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원,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제7강 요약

제1장 코나투스와 욕망

인식에 대한 순수 이론적 설명과는 달리, 실제로 사물을 파악할 때에는 이러저러한 정서가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윤리학』의 제3부-제5부는 이러한 정서 또 이 정서가 인간의 인식 및 삶과 지니는 관계가 고찰된다.

1. 스피노자에게 개체란 무엇인가?

개체란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일정한 관계에 따라 연합된 다수의 물체들로 구성된 복합 물체를 뜻한다. 이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보존되는 한, 각 부분들의 크기가 변화하더라도 개체는 자기동일하게 지속한다. 이런 의미에서 운동과 정지의 관계는 개체의 본질을 규정하는 형상이다.

스피노자는 나뉠 수 없는 원자적 개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체는 언제나 복합체이며, 또 복합체를 구성하는 각 부분 역시 스스로 복합체이다. 또한 이 복합체들이 모여 더 큰 개체를 형성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매개적 무한양태인) 우주 전체 역시 하나의 개체이다.¹ 요컨대 스피노자는 개체의 무한한 분할 가능성을 인정한다.

또한 개체의 본질은 어느 부분에 의해서가 결정되거나 항구적으로 존속한다기보다 관계적으로 정의된다. 개체는 부분들 사이에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일정하게 보존될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지속하며, 그렇지 않으면 부분들로 해체·분산된다.

신체 역시 여느 개체와 마찬가지로 물체들을 그 부분으로 갖는 복합체이며, 항상 다른 물체들을 변용하고 다른 물체들에 의해 변용되면서 존속한다. 이 변용 관계야말로 신체를 포함한 개체의 실존 역량 및 행위 역량의 원천이다.

2. 스피노자 인간학의 기초: 코나투스

‘노력’, ‘경향’, ‘분투’ 등을 의미하는 코나투스(conatus) 개념은 스토아 학파 시절부터 데카르트와 홉스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지만, 스피노자 철학 전반에서 코나투스는 핵심적인 개념이 된다. 일단 코나투스, 사물의 자기보존 노력은 모든 유한한 사물의 본질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모든 사물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노력[conari]”하는데(E3p6), 이 “노력”(conatus)은 그 사물의 “현행적 본질 자체”(E3p7)이다. 여기서 자기보존을 위한 ‘노력’은 생명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²​ 이 개념은 즉 의식적이고 지향적인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유한한 사물에 적용된다.

또한 코나투스 역시 신의 역량에 대한 유한한 표현이며, 따라서 유한한 사물이 스스로 지니는 역량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량은 외적 원인에 의해 방해받거나 제거되지 않는 한 지속한다.

3. 인간의 본질로서 욕망

지향적 및 목적론적인 형태로 자기보존 노력을 기울이는 인간의 코나투스는 욕구(appetitus; apetite) 혹은 욕망(cupiditas; desire)이라고 불린다. 정확히는, 코나투스가 정신에서만 표현될 경우 의지, 정신과 신체에서 동시에 표현될 경우 욕구, 이 욕구가 욕구하는 자에 의해 의식될 경우 욕망이라고 불린다.

선과 악은 이러한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다시 말해 대상은 선하기 때문에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욕망하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 주장은 『윤리학』에서 이야기되는 진정한 자유로의 길에 대한 논의라는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보통 인간은 자기와 자기의 행동을 규정하는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며, 이러한 착각 때문에 자기가 자유롭다는 거짓 믿음을 지닌다. 반면 자기를 규정하는 원인들에 대한 적합한 인식을 성취할 때 가상이 아닌 진정한 자유로의 가능성이 열린다.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욕망하는 존재이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다음의 세 가지 함의를 지닌다. 첫째, 욕망은 스스로가 본질 자체인 까닭에, 주어져 있는 본질적인 무엇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그에 가해지는 다양한 변용에 따라 변화한다. 그래서 자유를 추구하고 능동적이 되는 길은 이 다양한 변용들을 조절해나가는 길이다. 둘째, 인간의 본질인 욕망은 항상 정신과 신체의 연합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전의 철학적 전통에서처럼 정신과 신체 사이의 위계에 따라 규정되거나 정신을 그 본질로 갖지 않는다. 나아가 정신의 능동성과 신체의 능동성을 반비례하는 것으로 이해하던 기존의 많은 철학적 입장과 달리, 인간 정신의 역량과 신체의 역량은 동일하게 변화한다. 셋째, 이성과 욕망, 이성과 정서 역시 대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욕망 혹은 정서를 이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두고 이성의 통제 아래 억제하려는 철학적 기획들에 반대한다.

