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원,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제5강 요약

제5강 정신적 자동장치

제1장 인식의 과정

‘정신적 자동장치’라는 표현은 『지성교정론』에서만 사용되고 『윤리학』에서 사용되지는 않지만, 스피노자의 심리철학 및 인식론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이 표현은 들리는 것과 달리 정신을 단순한 수동성으로 간주하지 않고, 정신의 능동성과 수동성에 관한 새로운 발상을 제공한다.

일단 스피노자의 심신평행론은 경험론과 단절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기서 경험론이란 로크에서 흄에 이르는 영국의 경험론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외부의 대상을 감각적으로 직접 수용하고 이를 추상함으로써 인식이 얻어진다는 입장을 총칭한다. 반면 스피노자에서 인식은 물체와 정신 사이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정신의 인식은 상(imago)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물체에는 그 정신적 상관물이 존재하는데, 정신은 상에 상응하는 관념인 상상을 통해 인식을 한다. 외부 물체는 신체에 대해 이러저러한 작용을 가함으로써 신체 내에 (이를테면 눈에) 상이라는 변용을 생성하는데, 상은 항상 발생과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관념을 지닌다. 정신은 이 관념을 지각함으로써 인식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상의 생성과 정신의 상상은 동시에 일어날 뿐, 상이 정신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식이 항상 관념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관념이 스스로 원인으로서 다른 관념을 야기하는 역량을 지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관념은 수동적인 무엇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다. 관념이 상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은, 상을 형성할 수 없는 실재에 대한 관념(논리적 관념, 수학적 관념 등)을 모두 허구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관념은 “도판 위의 침묵하는 그림”(E2p48)처럼 물체에 대한 수동적인 표상이 아니라 스스로 원인이 되어 활동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관념은 오히려 그 스스로 긍정 혹은 부정을 함축한다. 정신은 사유의 양태로서 다른 사물들을 생산하는 원인으로서의 역량을 나눠 갖는데, 이 점에서 관념은 수동적으로 외부 물질을 표현하지 않고 정신의 능동성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서 지성이 관념을 지각하는 일과 별개로 관념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의지에 부여되었던 것과 달리, 스피노자에서 관념의 긍정이나 부정은 관념과 따로 독립되어 있는 의지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아가 스피노자는 지성과 의지를 비롯해 정신의 능력들을 구별하는 일에도 반대한다. 이는 데카르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맞서 모든 학문이 하나의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바를 급진화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들뿐이라고 말하며, 의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의지작용(volitio)만이 있을 뿐 의지(voluntas) 일반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에게 의지 일반은 흼(whiteness) 일반과 마찬가지로 사고상의 존재자(ens rationis)일 뿐이다. 이는 정신 내에 상이한 직능(능력; facultas)들이 존재하고 이 직능에 의해 여러 정신 작용이 가능하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일이다.

제2장 상상

1. 상상의 정의

신체가 “외부 물체의 본성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변용된다면”, 정신은 추가적으로 이 물체의 현존을 부정하는 변용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계속해서 그것이 현존한다고 인식한다(E2p17). 예컨대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음식의 맛에 대한 상이 신체의 변용으로 발생한다면, 정신 속에서는 이 음식을 다 먹어서 음식이 없어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상에 대한 관념이 지속된다. 이 관념은 다른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이전의 음식에 대한 관념을 잊어버릴 때까지(즉 이 물체의 현존을 배제하는 변용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된다. 상에 대한 관념, 즉 상상은 외부 물체가 현존하지 않는 경우에도 계속해서 그 물체를 “마치 우리에게 현존하는 것처럼 표상한다”(E2p17s).

2. 상상의 기능

상상은 다음의 두 가지 기능을 지닌다. 첫째, 상상은 외부 물체에 의한 신체의 변용인 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둘째, 상상은 지금 현존하지 않는 물체에 대한 상을 다시 지각한다(재현한다). 종래의 철학에서는 첫째 기능을 지각이라고 부르고 상상은 둘째 기능만을 일컫는 용어였지만, 스피노자는 상상이라는 용어를 보다 넓게 사용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상상은 그 자체로는 거짓이거나 오류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식은 상상을 통해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신이 상상하는 사물이 현존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는 오류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사물이 실제로는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정신이 알고 있기만 한다면 오류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한 점을 정신이 깨닫지 못할 때, 즉 “현존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들의 실존을 배제하는 어떤 관념을 정신이 결여”(E2p17s)할 때 비로소 오류가 일어난다.

실재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물체를 상상하는 정신의 능력은, 그것이 허구라는 점을 스스로 알고 있기만 한다면 유용하고 필수적인 기능이다. 예컨대 우리는 가상의 인물들을 설정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상상함으로써 문학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 나아가 현존하는 물체의 관념들을 축적하고 과거의 관념들과 종합함으로써만 보다 고차적인 인식이 가능하며, 국가와 민족 같은 사회적 개념들 역시 상상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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