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원,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제10강 요약(完)

제10강 자유의 길

제1장 정서들의 이성적 질서

1. 욕망을 탈구축하기

들뢰즈는 수동적 기쁨으로부터의 고유한 공통 통념의 형성을 통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윤리적 이행이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들뢰즈의 해석은 놀람(admiratio)에 관한 스피노자의 논의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무시’(contemptus)가 흔하고 평범하게 생각되는 대상을 지나쳐버리는 일을 뜻한다면, ‘놀람’은 이례적인 대상을 맞닥뜨렸을 때 그 대상에 정서적으로 고착되는 일을 뜻한다. 놀람 그 자체는 정서가 아니라 상상이다. 왜냐하면 놀람과 더불어 맞닥뜨리는 대상은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킬지 감소시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놀람은 다른 정서들과 결부될 때 그 정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놀람은 두려움과 결합하여 공황(consternatio), 사려깊음, 근면함 등과 결합하여 경외(veneratio), 분노나 시기심 등과 결합하여 소름끼침(공포; horror) 사랑과 결합하여 헌신(devotio)을 산출한다.

어떤 대상이 놀람과 더불어 인식될 때 우리는 그 대상과 수동적인 관계를 맺고 그 대상에 종속되는데, 스피노자가 보기에 대다수 사람들은 놀람으로 말미암아 예속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놀람에 대한 논의를 고려하지 않는 들뢰즈의 해석은 수동적 기쁨에서 적합 관념을 형성하고 능동적 기쁨을 산출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일을 설명하는 데 난점을 갖는다. 왜냐하면 놀람과 더불어 수동적 기쁨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기쁨을 주는 대상에 고착되어 거기에 머물러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놀람이 형성하는 고착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은 먼저 수동적 정서와 그 원인을 분리하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 정서를 야기하는 대상을 고립시켜 지각하지 않고 그 대상을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각하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그 사물은 말하자면 평범해지며, 이로써 그에 대한 정서적 고착은 감소한다. 두 번째 방법은 상상을 통해 수동적 정서를 산출하는 복수의 원인이 있음을 인식하는 일이다. 정서를 여러 원인들과 연결시키는 일은 수동적 고착에의 경향을 줄이며,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정서들에 대해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정서들의 인과관계를 스스로 형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¹ 우리의 정서들을 제어하고 지성에 따라 스스로 질서지음으로써, 다시 말해 “올바른 삶의 규칙”(E5p10s)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능동성으로 나아갈 조건이 갖춰진다.

2. 마치 현자인 것처럼 행동하기

그러나 이것만으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성에 의해 덕을 체득하고 덕에 따라 행위하면서 능동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소수이며, 다수의 사람들은 대개 『신학정치논고』에서 제시하듯 올바른 삶의 규칙, 예컨대 성서처럼 다중을 이끌어주는 도덕적 지침에 복종하며 살아간다. 한편 복종하는 일 자체가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적어도 올바른 삶의 규칙, 혹은 인민 전체의 안녕을 위해 국가의 법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수동적인 사람들이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복종이 능동적 삶으로의 이행을 돕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논고』에서 자유인도 노예도 아닌 제3의 유형을 제시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에게 자유인은 “이성에 의해 인도되”고 “자기 자신의 욕망에만 따르”는 사람인 반면, 노예는 “정서 또는 의견에 의해 인도되는 사람”이며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이다(E4p66s). 이와 유사하게 현자는 “마음의 번뇌가 없고,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 자기 자신과 신, 실재를 의식하기 때문에 결코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 항상 진정한 마음의 만족을” 지니는 사람인 반면, 무지자는 “외부 원인에 의해 수많은 방식으로 자극받”고, “마음의 진정한 만족을 가질 수 없”으며, “자기 자신과 신, 실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살아가며, 따라서 수동적으로 겪는 것을 그치자마자 존재하기를 그치”는 사람이다(E5p42s). 한편 (자유공화국의) 신민(subditus)은 타자의 명령에 복종하기는 하지만 인민의 안녕을 이유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는 꼭 현자가 아니더라도 유덕하게, 즉 마치 현자와 같이 행위할 수 있다.

제2장 신의 지적 사랑

1. 『윤리학』 5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스피노자는 『윤리학』의 제4부까지 중세 기독교 신학과 목적론적 세계관에 반하여 자연주의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해왔다. 그런데 제5부에서는 기독교 신학적인 용어들이 대거 도입되면서 마치 이제까지와는 판이한 주장들이 전개되는 듯 보인다. 예컨대 스피노자는 “현세의 삶과 관련된” 논의들을 마치고 “신체의 실존과 관계없는 정신의 지속”에 대한 논의로 이행할 것이라고 말한다(E5p20s). 이러한 구절은 마치 스피노자가 자연 속의 삶 너머의, 어떤 내세의 삶을 긍정하는 듯 읽히며, 마치 영혼불멸의 이론이 그러하듯 신체의 소멸 이후에도 지속하는 정신을 주장하는 듯 보인다. 이로 말미암아 『윤리학』 제5부의 후반부를 둘러싸고 그릇된 해석들이 등장했다. 예컨대 실존과 본질을 엄격히 구별하고, 실존을 신체에, 실존을 넘어선 영원한 본질을 정신에 귀속시키는 플라톤주의적 해석이 등장한 것이다.

