledgments of practical commitments and states of affairs brought about by intentional action can be understood by analogy to the noninferential relations between acknowledgments of doxastic commitments and the states of affairs they are brought about by through conceptually contentful perception.

  1. Observation (a discursive entry transition) depends on reliable dispositions to respond differentially to states of affairs of various kinds by acknowledging certain sorts of commitments, that is, by adopting deontic attitudes and so changing the score.

  2. Action (a discursive exit transition) depends on reliable dispositions to respond differentially to the acknowledging of certain sorts of commitments, the adoption of deontic attitudes and consequent change of score, by bringing about various kinds of states of affairs.

R. Brandom, Articulating Reason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p.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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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 대해서도 Articulating Reasons 제6장 "Objectivity and the Normative Fine Structure of Rationality"에 설명이 있어요. 그 이외에도 제가 예전에 주최했던 Making It Explicit 세미나에도 관련 내용이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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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YOUN 님께서 말씀해주신 Brandom의 배경이나 동기랑은 좀 다를 것 같은데요. (철학적 계보는 또 모르겠습니다.) 추론주의를 아예 감각 혹은 지각 단계에 적용함으로써 인지과학을 진행하려는 연구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쪽은 주로 "개념 역할 의미론"이라는 말을 씁니다만, 뭐 비슷합니다.) 뭐 양상이야 다양하겠습니다만, 이런 식의 추론주의에서는 아예 철저히 자연주의적 (혹은 과학주의적) 방식으로 '객관성'을 확보할 여지가 열려있다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좀 오래된 글입니다만, 이쪽 프로그램에 관해 오래전부터 글을 써온 Ned Block이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서 작성했던 항목이 PhilArchive에 올라와있으니 참고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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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해보는게 어떨까 싶어요. 해당 사례의 경우 해당 인식 주체가 "빨간 꽃" 내지 "빨강"의 개념을 제대로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제로는 노란 꽃을 보고 있으면서 "이건 빨간 꽃이다"라고 판단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이 제대로 된 "빨간 꽃"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게 되죠. 여기서 추론주의자들은 "빨간 꽃"의 개념에 구성적인 추론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실제 빨간 꽃이 가져야 하는 필요충분적 특징 -이러한 것이 있다면- 을 F&G&I 라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도입과 제거 규칙을 통해 다음의 추론을 말할 수 있습니다.

x is F&G&I
ㅡㅡㅡㅡㅡㅡ
x is 빨간 꽃

x is 빨간 꽃
ㅡㅡㅡㅡㅡㅡ
x is F&G&I

즉 "빨간 꽃"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소유하고 이해하고 있다면, F&G&I라는 지각적 속성이 주어졌을 때 이것을 "빨간 꽃"이라고 인식할 수 있고, 반대로 "빨간 꽃"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이 사람이 F&G&I 라는 속성을 가진 무언가에 대한 진술을 하고 있다고 청자는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 추론은 따라서 "빨간 꽃" 개념을 소유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고, 반대로 (몇몇 추론주의자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이 추론을 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사람이 "빨간 꽃" 개념을 제대로 가지고 있다고 충분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빨간 꽃"에 대한 위의 추론에 동의하지 않거나 다른 추론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보통 이 사람이 "빨간 꽃"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적어도 우리와 다른 "빨간 꽃"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추론주의적 접근에 대해서는 Paul Boghossian, "Debating the a Priori" (2020) 특히 Ch 1,2,3을 추천드립니다. 이러한 접근은 wildbunny님이 말씀하신 자연주의적 프로그램과도 구별되고, YOUN님이 말씀하신 브랜덤의 화용론과도 구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론주의 일반에 대한 소개로는 Julien Murzi and Florian Steinberger, "Inferentialism", in: A Companion to the Philosophy of Language, Blackwell 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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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bunny 님과 @Herb 님이 알려주신 자료는 저도 언젠가 읽어보아야겠네요! 브랜덤 이외에도 '추론주의'라는 명칭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인물들이 여럿 있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추론주의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제가 폭넓게 살펴보지는 못했거든요. 그렇지만 @Herb 님이 말씀하신 보고시안의 주장 자체는 브랜덤과도 많은 부분 겹치는 것 같아요. 브랜덤도 결국 "x에 대한 개념을 지니고 있다"라는 것이 "x에 대한 주장을 추론적 관계 속에서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해서요. 그 둘 사이에 직접적인 영향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외견과는 달리 서로 독자적인 입장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인지를 공부해보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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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말씀하신 특징이 "추론주의"로 통칭되는 이론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류는 거슬러 올라가자면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사용이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통 말해지구요. 그렇지만 이론가들마다 추론주의 모델을 전개해나가는데 있어서 서로 다른 전제들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구별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의미-전체론을 주장하는 브랜덤과 달리, 보고시안은 "인식론적 분석성 및 선험성"이라는 독특한 입장에 commit되어 있습니다. "빨간 꽃"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여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곧 가령 "빨간 꽃 is F"라는 명제를 "빨간 꽃"의 사실에 대한 분석적 앎으로서 (따라서 선험적 앎으로서)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한 주장을 브랜덤의 화용론은 굳이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대신 전체론과 화용론 모델을 옹호해야 하는 부담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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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드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짧은 답변들 속에서도 최소한의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구조적인) 밑그림을 얻게 되었군요. @YOUN 님이 알려주신 대목들과 영상은 시간 날 때마다 보겠습니다. 브랜덤의 화용론적 접근, @Herb 님께서 알려주신 보고시안의 선험적 접근, 또 @wildbunny 님께서 언급해주신 일종의 자연주의적 접근까지, 알찬 초견을 얻는군요. 감사합니다. 알려주신 것들을 읽어보고 질문하는 것이 도리에 맞겠지요! 금방 다시 질문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 여러분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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