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의 최근 동향

(0) 라쿤님이 요즘 올리시는 글들에 대해서, 최근 인식론의 동향을 알면 잘 이해될 거 같아서 하던 개인적 공부에 대한 요약입니다. 스탠포드 사전의 '인식론' 파트를 기본으로 하며, 온전히 제가 이해했다고 생각해서 정리할 수 있으면, 번역 파트로 옮길 예정입니다.

(1) 현대 분석철학 - 인식론에 대해서는 한국어로 된 문헌을 접하는게 굉장히 어렵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개론서로 나온 최근 (그리고 유일한) 책이 슈토이프의 책인데, 이 책은 기본적으로 원서가 90년대 후반에 나온 책이고, 교과서인 고로 요즘 논의되는 부분과 꽤, 그리고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다.

(2) 슈토이프 이후, 인식론의 전개는 결국 '게티어 문제'를 어떻게 돌파하느냐의 싸움이 되었다. 정당화된 참인 믿음만으로는 지식이 될 수 없다는게, 게티어 문제의 결론이었다.

이 문제를 돌파하는 방식은 크게 a) 저기에 다른 조건을 추가하거나, b) 인식론의 그동안의 전제를 약화시키는 방식이었다. (다른 조건을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자연주의나 뭐 여러 가지 논의가 있는데, 내가 자세히 보지 않았고, 대충 쓰인 설명으로는 유사-게티어 문제에 여전히 빠진다는 점이다.)

인식론의 전제란 무엇인가? 인식론이란 기본적으로 '지식'과 지식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에 관한 문제이다. 그리고 그동안 지식은 수학처럼, '시공간을 초월해서' '영원 불변하는' 어마어마하게 강한 확실성을 가진 무언가로 취급되었다. 이제 게티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처럼 수학 - 영원불변하는 지식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어느정도 '운에 따르는' 혹은 '신빙성이 있는' 것이 지식의 새로운 정의가 되었다.

(3) 한 가지 양상은 '덕 인식론'(virtue epistemology)이다. 덕 윤리학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제 지식을 가진다는 것도, 규범적 우월성 - 즉 덕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예컨대, '정상적인 감각 능력을 지님'부터 시작해서 '관대함'까지도 이 덕에 포함될 수 있다.

(4) 다른 양상은 베이즈주의와 양상 논리로의 접근이다. 이들은 지식을 이제 여러 가지 양성적 - 확률적으로 더 신빙성 있는 무언가로 취급한다.

(5) 사실상 두 흐름은 한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면 '지식'이 '정당화된 참인 믿음'(즉 게티어 문제로는 지식이 될 정도로 확실성은 부족한 것) 이상인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이다. 이는 다시금 믿음과 지식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연결된다. [라쿤님이 요약해서 올리시는 책은 이 부분과 연관된 문제다.]

(6) 또한 덕 인식론과 베이즈주의/양상논리적 접근은 모두 지식의 주체에 관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더 이상 지식은 단순히 ''한 인간 개별자'의 인지적 성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양상 논리 시스템의 인지적 성공, 정교한 과학적 탐구 시스템의 성공에서부터, 여러 사람들이 모인 실험실의 성공까지, 인식론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예상하겠지만, 이는 자연히 메레올로지 문제를 가져온다. 즉, 부분의 성공이 전체의 성공으로 귀결하는가? 혹은 전체의 성공이 꼭 부분의 성공으로 귀결하는가?)(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사회 인식론[social epistemology]이다.)

11개의 좋아요

제 요약문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쯤 Willamson 1.4절 요약이 올라갈 것 같습니다.

(1) 말씀하신대로 2000년대 이후 인식론에 관해 한국어로 접근할 수 있는 책이 딱 눈에 띄진 않는 것 같습니다. 영문으로도 2000년대 이후 흐름까지 포괄하는 개괄서가 잘 없는 것 같구요. 저도 인식론 분야에 관심을 가진지 얼마 안 되서 잘 모르지만, 제가 도움 받고 있는 책들을 공유드립니다.
1> Epistemology: An Anthology - 김재권과 어니스트 소사가 편집한 앤솔로지로 표준적인 선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각 장별로 주제 개괄도 되어있습니다.
2> Knowledge: A Very Short Introduction -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는 믿을만한 저자진과 방대한 주제, 컴팩트한 분량으로 유명한 입문서 시리즈입니다. 이 책은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것이라 현대적인 논의까지 알뜰하게 커버한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5) 현재까지 제가 요약한 Williamson의 Knowledge and its Limits의 제 1장 논의는 어찌보면 믿음과 지식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한다는 측면이 두드러진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뒤로도 인식론이 주제인 만큼 지식과 믿음의 관계를 떼어놓고 설명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엔 윌리엄슨의 지식-우선 인식론은 지식과 믿음의 관계 재정립을 넘어 더 광범위한 함축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1.4절에서 인상 깊었던 두 구절이 "지식은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사실 상태 태도(factive stative attitude)이다."와 "제 2장과 3장에서는 인식론과 심적 상태의 본성의 연결에 관해 더 심도 있게 탐구할 것이다. 우리는 인식론이 심리철학의 한 분과가 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식론을 심리철학 밖에 두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음의 본성에 관해 근본적으로 결핍된 개념에 다다를 뿐이다."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요약문에서 확인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제가 요약하는데 성공한다면..)

앞으로 관련 주제로 많은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6개의 좋아요

(1) 저야 말로 고맙습니다 ㅎㅎ.

그 동안 제 글을 조금 보셨다면 알겠지만, 사실 기존 인식론에는 제가 진짜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애당초 관심을 가지던 주제들도 믿음, 능력, 행위처럼 보다 실천적인/윤리학적인 문제들이여서, 철학을 그만두려고 했는데, 우연치 않게 최신 영미 학계 논의는 이쪽이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조금씩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