제2장 세 가지 일차 정서: 욕망, 기쁨, 슬픔

1. 역량의 변화로서의 정서

정서란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하는 “신체의 변용들” 및 이 “변용들에 대한 관념들”을 뜻한다(E3d3). 제5강에서 다루었던 변용에 의한 상의 형성을 생각해보면, 외부 원인에 의해 변용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상상은 우리 최초의 인식이 수동적인 형태로 시작함을 시사한다. 그런데 우리의 신체를 변용하는 물체는 대개 우리에게 이롭거나 해롭다. 이롭거나 해롭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자기보존 및 행위 역량의 증대에 도움 되거나 방해 된다는 뜻이다. 이때 변용으로 인한 행위 역량의 증대 및 감소와 동시에 정신에 느껴지는 것이 바로 정서이다. 역량의 증대에 동반하는 정서는 기쁨, 역량의 감소에 동반하는 정서는 슬픔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에게 정서란 곧 “코나투스 역량의 변화”(진태원, 2022, 212)이다.

2. 세 가지 일차 정서

스피노자는 우리의 정서가 일차적으로 욕망, 기쁨, 슬픔으로 이루어지며 나머지 모든 정서들은 이 세 가지 정서로부터 파생된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기쁨은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수동”, 슬픔은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수동”이다(E3p11s). 다시 기쁨은 쾌감과 희열, 슬픔은 고통과 우울로 나뉜다. 쾌감과 고통은 신체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들에 비해 더 많이 변용되는 경우에 생겨나고, 희열과 우울은 신체의 모든 부분들이 동등하게 변용될 때 생겨난다.

쾌감은 신체 역량의 불균등한 증대인 까닭에 신체에 해로울 수도 있는 반면, 희열은 신체 역량의 균등한 증대인 까닭에 항상 신체에 이롭다. 이와 비슷하게 고통은 신체 역량의 불균등한 감소인 까닭에 신체에 이로울 수도 있는 반면, 우울은 신체 역량의 균등한 감소인 까닭에 항상 신체에 해롭다.

최후 저작인 『정념론』에서 놀람, 사랑, 미움, 욕망, 기쁨, 슬픔을 기초 정념으로 제시했던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에게는 오직 역량의 증대와 감소가 관건인 까닭에 이 중 욕망, 기쁨, 슬픔만이 기초 정념으로 인정된다.

제3장 연관망으로서의 정서

1. 사랑과 미움

사랑과 미움은 각각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파생되는 정서이다. “사랑은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에 수반되는 기쁨”이며, “미움은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에 수반되는 슬픔”이다(E3p13s). 그리고 인간은 사랑을 야기하는 대상을 추구하고 미움을 야기하는 대상을 멀리하려고 노력한다. 즉 인간은 자기의 역량을 증대시켜주는 대상을 사랑하고 좇으며 역량을 감소시키는 대상을 미워하고 배격한다.

2, 정서들의 연관망

그런데 스피노자에 의하면 실제로 우리의 역량을 증대시켜주더라도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역량을 감소시켜주더라도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우리에게 이로운 대상이라도 우리가 이 대상을 해로운 것으로 상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미워하게 되며, 우리에게 해로운 대상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이롭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왜냐하면 “어떤 것이든 간에 우연에 의해 기쁨과 슬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E3p15). 스피노자에 의하면 “어떤 실재를 기쁨이나 슬픔의 정서(이 실재 자체는 이 정서들의 작용인이 아니다)와 함께 우리가 바라보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이 실재를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있다”(E3p15c).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 기쁨의 실제 원인이 아니더라도, 해당 사물에 대한 지각이 기쁨의 정서와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그 사물을 기쁨의 원인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 사물을 사랑할 수 있다. 그 사물과 기쁨 사이에 객관적 인과 관계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사물로부터 기쁨을 연상함으로써 인과관계를 상상하게 되고, 이 상상을 파기하는 경험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 사물을 사랑하게 된다.

이 정리 15의 주요 논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서의 인과관계는 우연에 의해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된다. 일견 정신이 정서를 형성하는 일은 정서를 촉발하는 대상과의 객관적 인과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듯 보이나, 이 인과관계는 우연적인 상상의 연상작용에 의해 굴절된다. 둘째, 물리적 작용은 정신적 작용에 의해 굴절된다. 이 굴절은 정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자발적으로, 혹은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셋째, 우리의 정서는 외부 대상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정신의 비자발적 연상에 의해서도, 즉 이중의 측면에서 수동적으로 규정된다.

이처럼 우연적인, 상상된 인과관계에 따라 규정된 사랑과 미움에는 각각 공감(sympathia)과 반감(antipathia), 혹은 끌림(propensio)과 싫음(aversio)이 포함된다. 끌림과 싫음이란 대상들에 대해 우리에게 의식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나는 사랑과 미움인데, 끌림과 싫음은 사실 우리가 해당 사물들이 우리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대상과 유사하다고 상상함으로써 형성되는 정서이다.


