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원,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제9강 요약

제9강 정서의 힘, 이성의 역량

제1장 스피노자 윤리의 기본 개념들

이제까지 다루었던 스피노자의 인간학의 요점은 다음처럼 서술될 수 있다.

(1) 모든 유한양태의 본질은 자기보존 노력(코나투스)이다.
(2) 인간의 본질은 (무의식적) 욕구 혹은 (의식적) 욕망이다.
(3) 정서란 인간의 행위 역량의 증가 혹은 감소 작용이다.
(4) 인간의 기본 정서는 욕망, 기쁨, 슬픔인데, 기쁨은 행위 역량의 증대, 슬픔은 행위 역량의 감소이다.
(5) 욕망은 행위 역량의 증대를 추구하고 감소를 피하도록 정향되어 있다.
(6) 정서모방은 우리와 유사하고 생각되는 대상이 경험한다고 상상되는 정서를 마찬가지로 경험하게 되는 현상이다.
(7) 암비치오는 남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기 위한 노력인데, 이는 사회적 합일을 이루도록 작용하지만, 남으로 하여금 나의 욕망을 욕망하게 하려는 지배욕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

1. 수동정서와 능동정서

스피노자 윤리학의 목표는 정서들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정서들을 제어하고 활용하여 자유를 찾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태껏 논의되었던 정서들은 모두 수동정서이다. 수동정서란 외적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정서이다. 대개 인간은 외부 대상으로부터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수동정서에 깊은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 그러나 수동정서는 우리에게 통제 불가능한 외적 대상들을 원인으로 갖는 정서라는 점에서, 자기보존의 관점에서는 신빙성 없는 정서이다. 수동정서를 따를 경우, 인간은 공유 불가능한 대상들을 갖기 위해 서로 반목하고 투쟁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스피노자는 이처럼 수동정서에 예속된 삶을 벗어날 길을 『지성교정론』을 위시한 초기 저작에서부터 모색했다. 그에 의하면, 부, 명예, 정욕 등 소멸하는 대상들을 수동적으로 욕망한 채 살아가는 자에게는 기쁨이 아니라 정신의 산란함과 슬픔만이 남는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영원불멸하는 대상들을 사랑해야 하며, 이 대상들이야말로 우리에게 단적으로 기쁨을 가져다준다.

『윤리학』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수동정서와 대조되는 능동정서들을 제시하는데, 능동정서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원인과 부적합한 원인의 구별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능동과 수동에 대한 정의를 살펴봐야 한다. 먼저 적합한 원인이란 “그 결과가 원인 자신에 의해 명석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이며, 부적합한 원인은 “그 결과가 원인 자신만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E3d1).

x는 적합한 원인이다=df. x의 결과는 x에 의해 그리고 오직 x에 의해서만 산출된다.

x가 적합한 원인일 때 그 결과는 x에 의해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반면, x가 부적합한 원인일 때 그 결과는 추가적인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고 한낱 부분적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이 구별을 바탕으로 스피노자는 능동과 수동을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능동이란 “우리의 본성만으로 명석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어떤 것이 따라 나올 때”를 뜻하며, 수동이란 “우리가 그것의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한 어떤 것이 […]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따라 나올 때”를 뜻한다(E3d2).

x는 능동적이다=df. x는 x의 행위 결과에 대한 적합한 원인이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것은, 종래의 철학에서 능동이 작용의 원인으로, 수동이 작용 결과로 규정되는 데에 반해, 능동과 수동 모두 원인으로 정의된다는 점이다. “능동과 수동의 차이는 원인이냐 결과냐[…]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원인이냐의 차이”이다(진태원, 2022, 263).

이로부터 능동정서와 수동정서의 구별을 이끌어낼 수 있다. 능동정서는 온전히 우리 자신의 행위를 그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정서인 반면, 수동정서는 외적 원인이 개입함으로써 일어나는 정서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켜주는 기쁨과 같은 정서도 능동적일 수도 있고 수동적일 수도 있다. 이때 수동적인 기쁨은 외부 대상에 의존하는 기쁨이라는 점에서 단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나아가 이 기쁨이 쾌감이라면, 이는 우리의 전체적인 역량 증가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쁨이라도 온전히 우리 자신에 의해, 능동적으로 기쁨을 산출할 수 있느냐 역시 중요해진다. 한편 슬픔은 우울이든 고통이든 언제나 수동적인 정서이다.

