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2장 요약

II. 존재론, 제일철학, 신학

『형이상학』에서 ‘탐구되는 학문’(zētoumēnē epistēmē)이란 무엇인가? 제4권 제1장에 의하면, 제일철학은 있는 것의 일반적 원리와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 점에서 형이상학이란 보편적 존재론이다. 한편 제6권 제1장에 의하면 탐구되는 학문은 제일철학인데, 이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이면서도 부동하는 것들(akinēta)을 다룬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학이다.

이 두 가지 정의 중 전자는 일반 형이상학(metaphysica generalis), 후자는 특수 형이상학(metaphysica specialis)으로 명명되었는데, 19세기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서는 양자가 양립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세를 얻었다. 어떤 연구자들은 신학적 성격을 축소하려고 하는 한편, 예거(W. Jaeger) 등의 연구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 신학적·플라톤적 단계에서부터 보편존재론적·아리스토텔레스적 단계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두 가지 정의가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거 이후 연구자들은 두 정의의 대립적 측면에 치중했다. 대표적인 이해방식들은 다음과 같다.

(1) 모저(S. Moser)의 해석: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on hēi on)을 탐구하는 학문은 보편적 존재의 학문인 반면, 신학은 특정한 존재자인 신에 대한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보편적 존재 탐구와 특수적 존재 탐구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

(2) 멜란(P. Merlan)의 해석: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은 부동의 존재자인 신을 뜻하는 어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보편적 존재론이 없으며, 신학으로서의 형이상학만이 있을 뿐이다.

(3) 뒤링(I. Düring)의 해석: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과 “제일실체”(protē ousia)는 모두 있음을 뜻하는 반면, “부동의 실체”는 신적인 존재를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6권 제1장에서 타협을 통해 두 정의를 조화시키려 한다.

(4) 망시옹(A. Mansion)의 해석: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은 보편자인 반면, “제일실체”는 개별자이다. ‘형이상학’이라 부를 만한 학문은 보편적인 의미에서 있는 것을 탐구하는 “최고의 철학”(philosophie suprême)인데, 이 학문이 『형이상학』의 주 내용을 이룬다. 반면 제일철학은 이 형이상학과는 달리 성립하는 신학으로서의 학문이다.

(5) 오방크(P. Aubenque)의 해석: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에서 출발했지만 그 결과 이 신학과 상충되는 존재의 보편적 학문에 도달했다. 두 개의 상이한 정의는 『형이상학』이 그 자신 일종의 ‘창조적인 실패’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오늘날 대다수의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은 형이상학의 두 가지 정의가 양립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으로서의 제일철학을 제시하는 제6권 제1장에서 이 학문이 제일의 것이라는 이유에서 보편적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많은 해석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진술에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이해를 살펴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있음의 관점에서 있는 것들 일반을 다루는 학문은 동시에 첫째가는 존재자에 대한 학문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ousia) 혹은 하나(hen)와의 관계 속에서 있다고 말해지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에 대한 학문은 실체에 대한 학문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실체들은 신적인 실체와 관계 맺는 한에서 실체이기 때문에, 실체에 대한 학문은 신적인 실체에 대한 학문이어야 한다. 요컨대 있는 것에 대한 학문은 실체에 대한 학문이며, 실체에 대한 학문은 다시 신적인 실체에 대한 학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 존재론이 신학이며, 신학이 보편적 존재론이라고 믿었다.

모든 존재자는 실체에 의존하며, 모든 실체는 신에 의존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맨 첫째 것을 탐구하기 위해 둘째, 셋째 것을 차례로 선택해서 이에 집중한다. 이런 의미에서,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봤을 때 형이상학의 두 가지 규정은 모순되지 않고 내적 연관성을 지닌다.

1. 지혜: 보편적인 첫째 원인과 원리들에 대한 앎(제1권 제1-2장)

제1권의 1장과 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탐구되는 학문이 제일원인과 원리에 대한 앎이라고 규정한다. 먼저 그는 앎을 감각(aisthēsis), 기억(mnēmē), 경험(empeiria), 학문적 인식(epistēmē) 및 기술(technē)이라는 네 가지 단계로 구별한다. 감각이 가장 낮은 단계이며 학문적 인식과 기술이 가장 높은 단계인데, 기억은 감각으로부터, 경험은 기억의 반복으로부터, 학문적 인식과 기술은 경험으로부터 보편적 관념과 판단이 형성됨으로써 생겨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에 대한 학문적 인식과 기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자는 사실에 대한 앎일 뿐인 반면, 후자는 이유와 원인에 대한 앎까지도 안다. 둘째, 전자를 가지고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가르치지 못하는 반면, 후자를 가지고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를 가르칠 수 있다. 또 여기서 넷째 단계의 앎은 필요에 의해 발생한 앎과 여가활동을 위해 발생한 앎으로 구분되는데, 후자는 전자가 발견되고 난 뒤에 발견된다.

