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정서모방
제1장 모방 욕망, 욕망의 모방
스피노자에 의하면, 욕망을 포함하여 우리의 정서는 자발적으로가 아니라 모방을 통해 생겨난다. 즉 우리가 느끼는 욕망, 기쁨, 슬픔, 사랑, 미움 등은 다른 이가 느끼는 정서에 대한 모방이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정서가 주관에 의해 내밀하게 또 직접적으로 야기되는 작용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컨대 누군가 옆에서 울면 같이 슬퍼지는 일 등은 정서가 사실 타자에 의해 매개되어 발생한다는 점에 대한 예시이며, 스피노자의 정서 모방 개념, 혹은 동시대 철학에서 지젝이 제시하는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¹
제2장 정서모방
정서모방이란, 우리와 직접적인 정서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대상이 우리와 유사하다는 사실에 의해 우리가 그와 비슷한 정서를 갖는 일을 말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와 비슷한 […] 어떤 실재가 어떤 정서를 겪는 것을 상상하게 되면, 우리는 이 사실에 의해 비슷한 정서를 겪게 된다.”(E3p27) 정서모방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연민이 있다. 이제까지의 정서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에게 슬픔을 주는 대상을 미워하게 되지만, 정서모방 이론에 따르면 그 대상이 우리와 유사할 경우 우리는 그에 연민을 느끼게 된다.
1. 암비치오: 잘 보이려는 욕망
앞서 서술되었다시피, 기쁨을 추구하고 슬픔을 피하려는 노력은 기쁨과 슬픔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아니라 상상된 인식에 기반을 둔다. 나아가 스피노자에 의하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고 상상되는 것을 추구하고 사람들에게 슬픔을 준다고 상상되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우리와 직접적인 정서적 관계를 맺지 않지만 우리와 유사하다고 상상되는 사람들을 포함하며, 나아가 정서모방은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와 유사하다고 상상되는 모든 대상들(동물, 식물, 무생물)에도 일어날 수 있다.
암비치오(ambitio)란 이처럼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려는 노력을 의미한다(E3p29s). 암비치오는 라틴어 단어 ‘ambitio’의 여러 의미 중 하나처럼 야망이나 공명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암비치오는 단순히 자기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내가 잘 보여야 하는 특정인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들이 기뻐한다는 사실 때문에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일이다.² 이런 의미에서 암비치오는 “다른 경우라면 보통 사람 좋음[humanitas]이라 불린다”(E3p29s). 사람 좋음은 이해타산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이롭게 하는 노력이다. 이렇게 볼 때, 아첨과 사람 좋음은 아예 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것이라기보다는 동일한 정서모방의 결과로 출현하는 것들이다.
2. 마음의 동요
정서모방은 단순히 남을 모방하기 위한 나의 일방향적인 노력이 아니다. 정서모방은 그 반대로 나로부터 남을 향해 이루어지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며, 나아가 정서모방이 아닌 정서적 관계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다.
여기서는 정서모방이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초래하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갈등은 마음의 동요(fluctatio animi)를 매개로 발생한다. 기존에 우리가 미워하던 대상이 어떤 사랑의 대상과 유사하다는 상상을 할 때 사랑과 미움은 우리 마음에 공존하게 되는데, ‘마음의 동요’는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마음의 혼란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남들도 똑같이 사랑한다고 상상할 때 그 대상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미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만일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남들이 미워한다고 상상한다면, 혹은 그 반대라면, 우리는 마음의 동요를 겪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동요는 정서모방과 결합되었을 때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게 된다.
3. 지배욕
일반적으로 마음의 동요에 처한 사람들은 이 동요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이 탈출의 과정에서 정서모방이 결부된다면 이는 지배욕으로 바뀌게 된다. 지배욕이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사랑하게 하려”는 노력, 그리고 자신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게 하려”는 노력을 뜻한다(E3p31c). 이 서술 자체에서 볼 수 있듯, 지배욕은 전도된 암비치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지배욕은 기본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욕망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똑같은 지배욕을 가지고 나를 지배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내가 이에 굴복한다면 나의 지배욕은 좌절된다. 한편 내가 타인에 대한 지배를 성취한다고 해도, 우리 모두가 욕망하는 대상은 보통 공유 불가능한 것인 까닭에 다른 사람 모두를 나의 경쟁 상대로 돌리게 된다. 이런 까닭에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욕망을 따라 욕망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들이 진짜로 나의 욕망을 따를까봐 두려워하게 되며, 이렇게 해서 다시 또 마음의 동요에 빠지게” 된다(진태원, 2022, 251).
이처럼 사람들이 타인으로 하여금 자기와 같은 대상을 욕망하게 하려는 이유는, 우리가 (전도되지 않은 의미에서의) 암비치오를 갖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 기저에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함으로써 자기보존을 행하기 위함이라는 이유가 놓여 있다. 요컨대 인간은 욕망이라는 코나투스를 그 본질로 갖는데, 이 욕망은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정서모방 관계 속에 들어서 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서 근본적으로 욕망은 항상 타인의 욕망에 매개되어 있다. 발리바르는 스피노자 인간학 및 정치학의 이 특성을 시몽동의 개념을 빌려와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이라 명명한다.
¹ (특히 아도르노 등에 의해 이해된) 미메시스 개념이라든가, ‘우리는 항상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 식의 논제도 여기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² 이익을 위해 아첨을 떤다는 의미 외에도 서로 뜻이 맞는다는 뜻을 지니는 ‘영합’ 같은 번역어가 좋을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