¹ 책에서는 “상위의 개체가 다른 개체들과 합성하여 더 상위의 또 다른 개체를 형성할 수 있”으며, “이렇게 계속 나아가다 보면, […] ‘자연 전체가 단 하나의 개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고 말한다(진태원, 2022, 194). 그러나 만약 이런 식으로 논변이 개진된다면 이는 문제가 있다고 보이는데, 왜냐하면 유한한 개체를 아무리 합성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무한자가 아니라 항상 유한한 개체일 터이기 때문이다.
² ‘코나투스’를 왜 ‘노력’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음차하는지 의문이다. 저자는 ‘노력’이라는 용어가 의식적이고 지향적이라는 함축을 띠고 있어서 이 단어를 번역으로 채택하면 난점이 발생한다고 설명하지만, 저자에 의하면 라틴어 ‘conatus’ 역시 기본적으로 똑같은 함축을 지닌다. 스피노자가 기존의 낱말 ‘conatus’에 확장된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우리도 ‘노력’에 그러한 확장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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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코나투스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코나투스가 안 나온 건 좀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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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요약했는데 왜 코나투스 얘기가 없지...?' 하다가 제1장 요약을 빼먹은 걸 이제야 알아챘네요 ㅋㅋㅋㅋㅋ 덕분에 빠졌던 코나투스 이야기를 보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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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것들을 끄적여보겠습니다.

저자도 의식하고 있듯이, 코나투스, striving, 노력하다, 와 같은 단어들은 굉장히 심리적인 단어 같아보이고, 생명체에 한정될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철학적 법칙>에서 데카르트는 이런 심리적 뉘앙스를 배제합니다:

  1. The striving after motion in inanimate things, and how it should be understood.
    When I say that the globules of the second element 'strive' to move away from the centres around which they revolve, it should not be thought that I am implying that they have some thought from which this striving proceeds. I mean merely that they are positioned and pushed into motion in such a way that they will in fact travel in that direction, unless they are prevented by some other cause (CSM, Principles, III, my emphasis).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데카르트는 코나투스란 단어를 관성이란 개념처럼 씁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에티카>가 데카르트에 대한 답장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용법을 보게 되면 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무생물에게도 적용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관성으로 해석돼야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 생각엔 코나투스는

하려는 경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나투스는 독특한 개체에 적용이 되는데, 독특한 개체란 그 개체의 부분들이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정의됩니다 (E2d7). 그리고 이 정의로부터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이끌어내지요. 그래서 제 해석으로는, 코나투스는 부분들의 조합이 부분들 사이의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보존을 야기하는 그런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자가 있다고 해봅시다. 의자의 부분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받칠 수 있게 디자인 돼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자의 존재는 이런 부분들 사이의 움직임과 정지가 보존이 되겠지요. 하지만 이 의자가 부러지게 된다면, 그리고 만일 제가 부러진 의자 조각들을 손으로 붙이고 있다면, 이 부분들의 움직임과 정지를 보존하는 것의 원인은 저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이 의자가 독특한 개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부러진 의자는 코나투스가 없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 해석과 관성의 연관성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독특한 개체에 대해서는 멜라메드가 물체가 아닌 묶음 (aggregate)이라고 주장했습니다 (Weak Individuals or Acosmism?논문 참조). 예를 들어, 제가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졌다면, 이 넘어짐을 야기한 것이 제 몸, 그리고 돌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합쳐서 한 독특한 개체를 구성한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멜라메드의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우선 다음을 보시죠:

Nothing can be destroyed, except by a cause external to itself (E3p4).

입니다. 하지만 이는 멜라메드의 독특한 개체의 해석과 상응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두 구가 서로에게 빠른 속도로 접근을 하고 있다고 해봅시다. 이 두 구들은 부딪힐 것이고, 그래서 부딪힘이라는 사건을 야기할 것입니다. 멜라메드에 의하면 이 두 구는 하나의 독특한 개체를 형성해야합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의하면 독특한 개체는 자신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독특한 개체 밖의 것에 의해 파괴될 수 있죠. 그렇지만 두 구가 충분히 빠르게 접근을 한다면 두 구는 깨질 것이고, 두 구라는 묶음은 파괴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멜라메드의 독특한 개체가 묶음이라는 해석은 받아들여질 수가 없습니다. 물론 멜라메드는 이 논문에서 독특한 개체와 코나투스를 연결짓지 않습니다. 무우주론적 해석에 대한 반박을 하기 위해 독특성 (singularity) 과 개인성 (individuality)을 구분하고, 후자의 개념이 스피노자의 무우주론적 해석에 반박을 해줄 수 있다고 주장하죠. 하지만, 다른 문맥이더라도, 멜라메드의 해석을 따라서 독특한 개체가 물체가 아닌 묶음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 같습니다.