스피노자는 능동정서 일반을 강인함(fortitudo)이라고 부르며, 이를 굳건함(animositas)과 관대함(generositas)으로 나눈다. 굳건함은 “각자가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며, 관대함은 “각자가 오직 이성의 인도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우정으로 연결되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다(E3p59s). 굳건함은 이성적인 자기보존 욕망이라는 점에서 자기윤리라면, 관대함은 이성적으로 타인과 우정을 맺고 타인을 이롭게 하려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타자윤리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 강인함은 자기윤리와 타자윤리로 이루어지며, 능동성은 자기를 이성적으로 잘 보존하는 것만으로는 성취하기 힘들며, 타인과 이성적으로 잘 관계 맺는 일을 또한 수반해야 한다. 굳건함의 사례에는 각각 “절제, 절도 및 위험에 직면하여 마음을 다잡는 것”이 있으며, 관대함의 사례에는 “겸손함이나 너그러움”이 있다(E3p59s).

능동정서에 대한 정의에서 알 수 있듯, 『윤리학』의 목표는 외적 대상에 의존하는 수동성을 벗어나 능동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2. 좋음과 나쁨

스피노자에게 좋음(선)과 나쁨(악)은 사물에 실재적으로 귀속되는 특성이 아니라, 사물들을 비교함으로써 형성하는 통념이다. 제7강에서 소개되었듯, 스피노자는 무언가가 좋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 도덕적 판단은 사물의 성질에 기반을 둔 객관적 판단이 아니라 욕망에 기반을 둔 주관적인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음과 나쁨의 범주는 실용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계속 사용되어야 한다. 좋음과 나쁨은 “인간 본성의 모델”(E3p9s), 즉 1종의 인식에 머물러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규범적인 모델에 관계함으로써 실천적 지침을 제공한다. 스피노자에게 좋음은 “우리가 설정하는 인간 본성의 모델에 우리를 좀 더 가깝게 해주는 수단”이며, 나쁨은 “우리가 이 동일한 모델을 본뜨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다(E3p9s). 또한 좋음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E4d1)이며, 나쁨은 “우리가 좋음을 소유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E4d2)이다. 한데 좋음과 나쁨은 다름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의 정서이며, 결국 이는 우리의 역량을 증대 및 감소시키는 것에 대한 범주이다. 이러한 정의로 스피노자는 중세철학의 패러다임이었던 목적론적 세계관을 거부한다. 종래의 철학은 좋음과 나쁨을 신에 의해 설정되고 세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객관적 속성처럼 생각했지만, 스피노자는 이러한 생각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제2장 어떻게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1. 정서에는 정서로

앞서 이야기했듯, 『윤리학』의 목표는 예속에서 자유로, 수동에서 능동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정념과 욕망을 이성에 의해 억제함으로써 자유를 추구했던 종래의 철학과 달리,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을 욕망에 두는 까닭에 정서나 욕망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변용되고 변용함으로써, 즉 다른 사물들과 상호작용함으로써만 존재한다. 즉 인간은 자연적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나아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물이다. 그런데 이 변용이란 정서적인 변용, 일반적으로는 기쁨이나 슬픔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서 정서나 욕망에서 아예 벗어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정서는 항상 그와 대립되면서도 더 강한 다른 정서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우리의 능동적 행위를 방해하고 우리를 예속시키는 정서는 또 다른 정서를 통해서만 극복된다.

2. 슬픔에서 기쁨으로,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들뢰즈의 해석

이 『윤리학』의 주된 물음에 대한 스피노자의 기본적인 방안은, 예속의 정서를 자유의 정서로 대체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떻게 하면 […] 수동적인 정서들을 능동적인 정서들로 바꿀 수 있는지”(진태원, 2022, 282)이다.

