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덕, 『표상의 언어에서 추론의 언어로』, 제2장 요약

제2장 마이농의 대상이론

의미지칭이론이 모든 언어표현에 적용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단칭어singular term에는 적용되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표현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먼저 단칭어에 한해서 의미지칭이론을 적용하고, 나머지 단어들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채택할 수 있다. 단칭어에는 이름(고유명), 확정기술구, 단칭 인칭대명사, 그리고 지시대명사가 있는데, 이중에서 확정기술구에 대해 먼저 분석해보자.

확정기술구definite description란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이름과 같지만, 그 대상만이 만족하는 조건을 기술함으로써 대상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이름과 다르다. 반면 하나의 대상만을 지칭하진 않는 기술구는 불확정기술구indefinite description라고 한다.

이제 확정기술구에 의미지칭이론이 적용되는지 살펴보자. '확정기술구의 의미는 그것의 지칭체이다'는 논제를 확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직면한다.

  1.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

(1) 현재의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

현재의 프랑스 왕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1)의 '현재의 프랑스 왕'은 지칭체가 없다. 따라서 위의 논제에 의해 (1)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것은 반직관적이다.[1]

  1. 부정존재진술의 문제

(2) 현재의 프랑스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

(2)는 직관적으로 유의미하며, 동시에 참이다. 그러나 위의 논제에 의하면 (2)는 무의미하다.

마이농은 그의 대상이론the theory of objects으로 위의 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대상이론은 다음의 논제를 주장한다: '각 단칭어는 한 대상을 지칭한다.' 여기서 대상은 있음Sein, being을 가진 대상과 있음을 결여한 대상으로 분류된다.

즉 대상이론은 (1)의 '현재의 프랑스 왕'도 한 대상을 지칭한다고 할 것이며, 이 대상은 있음을 결여한다. 대상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는지 더 알아보기 위해 다음 문장들을 보자.

(3) 황금산은 금으로 구성되어 있다.

(4) 둥근 정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5)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콜럼버스의 항해로 입증됐다.

(6) 빨강은 색깔이다.

(3)의 '황금산'이 지칭하는 대상은 있음을 결여하지만, 가능하다possible. 반면 (4)의 '둥근 정사각형'은 불가능한impossible 대상을 지칭한다. (5)의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특정한 사실을 지칭하고, (6)의 '빨강'은 추상적 대상을 지칭한다. 즉 마이농의 존재론은 팽창된 우주를 받아들인다.

이제 대상이론의 대상을 분류해보자(그림. 1). 먼저 대상은 있음을 가진 대상과 있음을 결여한 대상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있음을 가진 대상은 다시 존재exist하는 대상과 존립subsist하는 대상으로 구분된다. 존재하는 대상이란, 시공간 속에 있는 구체적 대상이다. 존립하는 대상이란, 시공간 속에 없지만 어떤 의미에선 있는 대상이다. 여기에는 '빨강'과 같은 추상적 대상과, 사실들도 포함된다.

있음을 결여한 대상은 세 범주로 구분된다. 첫째, 가능한 대상들이다. '황금산' 등이 그러하다. 둘째, 불가능한 대상들이다. '둥근 정사각형' 등이 그러하다. 셋째, 실현되지 않은 사태들이다.


그림 1. 대상이론에서 대상의 범주

마이농의 대상이론이 위의 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살펴보자.

  1.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칭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

대상이론에 의하면 (1)은 유의미하다. '현재의 프랑스 왕'은 가능한 대상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1. 부정존재진술의 문제

대상이론에 의하면 (2)는 유의미하고 동시에 참이다. '현재의 프랑스 왕'은 있음을 결여한 대상이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이론은 지향성intentionality을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황금산'이나 '둥근 정사각형'은 분명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선 그것들이 생각의 대상일 수 있어야 한다. 대상이론은 있음을 결여한 대상도 인정하므로 그것들이 생각의 대상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대상이론은 여러 비판에 직면한다.

  1. 러셀의 비판

마이농의 속성이론Sosein thoery에 의하면, 속성Sosein은 있음Sein과 독립적이다. 즉 한 대상은 있음을 갖든 결여하든 상관없이 속성을 가질 수 있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비판을 제기한다.

(i) 둥근 정사각형과 같은 불가능한 대상은 모순율을 위반한다.