제5부 후반부와 관련된 논점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으나, 여기서는 신의 지적 사랑과 관련된 논의들을 다루고자 한다.

2. 스피노자 철학에서 사랑의 개념

기본적으로 사랑은 제7강에서 제시되었듯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에 수반되는 기쁨”(E3p13s)이다. 이 정의를 통해 스피노자는 사랑받는 대상의 실존에 중점을 두었던 종래의 정의에 반해, 사랑하는 사람이 획득하는 역량의 증대와 만족을 강조한다. 한데 사랑은 정념적 사랑, 신을 향한 사랑(amor erga Deum), 신의 지적 사랑의 세 가지로 나뉜다.

3. 신을 향한 사랑

먼저 정념적 사랑은 (1) 일반적으로 공유할 수 없는 대상을 추구하는 까닭에 집착을 낳고, (2) 사랑하는 만큼 대상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 상호적 성격을 띠며, (3) 사랑받으려는 욕망이 좌절되자마자 미움으로 쉽게 변질되고는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정념적 사랑은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키고 능동성으로 이행할 신빙성 있는 방법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수동성과 예속을 야기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둘째로 신을 향한 사랑은 정념적 사랑과 정반대로 (1) 공유 가능한 대상(신)을 추구하며, 공유할수록 사랑이 배가된다. 특히 스피노자의 신이 인격신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인 합리적 인식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신을 향한 사랑은 (2) 상호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사랑의 대상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까닭에 그로부터 역으로 사랑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신을 향한 사랑은 (3) 미움으로 전도될 수 없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신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신은 모든 유한한 사물의 자기보존 노력의 원천인 까닭에 신으로부터 결과하는 슬픔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을 향한 사랑은 정념적 사랑과 정반대의 특성들을 지니는 까닭에 윤리적 이행을 뒷받침할 기반이 된다. 그러나 이는 윤리적 이행을 완수하기에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을 향한 사랑은 영원이 아닌 지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지속을 넘어 영원에 머무르는 사랑이란 신의 지적 사랑이다.

4. 2종의 인식과 3종의 인식

앞서 제6강에서는 인식의 세 종류로서 상상, 이성, 직관이 소개되었다. 들뢰즈는 이 인식의 세 유형이 각기 다른 실천적 유형의 상이성을 함축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상상은 외부 원인에 예속되고 휘둘리는 수동적 삶, “원인에 대한 인식 없이 자신의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목적의 연쇄에 의존하는 삶”(진태원, 2022, 320)이며, 이는 정념적 사랑에 상응한다. 이성은 제9강에서 제시되었듯 공통 통념을 형성함으로써 기쁨을 질서짓고 조직화하여 정서들을 제어할 발판을 마련하는 삶이며, 이는 신을 향한 사랑에 상응한다. 셋째로 직관은 현자나 자유인의 순수 능동적 삶, 지복(beatitudo) 및 신의 지적 사랑에 상응한다.

여기서 2종과 3종의 인식 사이의 관계가 문제시된다. 양자의 차이는 대상의 차이에 연원하는 것이 아니라 절차상의 차이 그리고 “윤리적 주체화 양식의 차이”(진태원, 2022, 321)에서 찾아져야 한다.

1) 두 인식의 공통점

먼저 양자 모두 적합한 인식이라는 데에서 공통적이고 연속적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3종의 인식을 향한 욕망은 상상에서가 아닌 이성에서 비로소 생겨난다. 둘째로 양자 모두 정신에 가해지는 나쁜 정서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능동정서들과 결부된다.

