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가 후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이유는?

제가 후설의 현상학을 모르다 보니까 아도르노가 『미학 이론』에서 뜬금없이 후설을 비판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음 구절은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에서 「자연미」 챕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Derlei Fluktuationen in der Erfahrung des Naturschönen verwehren jeglichen Apriorismus der Theorie so durchaus wie die Kunst. Wer das Naturschöne im invarianten Begriff fixieren wollte, geriete in Lächerlichkeit wie Husserl, wo er berichtet, daß er ambulando das frische Grün des Rasens wahrnimmt. Wer vom Naturschönen redet, begibt sich an den Rand der Afterpoesie.

자연미 경험에서 그러한 동요는 예술이 그러한 것처럼 이론의 어떠한 선험주의도 거부한다. 자연미를 불변하는 개념에 고정시키려고 했던 사람은 걸으면서 잔디의 신선한 녹색을 지각한다고 보고하는 후설과 같이 웃음거리가 되었다. 자연미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엉터리 시 근처로 간다.

여기서 아도르노가 언급하는 후설 텍스트는 비교적 분명합니다. 후설의 『이념들』 '§88. 실제적이고 지향적인 체험 구성요소들. 노에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Angenommen, wir blicken mit Wohlgefallen in einen Garten auf einen blühenden Apfelbaum, auf das jugendfrische Grün des Rasens usw. Offenbar ist die Wahrnehmung und das begleitende Wohlgefallen nicht das zugleich Wahrgenommene und Gefällige.

우리가 만족감을 갖고 정원에서 꽃피는 사과나무를, 잔디의 청년 같이 신선한 녹색 등을 본다고 가정하자. 분명히 지각과 그에 수반하는 만족감은 지각된 것과 만족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

국역본에서 해당 내용은 각각 아도르노, 『미학 이론』, 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7), 119쪽; 후설,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최경호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7), 334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답변이나 단서를 제공해주시는 분께는 비록 소소하지만 작은 하트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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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칸트의 미학이론을 일부 받아들이면서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더 나아가는데요, 칸트가 말하는 미적인 것의 선험적 연역과 같은 것은 수용하지 않고, 대신 자연과 인간 관찰자간의 변화하는 관계, 즉, 자연미의 추상적 정의에 반대하는 문화적 매개/조정(mediation)을 강조하게 되죠. 인용하신 아도르노의 텍스트가 이와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자연미 경험에서 그러한 동요는 예술이 그러한 것처럼 이론의 어떠한 선험주의도 거부한다. 자연미를 불변하는 개념에 고정시키려고 했던 사람은 걸으면서 잔디의 신선한 녹색을 지각한다고 보고하는 후설과 같이 웃음거리가 되었다. 자연미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엉터리 시 근처로 간다.

여기서 '이론의 선험주의'는 칸트적 입장을 의미하고, '자연미를 불변하는 개념에 고정'시키려는 입장은 후설의 견해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칸트와 같이 체계적/추상적인 접근은 미적 평가가 가지는 매개적/조정적 본성을 알지 못했고, 아름답다고 평가된 객체에 대해서 제대로 고려하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도르노가 가진 문제의식이기도 했죠 (The Fleeting Promise of Art: Adorno's Aesthetic Theory Revisited, Peter Uwe Hohendahl, 2013. 참조) 아시다시피 칸트는 미학이론에서 선험적 인식능력인 상상력과 오성간의 조화로운 합치라는, 주관의 내적 형식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주관/주체의 영역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자연미를 우선시하고 초감성적 이념의 추구를 통해 자연과 화해하려는 칸트적인 입장에 대해 비판을 하게 되죠.

후설은 그의 현상학적 환원을 통하여 실재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닌, 실재가 주관에 드러나는 의식 현상을 탐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태도는 바로,

자연미를 불변하는 개념에 고정시키려고 했던 사람은 걸으면서 잔디의 신선한 녹색을 지각한다고 보고하는 후설 (이하 생략)

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후설은 미학에 대해 체계적인 이론을 남기지는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후설처럼 잔디의 신선한 녹색을 지각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의식" 혹은 "의식현상"에 대해 보고하는 것은 사실, 객체/대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보고하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후설에게 있어 미적 가치는 객관적인 것이고, 이 가치는 이상적인 것을 지향하는 목적론적 입장에 의해 정초된 정상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여기에 대해 한층 자세한 것은, "미적 감정과 상호주관성 ― 칸트와 후설의 비교를 중심으로", 박인철 참고). 아도르노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미적 가치를 객관적인 것으로 보면서, 정상성이라는 것을 개입시킴으로서 주관과 세계의 상관성 안에 미적 가치를 위치시키려는 듯한 이런 후설의 이론도 비판받을 만한 것이겠지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깊이 알지 못하는 주제인데, 주로 문헌들을 찾아보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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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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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도 훗설도 구성주의자입니다. 반면 아도르노는 객체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유물론자입니다. 구성주의와 객체의 우선성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칸트와 훗설에게 자연미는 주체에로 환원되는 것입니다. 칸트에게서 우리가 어떤 자연대상을 무관심적으로 지각할 때 그 자연대상을 아름답다고/어떤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지각에서 그 자연대상이 자연이 인류 일반의 관심 - 개개인들이 사심적 관심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살고자 하고 그 삶이 행복을 수반하기를 바라는, 존엄한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관심 - 에 일치하는 것일 가능성을 시사하는 방식으로 표상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이유는 자연미를 경험하는 개개인의 의식에는 가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바로 그 이유로 문제의 아름다움을/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자연이 정말로 인간을 응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마치 자연이 인간을 응원하는 것처럼 현상한다는 것이다라는 생각인데, 아도르노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오만한 인간중심주의적 생각입니다. 아도르노에게서 우리가 어떤 자연대상을 무관심적으로 지각할 때 그 자연대상을 아름답다고/어떤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지각에서 그 자연대상이 객체로서의 자연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우선성을, 자연지배의 한계(와 고통이라는 그 지배의 귀결)를(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현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이유 역시 자연미를 경험하는 개개인의 의식에는 가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바로 그 이유로 문제의 아름다움을/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훗설 또한 칸트와 같이 구성주의적으로 "지각과 그에 수반하는 만족감은 그 동시적으로 지각되고 만족감을 주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지각을 지각되는 것으로부터 떼어놓고 있습니다. 물론 사소한 의미에서라면 훗설 말대로 후자는 전자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또 구성주의는 전적으로 허위적인 것도 아닙니다. 주체가 주체인 것은 무엇보다도 주체가 구성의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각 또한 일종의 구성입니다. 그러나 전자에는 후자가 반영되어 있으여 이 반영은 후자를 우선적인 것으로 하는 전자와 후자 사이의 비대칭적인 관계 - 인간의 자연지배에 의해 망각되기도 하고 그 자연지배의 귀결로 인해 새삼스럽게 부각되기도 하는 관계 - 의해 매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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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자연미와 미학에 대한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구성주의자와 유물론자의 대립이라고 하니까, 이해가 쉽네요. 중간에 말씀하신 부분, "아도르노에게서 우리가 어떤 자연대상을 무관심적으로 지각할 때 그 자연대상을 아름답다고/어떤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지각에서 그 자연대상이 객체로서의 자연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우선성을, 자연지배의 한계(와 고통이라는 그 지배의 귀결)를(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현상하기 때문입니다."에 공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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