물론 데카르트 이후의 부분들은 제 해석이고, 일반적인 해석은 아닐 수 있으니, 이 점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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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공을 헤겔로 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스피노자에 대해 세부적인 해석상의 논점까지 굉장히 잘 아시네요. 혹시 수업을 집중적으로 듣거나 따로 본격적인 연구를 하셨나요?

읽고 있는 책에서도 스피노자의 데카르트 비판이 심심치 않게 나오던데,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지대한 영향 아래에 있군요. 마치 헤겔이 저작 전반에서 칸트 철학을 비판하면서도 칸트의 막대한 영향을 받은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인용하신 데카르트의 구절도 보니까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과 꼭 닮아 있네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사실 저는 스피노자의 개체 개념을 보고 『순수이성비판』에서 등장했던 제2이율배반을 떠올렸습니다.

정립: 세계 내의 모든 합성된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어디에서나 단순한 것이거나 이것으로 합성된 것만이 실존한다.(A434/B462)

반정립: 세계 내의 어떤 합성된 사물도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세계 내 어디에서도 단순한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A435/B463)

아마 라이프니츠는 정립(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나 『성찰』에서도 '합성의 규칙'이라는 이름 아래 단순한 것에서 출발해서 복잡한 것을 합성해나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구절을 봤던 것 같은데, 확신은 안 섭니다), 스피노자는 반정립에 해당할 것 같은데, 이런 철학사적 관계를 추적해보는 작업도 재밌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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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세미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텀페이퍼로 E2p49c (The will and the intellect are one and the same) 를 변호했습니다. 데카르트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이는 스피노자의 데카르트를 향한 반박입니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의지는 신에게 받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했죠. 하지만 스피노자는 의지는 인지와 같은 intellect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니깐요. 코팅햄이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를 잘못 읽었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스피노자를 좀 더 도와주면 데카르트를 궁지에 몰 수 있다 -- 이게 제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언급하신 멜라메드의 논문은 멜라메드가 헤겔을 비판하는 논문이었기 때문에 읽긴 했습니다... ㅋ 하지만 스피노자 읽는데도 도움이 많이 되더군요.

제 짧은 지식으로는 스피노자와 데카르트가 어떤 철학자들보다도 가깝습니다. 지금 <성찰>을 읽는 중인데도, 정말 너무나도 같습니다. 중요한 사상 몇 개는 다르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너무 비슷한 게 많더군요 (스피노자의 존재론적 증명도 데카르트에서 가져온 것이겠지요.). 심지어 스피노자 저작 중에 데카르트의 철학을 기하학적 방법론으로 서술한 저작도 있죠. 그래서 둘은 떼놓을 레야 떼놓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칸트의 이율배반이군요. 혼자 읽어본 적은 있지만 제대로 연구해본 적은 없어서 모르는 분얀데, 이렇게 접하게 되네요. 생각해볼 거리가 생겼습니다. 전 이번 학기에 아리스토텔레스 공부할 예정이라 그런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리학>에서 한 얘기가 떠오르더군요. 지금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갖고 있지 않아서 인용은 못하겠지만, 계속 나눌 수는 있지만, 나누게 되면 현실성을 잃게 된다라는 구절이 떠오르더군요.

근데 언급하진 않았지만 위 요약에서 확신이 없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이 부분인데요, 스피노자는 simple body를 인정하는 것 같아보이거든요. E2p13후에 나오는 "물리적 여담"을 보게 되면,

So far we have been speaking only of the most simple bodies, which are only distinguished one from the other by motion and rest, quickness and slowness. We now pass on to compound bodies (Axiom II, Physical Digression)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전 항상 스피노자는 나눠지지 않는 물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고 했는데, 무한한 분할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살짝 혼란이 왔네요. 시간 되시면 인용하신 책에서 한 번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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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고 있는 책에서는 스피노자에서 개체가 무한하게 분할된다고 말하고 있네요.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원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체는 다수의 물체들로 합성되어 있으며, 개체를 이루는 부분들인 다수의 물체들 각자는 또한 그 자체가 다수의 부분들로 합성된 또 다른 개체입니다. 그리고 하위의 개체를 형성하는 부분들 각자도 역시 그 자체가 다수의 부분들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 물체로서의 개체입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에게 개체는 무한하게 분할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진태원, 2022, 194)

제가 원문을 제대로 읽어본 적 없이 이 책만 읽고 있어서 몰랐는데, 스피노자가 이걸 또 '단순한 물체'라고 부르는군요. 사태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추후 시간 내서 공부를 더 해봐야겠네요. 생각할 좋은 주제들을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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