2) 두 인식의 차이점

또한 2종과 3종의 인식은 모두 동일한 대상을 지니며 필연적이다. 양자의 대상은 모든 사물이 “본질과 실존의 측면에서 신에게 의존한다는 것”(E5p36s)이다. 양자의 차이는 절차상의 차이이다. 이성은 사물들의 본질에 관한 공통 통념의 형성으로부터 신의 속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반면, 직관은 신의 속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인격성을 위시하여 개별적 사물이 지니는 특성들을 신에 덧붙여서 신을 멋대로 상상한다. 그러나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려면 이러한 선입견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즉 “신에 대한 상상적이고 신학적인 표상에서 벗어나 자연적인 인과 연관의 체계로서 신을 인식해야” 한다(진태원, 2022, 325). 그러나 신에 대한 허위적인 상상들은 자기보존 노력 및 정서들과 결부되어 있어 쉽사리 제거할 수 없는데, 이 과정에서 2종의 인식이 이 선입견들을 대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2종의 인식은 사물들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신이라는 원인과 결합시키지”(진태원, 2022, 326) 못한다. 다르게 말하면, 2종의 인식은 사물들의 인과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하지만, “이것을 신이라는 원인과 개별적인 인식 주체 사이의 내적인 관계로 개체화 또는 주체화하지”(진태원, 2022, 326) 못한다.² 2종의 인식은 3종의 인식과 달리 신을 개별 사물들의 인식 및 실존의 원인으로서 파악하지 못하고, 신을 사랑의 대상으로만 파악할 뿐이다.

5. 신의 지적 사랑의 의미

1) 형상적 원인으로서의 정신

3종의 인식은 정신을 그 형상적 원인(=적합한 원인)으로 해서 산출된다. 정신은 적합한 원인으로서 3종의 인식을 그 결과로 생산한다.

2) 3종의 인식과 신의 지적 사랑의 관계

3종의 인식은 2종의 인식과 달리 신을 원인으로 파악한다.³ 이때 3종의 인식은 정서작용, 즉 지고의 기쁨을 동반한다. 이 정서가 바로 신의 지적 사랑인데, 이 사랑은 신을 단순한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일어난다.

어째서 3종의 인식으로부터 신의 지적 사랑이라는 정서가 생겨나는가? 이는 개인이 자기 자신을 적합한 원인으로 해서 인식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정신이 적합한 원인이 되어 적합한 관념을 산출했다는 것은 정신이 능동적이 된다는 점, 주체화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왜 이러한 기쁨이 자기에 대한 관념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관념에도 수반되는가? 유한한 정신의 능동성이 신의 무한한 생산 역량을 나누어 갖는 데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개인이 능동적으로 인식을 생산한다는 것은 자신이 신의 역량의 일부라는 점에 대한 깨달음을 수반한다.

왜 3종의 인식은 신의 지적 사랑인가? 왜냐하면 신은 인식하는 정신의 외적 원인이 아니라, 내적 원인, 즉 정신이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인식하는 개인과 그 원인으로서 신 사이에는 외재적인 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진태원, 2022, 331). 일반적으로 정서는 정서를 느끼는 주체와 정서를 유발하는 대상의 분리를 함축하지만, 신의 지적 사랑은 이 주체-객체의 간극 및 인식과 정서의 간극을 제거하고 양자를 통일시키는 활동이다.⁴

3)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의 차이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 사이의 차이는 요컨대 두 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신을 향한 사랑이 지속에 머무르는 반면 신의 지적 사랑은 영원성에 머무른다. 둘째, 신을 향한 사랑이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함유하는 정서인 반면 신의 지적 사랑에서 인식 주체는 인식 대상의 일부를 이루는 까닭에 그러한 대립을 극복한다. 신의 지적 사랑은 “인식하는 개인의 주체화 또는 능동화”와 더불어 “각각의 개체들이 […] 고립되는 것과 상반되는 […] 탈개체화의 운동”을 함축한다(진태원, 2022, 332).

이 과정에서 신을 향한 사랑은 정념적 사랑으로부터 탈피하여 신의 지적 사랑으로 나아갈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


¹ 그런데 수동적 기쁨을 통한 공통 통념의 형성도 여러 대상들을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놀람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은 수동적 기쁨으로부터 공통 통념을 형성함으로써 능동성으로의 이행이 가능해진다는 들뢰즈의 전략과 실질적으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진태원의 비판은 들뢰즈의 전략에 대한 결정적인 반박은 되지 못하는 듯 보인다.
² 그러나 2종의 인식의 한계를 이렇게 서술한다면, 2종의 인식은 사물들에 대한 필연적 인식에 머물러 있을 뿐 아직 신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³ 3종의 인식이 신을 만물의 원인으로 파악하고 신의 본성에 대한 파악으로부터 개별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파악으로 나아간다면, 3종의 인식은 바로 철학함 그 자체 아닌가? 그렇다면 스피노자의 체계는 그 스스로 3종의 인식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포함하고 설명하는 일종의 자기지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는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이는 절대정신의 자기인식으로서 철학을 제시하는 헤겔의 구도와 대단한 친연성을 띠게 되는 듯하다.
⁴ 『윤리학』 제5부의 이러한 구도 역시 셸링이나 헤겔을 위시하여 독일고전철학의 방향 설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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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유철 님이 정리해주시는 글을 보고 책을 사서 읽어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여 어제 주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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