이러한 윤리적 이행의 문제를 들뢰즈는 1-3종의 인식에 대한 구별을 통해 해석한다. 이 중 2종의 인식인 이성은 제5강에서 서술되었다시피 “실재의 특성들에 대해 공통 통념[notio communis]들 및 적합한 관념들을 갖고 있다는 점으로부터”(E2p40s2) 보편 통념을 형성하는 인식, 즉 공통 통념에 기반을 둔 인식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에서 공통 통념은 두 가지로 제시되는데, 이는 게루(M. Gueroult)에 의해 ‘보편적 공통 통념’(notion commune universelle)과 ‘고유한 공통 통념’(notion commune propre)으로 명명된다. 전자는 “모든 것에 공통적인 것, 그리고 부분과 전체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E2p38)에 대한 통념이며, 후자는 “인간 신체” 및 인간 신체를 변용하는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또 그것들에 고유한 것, 그리고 그것들 각각의 부분과 전체 안에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E2p39)이다. 보편적 공통 통념은 모든 물체에 공통적이고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인 반면, 고유한 공통 통념은 인간 신체와 이 신체에 작용하는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균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공통 통념은 철학사에서 자명한 진리, 즉 공리의 의미로 사용되어 왔으며, 스피노자에서는 이것이 보편적 공통 통념이다. 한편 들뢰즈가 보기에 고유한 공통 통념은 이와 반대로 유한한 사물들의 자기보존 노력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생물학적 공통 통념이다. 또한 공통 통념이 위와 같은 의미에서 이론적 혹은 사변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인간이 적합한 인식을 획득함으로써 자기의 역량을 증대시키고 능동적인 존재가 되는 방법에 관련되는 공통 통념은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들뢰즈는 종래의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간과해왔던 고유한 공통 통념의 생물학적 및 실천적 함의를 강조함으로써 윤리적 이행을 설명하고자 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윤리학』의 제2부는 이론적인 관점에서 공통 통념을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논의한다. 그런데 이는 발생적인 관점에서 실제 우리가 공통 통념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이론적 설명이 가장 보편적인 공통 통념에서 출발해서 특수한 보편 통념으로 나아갔던 것과 달리, 들뢰즈가 보기에 실천적 관점에서의 설명은 가장 특수한 공통 통념에서부터 출발해서 보편적인 보편 통념으로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수동적이고 부적합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할 터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간은 어느 사물이 기쁨을 주고 어느 사물이 슬픔을 주는지 파편적으로만 안다. 경험을 통해 그러한 지식을 점차 확장해나가고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비교, 대조, 분류함으로써 인간은 적합한 지식을 형성하고 공통 통념을 형성할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은 바로 이러한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들뢰즈는 이 이행 과정 속에서 수동적 기쁨의 중간자적 역할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수동적 기쁨은 인간이 수동정서에 예속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능동성으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때 공통 통념은 수동적 기쁨과 더불어 일어나는 인식들을 분류 및 조직화함으로써 적합한 인식을 생성하고 이로써 인간이 능동적인 기쁨으로 나아가는 기반이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동적 기쁨은 우발적으로, 어쩌다가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켜주는 현상을 나타낸다. 이러한 기쁨들을 통해 인간은 자기의 역량을 증대시키고 적합한 인식을 형성할 기회를 우연하게 얻게 된다. 그런데 수동적 기쁨은 외적 대상을 그 원인으로 지니는 까닭에 우리가 그에 대한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자기보존의 관점에서 신뢰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동적 기쁨에서 나아가 공통 통념들을 형성하고 능동적 기쁨을 스스로 산출해야 한다. 요컨대 이 과정은 수동적 기쁨 → 공통 통념(적합 관념)의 형성 → 능동적 기쁨 → 능동적 기쁨에 의한 수동적 기쁨의 대체로 요약될 수 있다.

윤리적 이행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은 설득력을 지니지만 중요한 난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제10강에서 다루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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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부분 직접 요약 작성하신건가요? 아니면 진선생님이 요약하신 것을 옮기신걸까요? 상당히 깔끔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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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맨 앞에 있는 건 진태원 선생님의 요약입니다. 책에 있는 요약을 더 짧게 다시 요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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