넷째 단계의 학문적 인식 및 기술은 원인과 원리에 대한 탐구인데,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의 학문 혹은 지혜 역시 원인과 원리에 대한 탐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로운 자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로부터 지혜가 무엇인지를 도출해낸다. 지혜는 다음의 여섯 가지 특징을 지닌다. (1) 지혜로운 자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안다. (2) 지혜로운 자는 알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3) 지혜로운 자는 보다 엄밀한 것들을 안다. (4) 지혜로운 자는 원인들을 가르치는 능력이 뛰어나다. (5) 지혜는 자기 목적적이며 앎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6) 지혜는 종속되는 위치가 아니라 지배하는 위치에 있다.

(1)과 (2)는 지혜가 보편적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3-6)은 지혜가 제일가는 원인들과 원리들을 다룬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지혜는 가장 보편적인 인식이자 제일원인 및 제일원리들에 대한 이론적 학문이다.

지혜는 실천적이라기보다 이론적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필요에 의해 생겨난 앎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자연현상에 대한 놀라움과 더불어 깨달은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혜는 두 가지 의미에서 신적이다. 첫째, 신이 지혜를 소유하는 일은 합당하다. 둘째, 지혜는 신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2.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탐구하는 학문(제4권 제1-2장)

형이상학이 아닌 다른 학문들은 있는 것들 중 특정한 종류의 것들만 탐구하는 반면, 형이상학은 있는 것을 있음 자체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보편적 학문이다. 이 탐구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은 있음의 제일원인들이다.

멜란 같은 연구자들은 “있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이 부동의 존재자인 신을 가리킨다고 해석했지만, 이는 그러한 특수한 존재자를 가리키는 어구가 아니다. 이 표현은 있는 것을 이를테면 생명이나, 수적 대상이나, 사회적 대상으로 탐구하지 않고 그저 있는 것 자체로서 탐구하는 학문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표현이다. 형이상학은 이처럼 있는 것을 있음의 관점에서 탐구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학문이다.

그런데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루는 이 학문은 어떻게 학문으로서 통일성을 지니고 성립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비체계적으로, 산발적으로가 아니라 실체라는 하나의 동일한 것과 관계 맺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있는 것”은 오직 실체와의 유비적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지닌다. 이 유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있는 것을 유나 보편자로 취급하지 않으면서도 형이상학을 통일된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있는 것 전체를 다루는 학문인 형이상학은 실체를 주된 대상으로 삼으며, 말하자면 이 실체들의 원리와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3. 자연학, 수학, 제일 철학(제6권 제1장, 제11권 7장)

형이상학 아닌 학문들은 형이상학과 세 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첫째, 비형이상학적 학문은 있는 것 중 특정한 부류만을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둘째, 비형이상학적 학문은 설정된 탐구 대상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것만을 논증한다. 셋째, 비형이상학적 학문은 설정된 탐구 대상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이 비형이상학과 구별되는 세 가지 점이 간접적으로 도출된다. 첫째, 형이상학은 있는 것 전체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둘째, 형이상학은 설정된 탐구 대상이 무엇인지(대상의 본질) 또한 설명한다. 셋째, 형이상학은 탐구 대상의 존재 또한 설명한다.

사유(dianoia)는 사유가 관계 맺는 바에 따라 각 세 가지로 나뉘며, 학문도 그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사유가 제작(poiēsis)에 관계할 때의 학문은 “제작자 안에 그 원리가 있는 대상들을 다루는” 제작학(poietikē), 사유가 실천(praxis)에 관계할 때의 학문은 “행위자 안에 그 원리가 있는 것들을 다루는” 실천학(praktikē), 사유가 순수하게 이론적일 때 학문은 이론학(theoretikē)이다(조대호, 2004, 73). 이론학 중에는 먼저 자연학이 있다. 자연학은 자기 내적인 원리로 말미암아 운동하는 실체들, 혹은 분리되어 있으면서 운동하는 실체들에 대한 학문이다. 다음으로 수학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질료 속에 있는 것이면서 부동하는 실체들(예컨대 수, 도형)에 대한 학문이다. 마지막으로 신학(theologikē) 혹은 제일철학(protē philosophia)은 분리되어 있으면서 부동적인, 영원한 실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이 신학 혹은 제일철학은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탐구하는 보편적 존재론의 과제 또한 맡는다. 왜냐하면 제일철학은 제일 최초에 온다는 점에서 보편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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