(ii) 다음의 두 진술은 마이농의 견해에 따르면 모두 참이면서 서로 모순적이다.

(7) 존재하는 둥근 정사각형은 존재한다. (속성이론에 의해 참)

(8) 존재하는 둥근 정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이론에 의해 참)

마이농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i) 둥근 정사각형은 모순적인 게 맞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항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 있다: 다음 두 진술은 대상이론에 의해 참이면서 모순적이다.

(9) 둥근 정사각형은 둥글다.

(10) 둥근 정사각형은 둥글지 않다.

(9)는 대상의 둥글다는 속성에 의해 참이고, (10)은 대상의 정사각형이라는 속성에 의해 참이다.

그러나 마이농은 술어 부정predicate negation과 문장 부정sentence negation을 구분한다. 불가능한 대상에 대해서는 술어 부정과 문장 부정이 논리적 동치가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10)와 (11)은 논리적으로 동치가 아니고, (9)를 'A'라고 할 때 '~A'인 것은 (11)이기 때문에 (9)와 (10)을 받아들이는 것은 '(A&~A)'형태의 모순이 아니다.

(11) 둥근 정사각형이 둥글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ii) (8)에서의 술어의 '존재'existence란, 있음의 한 양태a determination of Sein로서의 존재이다. 반면 (7)에서의 술어의 '존재함'being existent이란, 속성의 한 양태로서의 존재다. 그런데 속성이론에 따르면 속성은 있음과 독립적이다. 따라서 (7)과 (8)은 애초에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으므로 서로 모순적이지 않다.

다만, 존재와 존재함 사이에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기에 그것을 구분하는지는 논란이 있다.

(12) 버락 오바마의 존재하는 부인은 변호사이다.

(13) 버락 오바마의 부인은 존재한다.

마이농에게 있어서 (12)의 존재함과 (13)의 존재는 서로 독립적이기 때문에 (12)이 (13)을 함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직관은 (12)이 (13)을 함축한다. 존재란 시공간에 있는 것인데, 그것과는 상관 없는 존재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상이론은 우리의 건전한 실재감각our robust sense of reality에 어긋난다.

  1. 콰인의 비판

콰인은 "동일성이 없으면 대상도 없다"No entity without identity라는 존재론적 허용가능성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가능한 대상들은 이 기준을 위반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i) 가능한 대상들은 배중률('A'와 '~A'중 하나는 무조건 참이다)을 위반한다.

(14) 황금산은 높이가 100미터이거나 또는 황금산은 높이가 100미터가 아니다.

(14)의 주어는 가능한 대상이기에 술어의 속성을 가진다고 하기도, 갖지 않는다고 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각 선언지에 확정적인 진리치를 부여할 수 없으므로 배중률을 위반한다.

(ii) 가능한 대상들은 대상이론에서 단칭어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정말 그것은 하나의 대상만을 지칭하는가? 지칭체가 유일함을 보이기 위해서는, 예를 들어, 임의의 가능한 '황금산' a와 임의의 가능한 '황금산' b는 같은 대상인지 확인해야 한다.[2]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확인될 수 없고, 따라서 가능한 대상들은 동일성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1. 브랜덤의 비판

마이농주의는 지칭의도referential purport와 지칭성공referential success을 구분할 수 없다. 어떤 사람 s가 프랑스가 왕정국가라는 오해를 갖고 있다고 하자. s가 '현재의 프랑스 왕은 부자다'라고 말했을 경우, s는 '현재의 프랑스 왕'이라는 확정기술구를 사용하여 특정인을 지칭하고자 의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지칭에 실패했다. 반면 마이농주의에 따르면 '현재의 프랑스 왕'은 어떤 가능한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 즉 마이농주의는 모든 단칭어가 어떤 대상을 지칭하므로 지칭을 의도하는 순간 지칭이 성공한다.[3]

  1. 반 인와겐의 비판

마이농주의자는 두 가지 대상적 양화사objectual quantifier를 구분한다. 하나는 있음을 결여한 대상을 포함해 모든 대상을 논의 영역으로 삼는 양화사 '(∃x)'와, 다른 하나는 있음을 가지는 대상만을 논의 영역으로 삼는 양화사 '(Ex)'이다.

비마이농주의자는 'x 는 있음을 가진다'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y)(x≠y). 따라서 'x는 있음을 가진다'는 '모든'all과 '아니다'not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마이농주의자는 'x 는 있음을 가진다', 즉 '(Ey)(x=y)'를 '~(∀y)(x≠y)'로 정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y)'의 논의 영역은 모든 대상들이기에 있음을 결여한 대상을 포함하므로, x가 있음을 결여한 대상일 경우에도 저 도식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이농주의자는 '있음을 가진다'를 원초적primitive이고 정의할 수 없는indefinable 용어로 간주해야 한다. 문제는 이럴 경우, 대상이 우주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있음을 결여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한 개념을 원초적인 용어로 간주해도 되겠는가? 따라서 반 인와겐은 있음을 넘어서 양화quantifying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4]

사실 의미지칭이론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더 남아 있다.

  1. 동일성에 관한 프레게의 퍼즐

(15)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

(16) 샛별은 샛별이다.

(15)는 우리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해주지만, (16)은 당연히 참인 문장이다. (15)와 (16) 사이에는 분명한 인지적 차이cognitive difference가 있지만, 의미지칭이론은 그러한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의미지칭이론에서는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금성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지칭하고 있으므로 두 문장의 의미는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1. 대체실패의 문제

(17) 철수는 샛별이 샛별이라고 믿는다.

(18) 철수는 샛별이 개밥바라기라고 믿는다.

대체원리에 따르면, 한 문장 내의 어떤 이름을 공지칭어co-referring expression로 대체했을 때 문장의 진리치가 유지되어야 한다. 대체원리는 보통의 문장에는 잘 지켜지는 반면, 명제태도 문장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17)은 참이면서 (18)은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의미지칭이론은 (17)이 참이라면 (18)도 참이라고 해야 한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의미가 같으므로 (17)과 (18)은 동일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1] 정말 반직관적인가? (1)이 직관적으로 유의미한가? 실존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그것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지 않은가? 아직은 잘 모르겠다.

[2] 수학적 증명에서 많이 쓰이는 기법이다. 조건 P(x)가 참이 되는 x가 유일함을 보이기 위해, P(x1)과 P(x2)가 참임을 가정하고, x1=x2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성공하면 P(x)를 만족하는 x는 유일하다고 한다.

[3] 브랜덤의 비판은 잘못된 것 같다. 브랜덤의 표현에서의 '지칭실패'를 마이농의 '있음을 결여한 대상을 지칭함'으로 번역하면 되는 것 아닌가? 마이농은 사태를 적절히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랜덤은 그 표현을 문제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혹자는 논의 영역을 있음을 갖는 대상들만으로 제한한 새로운 보편 양화사를 받아들인다면, 그를 통해 '(Ey)(x=y)'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잘못되었다. 그러한 보편 양화사를 정의하기 위해 'x는 있음을 가진다'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반박은 논점 선취의 오류를 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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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대로 마이농은 해당 사례의 경우 "있음을 결여한 대상"을 지칭하고 있으므로 지칭이 실패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할 것이고, 브랜덤은 "현재의 프랑스 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칭에 실패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핵심은 마이농의 답변이 우리의 언어실천을 적확하게 반영하고 있느냐 라고 봅니다. s는 "현재의 프랑스 왕"이 존재한다고 (잘못) 믿었고 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프랑스 왕"을 지칭하기를 "의도"했습니다. 즉 s가 의도했던 것은 있음을 가진 대상으로서의 "현재의 프랑스 왕"이지 있음을 결여한 대상으로서의 "현재의 프랑스 왕"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s에게 "현재 프랑스 왕은 존재하지 않아"라고 알려준다면, 높은 확률로 s는 "아 그러면 내가 잘못 지칭했구나. 나의 문장이 지칭에 실패했구나"하고 말할 것입니다. (즉 억지로 우기기로 작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있음을 결여한 대상으로서의 현재 프랑스 왕을 지칭한 것이야"라고 답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농의 주장에 따른다면 지칭에 실패하는 경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실천에 비추어 볼 때 반직관적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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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처음에 글을 작성할 때 지칭성공을 '지칭을 하는데 성공하였는가'와 '지칭의도대로 지칭을 하는데 성공하였는가'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아서 약간의 혼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내용 잘 읽었습니다만, 그렇다면 마이농의 견해를 따를 경우에도 후자의 의미로서의 지칭성공은 잘 구분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전자의 의미로서의 지칭성공은 마이농의 견해가 우리의 언어직관에 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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